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조선 후기사회신분제의 동요

노비의 신분 상승-속량

【속량(贖良)】 공노비로서 다른 노비를 선발하여 양민이 된 자는 선발한 다른 노비는 여러 식년(式年)의 호적을 상고하여 성과 이름을 붙인 것이 확실한 뒤에 연령이 상당한 자로 헤아려 노(奴)는 노(奴)로 대신하고 비(婢)는 비(婢)로 대신하되, 혹 거짓으로 드러나면 그 자신과 관청의 감관(監官)⋅색리(色吏)⋅두목은 모두 곤장(杖) 100대, 유배 3000리를 보내며 수령은 관직을 박탈하고 관찰사는 파직한다. 양민이 된 뒤 10년 이내에 대납(代納)노비가 죽게 된 자는 천민으로 환원한다.

공노비로서 협박하여 양민이 된 자 천민으로 환원하고 색리는 곤장 100대로 하여 멀리에 유배하며, 관원은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로 죄를 논한다.

○ 공방에 근무하는 노비양민이 되는 가격은 동전 100냥을 넘지 못하고 100냥을 넘게 거둔 자는 사불이실률(詐不以實律)로 죄를 논한다. 사노비양민이 되는 가격도 이와 같다.

○ 절의 노(奴)사노비를 아내로 맞이하여 얻은 소생을 처의 상전에게 속량하는 자와 사노비의 자녀로서 어머니의 상전에게 속량하는 자는 모두 양민이 되는 것을 허락하되 그 아비의 상전으로서 강제로 노비로 만든 자는 압량위천율(壓良爲賤律)로 죄를 논한다. 양민이 된 자는 기한 이내에 그 사실을 증명하는 문서를 받지 아니하면 장례원(掌隷院) 소속 노비로 한다.

○ 대개 천민으로서 비록 자손은 아울러 영구히 양민이 되는 것을 허락한 자라도 천민과 혼인하여 얻은 자식은 양민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 함경도의 사노비로서 다른 도(道)에서 옮겨 온 자는 양민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고, 원래 거주하던 사람으로서 양민이 되기를 원하는 자도 또한 스스로 그 주인에게 가서 양민이 되게 한다.

○ 이미 양민이 된 노비를 선물(膳物, 물품)이라는 명목으로 강제로 빼앗는 자와 선조 대에 양민이 되는 것을 허락받은 노비를 자손에 이르러 도로 노비로 만드는 자는 모두 압량위천율로 죄를 논한다. 양민이 된 지 이미 여러 대가 지난 뒤에 옛 주인을 칭하고 사람을 바꾸어 괴롭히는 자는 (다스리는) 율(律)이 같다.

○ 자기의 노비가 아닌 것을 혹은 몰래 팔고 혹은 거짓으로 양민을 만들었다가 원래 주인이 찾아내서 데려오면 몰래 훔쳐 판매한 가격을 훔친 자로부터 징수하고 거짓으로 양민을 만들어준 가격도 이와 같다. 이미 양민이 된 노비면 침범하지 못할 것이며 위반하는 자는 압량위천율로 죄를 논한다.

속대전』권5, 「형전」 속량

【贖良】 公賤代口贖身者, 所代奴婢, 累式年戶籍相考, 名付的實, 然後以年歲相當者計口, 以奴代奴, 以婢代婢, 如或冒僞現露則其當身⋅監官⋅色吏⋅頭目, 並杖一百流三千里, 守令削職, 觀察使罷職【贖身後十年內, 代納奴婢物故者, 還賤】

【○ 公賤詐爲贖身者, 還賤, 色吏杖一百逺地定配, 官員以制書有違律論】

○ 工匠代給奴贖良價, 毋過錢文百兩, 濫徴者以詐不以實律論【私奴婢贖良價同】

○ 寺奴娶私賤所生, 贖良於妻上典者, 私賤子女之贖良於母上典者, 並許良, 而父上典, 勒作奴婢者, 以壓良爲賤律論【贖良者, 限內不受立案則屬公掌隷院】

○ 凡賤口雖幷子孫永許爲良者, 嫁娶賤口所生則勿許免賤

○ 咸鏡道私賤自他道移來者, 勿許贖良, 元居民願贖者, 亦令自就其主贖良

○ 已贖奴婢稱以膳物侵徴者, 先世贖給奴婢, 至子孫還爲撓奪者, 並以壓良爲賤律論【贖良已過數代後, 稱以舊上典, 換面來侵者, 同律】

○ 非自己奴婢, 或盗賣或僞贖, 而本主推尋則盗賣價, 徴於盗賣者【僞贖價同】 已贖奴婢則勿侵, 違者, 以壓良爲賤律論

『續大典』卷5, 「刑典」 贖良

이 사료는 조선 후기 노비 신분층의 합법적인 신분 상승 방법인 속량(贖良)의 여러 형태와 지켜야 할 내용, 어기면 엄격한 율로 다스린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속량은 노비에게 대가를 받고 신분을 풀어 주어 양인이 되게 하던 제도다. 조선 전기에는 노비가 합법적으로 양인이 되는 길이 거의 막혀 있었으나 조선 후기 신분제가 크게 변화되고 이에 따라 노비 제도 또한 변해 속량이 제도화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양반과 천첩 사이의 소생도 일정한 법적인 수속을 거쳐야만 비로소 종량(從良)이 되도록 규정하였다. 즉 종친과 천첩 사이의 소생은 아무 제한이 없이 양인이 되지만, 양반과 천첩 사이의 소생은 보충대(補充隊)에 보내 군역을 치른 뒤에야 양인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대신해 노비로 삼는 자는 나이가 비슷한 자로 하고, 만약 대신한 노비가 도망했을 때 본인이 살아 있으면 채워 주어야 하며, 채워 줄 수 없는 자는 다시 노비로 전환시킨다고 규정하고 있다.

