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조선 후기사회신분제의 동요

공노비의 해방

하교하기를, “선조(先朝)께서 내노비(內奴婢)시노비(寺奴婢)를 일찍이 혁파하고자 하셨으니, 내가 마땅히 이 뜻을 이어받아 지금부터 일체 혁파하려 한다. 그리고 그 급대(給代)는 장용영(壯勇營)으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겠다” 하고, 인하여 문임(文任)으로 하여금 윤음(綸音)을 대신 지어 효유케 하였다. 그리고 승지에게 명하여 내사(內司)와 각 궁방(宮房) 및 각 관사(官司)의 노비안(奴婢案)을 돈화문(敦化門) 밖에서 불태우고 아뢰도록 하였다.

【내수사(內需司) 각 도의 노비와 영흥(永興)⋅함흥(咸興)의 두 본궁(本宮)에 소속된 노비 및 육상궁(毓祥宮)⋅선희궁(宣禧宮)⋅명례궁(明禮宮)⋅수진궁(壽進宮)⋅어의궁(於義宮)⋅용동궁(龍洞宮)⋅영빈방(寧嬪房)에 소속된 각 도의 노비는 도합 3만 6974구(口)였고, 노비안의 책 수는 160권이었다. 종묘서(宗廟署)⋅사직서(社稷署)⋅경모궁(景慕宮)⋅기로소(耆老所)⋅종친부(宗親府)⋅의정부(議政府)⋅의빈부(儀賓府)⋅돈녕부(敦寧府)⋅충훈부(忠勳府)⋅상의원(尙衣院)⋅이조(吏曹)⋅호조(戶曹)⋅예조(禮曹)⋅형조(刑曹)⋅의금부(義禁府)⋅도총부(都摠府)⋅좌순청(左巡廳)⋅우순청(右巡廳)⋅장용영(壯勇營)⋅내시부(內侍府)⋅장례원(掌隷院)⋅사간원(司諫院)⋅성균관(成均館)⋅홍문관(弘文館)⋅예문관(藝文館)⋅종부시(宗簿寺)⋅내섬시(內贍寺)⋅사옹원(司饔院)⋅시강원(侍講院)⋅익위사(翊衛司)⋅사포서(司圃署)⋅중학(中學)⋅동학(東學)⋅남학(南學)⋅서학(西學)에 소속된 각 도의 노비는 도합 2만 9093구였고, 노비안의 책 수는 1209권이었다.】

순조실록』권2, 1년 1월 28일(을사)

乙巳/敎曰 “先朝以內奴婢, 寺奴婢, 嘗欲革罷, 予當繼述, 自今一倂革罷. 其給代, 令壯營擧行” 仍令文任, 代撰綸音曉諭. 仍命承旨, 取內司, 各宮房, 各司奴婢案, 燒火于敦化門外, 以奏.【內需司各道奴婢, 永興, 咸興兩本宮屢奴婢及毓祥宮, 宣禧宮, 明禮宮, 壽進宮, 於義宮, 龍洞宮, 寧嬪房各道奴婢, 合三萬六千九百七十四口, 案冊一百六十卷. 宗廟署, 社稷署, 景慕宮, 耆老所, 宗親府, 議政府, 儀賓府, 敦寧府, 忠勳府, 尙衣院, 吏曹, 戶曹, 禮曹, 刑曹, 義禁府, 都摠府, 左⋅右巡廳, 壯勇營, 內侍府, 掌隷院, 司諫院, 成均館, 弘文館, 藝文館, 宗簙寺, 內贍寺, 司饔院, 侍講院, 翊衛司, 司圃署, 中學, 東學, 南學, 西學各道奴婢合二萬九千九十三口, 案冊一千二百九卷.】

『純祖實錄』卷2, 1年 1月 28日(乙巳)

