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조선 후기사회신분제의 동요

양인의 신분 상승 운동-모속

각 고을에서 세초(歲抄)1)할 때에 한정(閑丁)을 얻지 못하여 매번 나이 어린 자로 충정(充定)하며, 사망한 자와 늙어서 면제 받아야 할 자의 빈 자리까지도 대신 투입할 사람이 없으니, 이는 한정 중에 원래 그럴 만한 사람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지금 양민들이 투속(投屬)2)하는 경로가 매우 많고 액수(額數)가 한정이 없어서 상하가 서로 은폐하여 끝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양민의 신분인 자가 다소 흑백을 분별할 줄 알게 되면 반드시 자신이 부역(賦役)이 없을 때에 먼저 몸을 의탁할 곳을 만드니, 각 고을에서 다시는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

경각사(京各司)로 말하면 삼의사(三醫司)의 생도(生徒)와 교서관(校書館)의 창준(唱準), 각 아문(衙門)의 군관 등의 역(役)이 이것이며, 지방으로 말하면 신이 일찍이 영남 어사(嶺南御史)가 되었을 때에 들으니 감사아병(牙兵)으로 소속되어 있는 자가 성주(星州) 한 고을에만 거의 800~900명에 이른다고 하였는바, 다른 고을의 사정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기타 병사(兵使)수사(水使), 영장(營將)과 방어사(防禦使)의 군관 등 명색을 다 들기가 어려운데, 이것은 모두 양민을 내몰아 역(役)을 피할 수 있는 소굴로 가게 하는 것이니, 만약 크게 바로잡지 않는다면 나이 어린 자로 충정하는 것과 늙은 자와 죽은 자에게 군포(軍布)를 징수하는 일이 형세상 반드시 이르게 될 것입니다.

서울과 지방의 양민이 소속된 곳 중 원래 정해진 숫자가 있는 곳은 정원 이외의 사람을 도태시키고, 원래 정해진 숫자가 없는 곳은 정원을 헤아려 정해서 모속(冒屬)하는 폐단이 없게 하소서. 임금이 이르기를 “아뢴 대로 하라. ” 하였다.

『약천집』권13 「계」 청이정양민모속계

1)사망 또는 도망하거나 질병에 걸린 군병을 조사하여 결원을 보충하는 것으로 6월과 12월 두 차례 실시하였다.
2)자기 몸을 남에게 종속시킴을 이르는바, 공사천(公私賤) 또는 양민신공(身貢)조세(租稅)공물(貢物)군역(軍役) 등의 무거운 부담을 피하기 하여 왕실(王室) 직속의 내수사(內需司) 또는 대군(大君)⋅제군(諸君)⋅권세가 등에 스스로 들어가 의탁함

各邑歲抄時, 不得閑丁, 每以兒弱充定, 至於物故老除, 亦無代定之路, 此非閑丁之元無其人也. 凡今良民之投屬, 其孔穴甚夥, 額數無限, 上下蒙蔽, 無有紀極. 身爲良民者, 若稍分黑白, 則必及其無役之時, 先爲託身之所, 各邑更無下手之地. 以京各司言之, 三醫司生徒, 校書館唱準, 各衙門軍官等役是也, 以外方言之, 臣九萬曾爲嶺南御史時聞之, 則監司牙兵之在於星州一邑者幾至八九百云, 他邑可推而知也. 其他兵水使營將, 防禦使軍官等名色, 殆難盡擧, 此皆驅良民之淵藪, 若不大加釐正, 則兒弱之充定, 老故之徵布, 勢所必至. 請京外良民所屬之處, 元有額者汰其額外, 元無額者量定額數, 俾無冒屬之獘.

上曰依啓.

『藥泉集』卷13 「啓」 請釐正良民冒屬啓

이 사료는 조선 후기 문신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이 지은 시문집인 『약천집(藥泉集)』에 수록되어 있다. 남구만효종(孝宗, 재위 1649~1659) 대에 과거에 급제하여 현종(顯宗, 재위 1659~1674) 대에는 관찰사를 역임하고 숙종(肅宗, 재위 1674~1720) 대에는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까지 지낸 인물이다. 그가 지은 『약천집』의 계(啓) 중에서 사료로 실린 「청이정양민모속계(請釐正良民冒屬啓)」는 조선 후기의 신분제 붕괴에 따른 모속(冒屬) 현상을 바로 잡도록 군역과 관련해 논변한 것이다.