조선 후기에 신분제가 동요되면서 노비의 지위도 점점 향상되어 노비를 구속하던 법규도 느슨해졌다. 특히 속량은 노비 신공 감액, 공노비제 폐지 등과 함께 노비 제도가 해이해진 중요한 원인이었다. 노비 신분층이 합법적으로 신분 상승을 도모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곡식을 바치고 양민이 되는 납속책, 군공을 세워 양민이 되는 방법, 공로를 인정받아 양민이 되는 방법, 자기 대신 다른 노비를 바치고 양민이 되는 방법이 제도화되어 있었다. 납속책임진왜란 당시 국가재정의 고갈과 군량미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널리 시행되었고, 후기에 들어와서도 흉년에 진휼 정책의 일환으로 빈민을 구제하는 데 필요한 물자를 보충하기 위해 널리 실시되었다. 납속책이 실시되면서 재력 있는 노비납속면천에 의해 양민이 될 수 있었다. 납속면천임진왜란 후에 광범위하게 실시되었다. 조선 후기에 노비양민이 되는 데 필요한 비용은 쌀 160석에 이른 경우도 있었으나, 후기로 갈수록 낮아져 숙종(肅宗, 재위 1674~1720) 대에는 연령에 따라 10~50석으로 낮아졌다. 더욱이 영조(英祖, 재위 1724~1776) 대는 납속면천과 아울러 돈을 내고 양민이 되는 납전면천까지 실시하였다.

이 사료에는 “공방에 근무하는 노비양민이 되는 가격은 동전 100냥을 넘지 못한다. 사노비양민이 되는 가격도 이와 같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당시 동전 100냥은 포 50필에 해당하기 때문에 납전속량을 원하는 노비는 한꺼번에 25년 치의 신공(身貢)을 바쳐야 속량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노비납속속량 가격이 현실화되자 많은 노비가 면천⋅속량되어 양인으로 상승하기가 쉬워졌다. 납속면천이나 납가면천(납전면천)이 광범위하게 행해짐에 따라 노비 신분층은 사회 최하층에서 합법적으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에 재력 있는 노비들은 면천을 꾀하였다.

군공면천은 원래 양역이던 군역에 공사천을 입속시켜 군역 의무가 없는 이들의 입속을 권장하기 위해 실시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속오군⋅아병(牙兵)⋅이노대(吏奴隊) 등 노비들이 입속하는 군대가 설치되었으나, 노비 신분층의 군역 입속은 신공군역이라는 이중 부담으로 고역이 너무 심하여 노비 신분층의 자발적인 입속을 기대하기가 힘들었다. 여기에서 위정자들이 노비 신분층의 자발적인 군역 입속을 장려하기 위해 착안한 것이 군공에 대한 면천논상(免賤論賞)이었다.

군공면천은 임진왜란 때 대대적으로 실시된 바 있었는데, 이때 마련된 『군공사목(軍功事目)』에는 적 1명의 목을 베면 면천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그 후에도 반란을 진압하거나, 역적을 포획하거나, 참수하는 등의 군공을 세우는 경우 그에 대한 보상으로 공로의 다과에 따라 면천⋅면역 등의 포상이 수시로 실시되었다. 또 공노비와 사노비군역에 입속시킨 후 이들에게 무술 연마를 권장하여 국가가 위급할 때 대비하기 위해 무예에 재능 있는 자를 선발하고 그 성적이 우수한 자에게 면천을 허가하기에 이르렀다. 노비의 무재(武才)를 시험하여 성적이 우수한 자에게 면천을 허가하니, 이들에게 무술 연마는 면천하는 첩경이 되었다.

노비 신분층은 군역에 입속하지 않더라도 다른 공로로도 면천이 가능하였다. 『속대전』에는 “명화적(明火的) 5명 이상을 잡아들인 공⋅사노비는 면천한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처럼 도적을 잡으면 면천될 수 있었고, 국경을 넘는 자를 잡는 경우에는 1명만 잡아들여도 면천되었다. 또한 1798년(정조 22년) 함경도에서 대화재가 났을 때 인명을 구한 노비들이 면천된 일도 있었다. 이 외에도 부유한 노비들은 자기 대신 다른 노비를 매입하여 충당하고 자신은 면천되는 대구속신(代口贖身)에 의해서도 쉽게 면천될 수 있었다. 이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은 돈이나 재산이었다. 대구속신 제도는 신분 제도가 동요하는 가운데 국가에서 필요한 최소한의 노비를 확보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졌다.

경국대전』에 없던 노비속량에 관한 규정이 『속대전』에 수록된 것은 조선 후기 경제 생활의 변화에 따라 재산이 있는 노비가 많아졌다는 것을 뜻한다. 또 노비의 상전인 국가나 양반노비 없이도 자기 소유 농토를 경작할 수 있는 지주와 전호(田戶) 관계가 발달하였고, 노비 없이도 수공업품을 마련할 수 있는 수단이 사회적으로 존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17세기 이후 정치적⋅사회적인 이유로 속량된 자가 큰 제한 없이 양인이 되면서 신분제가 흔들리기 시작하여, 점차 약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고문서를 통해 본 조선시대 천첩 자녀의 속량 사례」,『고문서 연구』28,김소은,한국고문서학회,2006.
「조선후기의 사노비 정책」,『성곡논총』18권,전형택,성곡학술문화재단,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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