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조선 후기사회신분제의 동요

공명첩 발행

흉년이 들었으므로 진휼을 베풀기 위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통정대부(通政大夫)동지사(同知事)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판관(判官)별좌(別坐)찰방(察訪)주부(主簿)첨절제사(僉節制使)만호(萬戶)호군(護軍사직(司直) 중 및 승인(僧人) 가선대부⋅통정대부 등의 공명첩(空名帖)1) 2만 장을 만들어 팔도에 나누어 보내어 팔도록 하였다.

숙종실록』권22, 16년 11월 10일(정유)

1)조선 시대 수취자의 이름을 적지 않은 백지 임명장으로, 관직이나 관작의 임명뿐 아니라 양역(良役), 천인의 천역(賤役), 향리의 역을 면제해 주는 공명첩도 있다.

以歲飢設賑, 造嘉善, 通政, 同知, 僉知, 判官, 別坐, 察訪, 主簿, 僉使, 萬戶, 護軍, 司直及僧人嘉善, 通政等空名帖二萬張, 分送八路許賣.

『肅宗實錄』卷22, 16年 11月 10日(丁酉)

이 사료는 1690년(숙종 16년) 흉년이 들자 많은 관직 중 종이품 품계인 가선대부(嘉善大夫), 정삼품 품계인 통정대부(通政大夫) 등의 공명첩(空名帖) 2만 장을 만들어 전국에 나누어 팔도록 한 내용을 담고 있다.

조선 후기에는 전통적인 신분 계급 구조에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다. 양인노비의 엄격한 차별과 세습성을 특징으로 하는 양천제가 무너지고, 양반상민이 대칭되는 새로운 계급 구조가 형성되었다.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조선 시대 신분제는 더욱 급속하게 무너졌는데, 노비 스스로 도망하여 신분을 해방시키기도 하였다.

이에 국가는 군역 대상자와 재정의 궁핍을 보충하기 위해 노비를 단계적으로 해방시켜 주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군공(軍公)을 세우거나 흉년이나 전란 때에 국가에 곡식을 바친 사람을 양인으로 풀어 주기도 하였다. 이렇듯 군공을 세운 사람 또는 납속(納粟)한 사람에게는 ‘공명첩(空名帖)’을 주었는데, 이는 수취자의 이름을 기재하지 않은 백지 임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제도는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 점차 국가재정이나 군량이 부족할 때, 또는 진휼을 위해, 심지어는 사찰을 중수하는 비용을 얻기 위해 남발되었다. 그 폐단은 처음 발급될 때부터 나타났다. 예컨대 납속자들을 모집하는 관원인 모속관(募粟官)들이 공명고신(空名告身)을 사사로이 주고받기도 했으며, 이조와 병조에서는 공명첩을 발급만 했을 뿐, 누가 어떤 공으로 받은 것인지 기록해 놓지도 않았고, 그 뒤의 관리도 소홀히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지방관과 서리들의 폐단이 심했고, 공명첩을 위조하거나 지나치게 많이 발급하는 등 여러 가지 폐단이 일어났다. 그러한 문제가 더욱 심해지면서 조선 후기 신분 제도를 문란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사료에서 나타난 것처럼 1690년에는 정부에서 진휼곡을 모집하기 위해 2만 장의 공명첩을 발부하여 8도에 나누어 팔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1731년(영조 7년)에는 8000장, 이듬해에는 6100장, 1762년(영조 38년)과 1763년(영조 39년)에는 1만 2300장을 각 도에 보내 판매하였다.

납속을 통한 공명첩의 발행으로 신분 상승효과를 가져왔으나, 관직과 산계(散階)를 주는 고신공명첩[告身空名帖]은 실직(實職)이 아니라 허직(虛職)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관직은 자손에게 미치지 못하고 가문의 지위를 높이는 데도 크게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다. 따라서 납속을 대가로 공명첩 얻기를 원하는 사람이 많지 않자 지방관은 모속(冒贖)의 공을 올리기 위해 강제로 팔아넘기는 일도 있어, 원하지 않아도 공명첩을 사들이는 경우가 생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공명첩을 사들이고도 자기의 이름을 써 넣지 않아, 오늘날 전해지는 고문서에는 이름이 기재되지 않은 공명첩을 볼 수 있다. 또한, 교지(敎旨) 중에서 문서의 필체와 이름의 필체가 다른 경우에는 공명첩일 가능성이 높다.

조선 후기의 면역은 꾸준히 증가하여 1786년(정조 10년)에 이르면 양반중인을 포함한 면역 인구가 46.5%에 달하였다. 이러한 다양한 피역(避役) 현상은 양정(良丁)의 부족을 초래하였고, 또한 납속 제도의 운영에서 공명첩의 남발과 수령의 늑탈 폐해가 커지자, 1745년(영조 21년)부터는 큰 진휼이 필요한 때 이 외에는 공명첩 발급을 제한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속대전』과 『대전통편』에서 법제화되어 시행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조선후기 신분제 동요의 일고찰; 납속책, 공명첩 발급을 중심으로」,『논문집』1,문수홍,동국대학교 경주대학,1982.
「조선 후기 진휼정책의 구조와 운영」,『한국사연구』143,원재영,한국사연구회,2008.

관련 이미지

공명첩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링크연결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