모속이란 어떤 집단이나 부류에 법을 어기고 함부로 들어가 속하거나 속하게 하는 것으로, 주로 신분을 속여 단체에 속하는 범법 행위를 말한다. 이렇게 모속이 성행하게 된 데에는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 양반 중심의 신분제가 동요하고 신분 상승이 가능해진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조선 후기에 산업이 발달하면서 전통적인 신분 계급 구조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신분제 붕괴는 무엇보다도 지주제의 발전으로 그 단서가 열렸다. 16세기 이후로는 병작제가 보편화되면서 양인 중에서 지주의 위치에 있던 부류가 양반(사족)으로 상승하고, 작인(作人) 곧 소작인의 처지에 놓인 부류는 양인이건 노비이건 상한(常漢, 상민 또는 상놈)으로 불리기 된 것이다.

16세기 말의 임진왜란과 17세기 전반의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양천제(良賤制)는 더욱 급속하게 무너졌다. 노비 스스로 도망하여 신분을 해방시키기도 하고, 국가는 군역 대상자와 재정의 궁핍을 보충하기 위해 노비를 단계적으로 해방시켜 주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군공(軍功)을 세우거나 곡식을 바치는 자를 양인으로 풀어 주고 속오군(束伍軍)으로 편제하여 군역을 지우기도 하였다. 또한 1669년(현종 10년)에는 노비 인구를 제도적으로 줄이기 위해 어머니가 비(婢)인 경우에만 그 자식을 노비로 만들고, 나머지는 양인이 되게 하는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을 시행하였다.

한편 신분제가 붕괴하면서 그에 대신하여 나타난 반상 구조는 양반의 계급적 구성을 매우 복잡하게 만들었다. 국가는 기준이 모호한 양반을 일률적으로 대우하지 않았다. 과거 응시 자격, 특히 고급 문관이 되는 생진과(生進科)와 문과(文科)의 경우에는 4조 중에 현관(現官)을 지낸 사람이 있어야 응시할 수 있게 하였고, 군역을 면제시켜 주는 경우에는 ‘유학(幼學)’으로 기록된 사람에 한하였다. 이러한 신원의 파악은 국가가 작성한 호적에 의해서 확인되었으므로, 상한(常漢) 중에서도 벼슬을 하고 싶거나 군역을 면제받고자 하는 사람은 부정한 방법을 통해서 호적을 바꾸거나 족보를 위조하기도 하였다. 조상의 신분을 위조하는 것을 ‘환부역조(換父易祖)라’ 하고, 자신의 직업을 ‘유학’이라고 속이는 사람을 일컬어 함부로 ‘유학’을 칭한다는 뜻의 ‘모칭유학(幼學冒稱)’이라고 했다.

이처럼 양인들이 속임수를 써서 양반의 신분을 얻는 모속이 성행하자 양인들이 감당해야 할 부역 체계가 문란해졌다. 그뿐만 아니라 군역 제도의 문란함은 이로 말할 수 없이 심각해졌다. 군포는 원칙적으로 양인 이상의 장정 수에 따라 걷는 것이지만, 국가는 군포총액을 미리 정해 놓고 이것을 마을 단위로 할당하여 부과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그러나 상당수 양인들은 이 군포를 내지 않기 위한 피역(避役)의 방법으로 모속을 선택했기 때문에, 남은 양인들이 대신 감당해야 할 군포의 양이 상당해졌다. 따라서 양반이 내지 않는 군포나 이웃 사람 혹은 친척의 군포까지 떠맡아야 하고, 이미 죽은 사람이나 어린아이에 대해서 군포를 부과하는 사례가 있었다. 군포의 폐단은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걸쳐 가장 심하여 많은 양인을 고통스럽게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구만은 모속으로 인한 폐단을 바로 잡을 것을 건의하는 등 정부 차원에서 해결책이 논의되었다. 그러나 양인 중에서 신분을 속여 양반 행세를 하는 가짜 양반이 이후로 더욱 많아져서 19세기에 들어가면 전체 주민의 과반수가 양반으로 호적에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조선 후기에는 신분제가 크게 흔들리게 되어, 결국 19세기 말에는 신분제의 혁파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18세기 전반 사모속의 실태와 그 성격」,『충북사학』4,김우철,충북대학교 사학회,1991.
「조선후기 신분제 동요의 일고찰; 납속책, 공명첩 발급을 중심으로」,『논문집』1,문수홍,동국대학교 경주대학,1982.
「17⋅8세기 납속책의 실시와 그 성과」,『역사교육논집』15,서한교,역사교육학회,1990.
저서
『조선은 지방을 어떻게 지배했는가』, 한국역사연구회, 아카넷,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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