이 사료는 내시노비(內寺奴婢)의 혁파와 관련한 내용이다. 정순왕후(貞純王后, 1745~1805)는 정조(正祖, 재위 1776~1800) 사후 어린 순조(純祖, 재위 1800~1834)를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면서 내노비시노비의 혁파를 단행하였다. 궁궐에 속한 노비내노비는 총 3만 6974명이었고, 관청에 속한 시노비는 2만 9093명이었으로, 합쳐서 약 6만 6000여 명의 공노비를 혁파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노비는 조선 시대 가장 하층에 속하는 계층이었다. 이들은 소유하는 주체가 국가인가 개인인가에 따라 공노비사노비로 분류되었다. 공노비는 내노(內奴)⋅시노(寺奴)⋅역노(驛奴)⋅교노(校奴)⋅관노(官奴) 등이 있었다. 내노비는 왕실의 재정을 담당하던 내수사와 궁궐의 각 기관에 속한 노비를 말하며, 시노비는 중앙 관청에 소속된 노비를 말하였다. 때에 따라 역이나 향교 등에 속한 노비역노교노 등으로 부르기도 했지만 대체로 공노비내노비시노비를 의미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노비를 확대하는 시책이 주를 이루었으나 그럼에도 노비 수가 감소하자 회유 방법으로 노비 신공(身貢)의 감소 등이 추진되었다.

임진왜란 때 지배층과 양반들의 무능함을 지켜 본 평민노비들은 신분 체계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더욱이 임진왜란으로 부족해진 국가재정을 채우기 위해 납속책을 계속 실시하여 신분제 동요가 가속화하였다. 임진왜란 후에는 이러한 상황이 더욱 심각해졌다. 양인천민 간의 신분상 차이가 사실상 의미가 없어지고 양 신분 간의 혼인도 많이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국가에서는 무엇보다도 재정 확보를 위한 양인 확보가 절실해졌다. 당시 노비들은 주로 도망을 통해 노비 신분에서 벗어났다. 국가에서도 군역 대상자와 재정 부족을 확충하기 위해 노비를 단계적으로 해방시키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731년(영조 7년) 어머니가 비(婢)인 경우에만 자식을 노비로 삼고, 그렇지 않은 경우 양인이 되게 하는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이 시행되었다. 이로 인해 양인이 되는 노비 수가 적지 않았다.

한편 궁궐에 소속된 내노비와 관청에 소속된 시노비 같은 공노비도 도망자가 많이 생겨 국가에서는 이들의 신공(身貢)과 입역(入役)을 줄여 주기도 했지만 별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국가에서는 이 노비들이 제공하는 신공만으로 각 관청을 지탱할 수 없게 되자 노비 제도 자체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차라리 노비양인으로 풀어 줌으로써 경비 부족을 타개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정조 후반기에는 노비들의 부담을 경감시켜 주고 국가재정을 확충하는 방법으로 노비제 폐지안이 등장하였다. 1798년(정조 22년) 보은현 일부 지역에서 먼저 노비들에 대한 해방 조치가 단행되었다. 이것은 노비신공양역으로 바꾸어 주면서 도망 노비들이 역을 부담하게 하는 효과를 가져왔고, 국가재정 확보 측면에서도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하여 1801년(순조 1년) 일부 공노비를 제외한 6만 6000여 명의 내노비시노비를 모두 양인으로 해방시켜 주었다.

조선 후기 신분제가 급격히 해체되는 상황에서 국가는 노비 수가 감소하는 것을 막고, 노비신공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노비종모법노비 추쇄 금지 등의 정책을 시행하였으나 그것은 오히려 노비들이 쉽게 양민이 되는 길을 열어주었다. 결국 국가는 노비들의 신공양역으로 전환함으로써 국가재정을 확충하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1801년 공노비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내노비시노비에 대한 해방이 이루어졌다. 1894년(고종 31년) 나머지 공노비사노비도 해방됨에 따라 우리나라 노비 제도는 1894년 법적으로 폐지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조선초기 공노비의 도망과 대책」,,공석구,충남사학회,1990.
「조선후기 공노비의 신분변동」,『경북사학』12,김상환,경북사학회,1989.
「조선후기 노비신분연구」,,전형택,일조각,1986.
저서
『조선시대 납속제에 관한 연구』, 문수홍,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6.

관련 이미지

노비문서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링크연결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