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조선 후기사회도참 사상의 유행과 새로운 종교의 등장

동학의 발생

예부터 봄과 가을이 갈아들고 사시가 성하고 쇠함이 옮기지도 아니하고 바뀌지도 아니하니 이 또한 한울님 조화의 자취가 천하에 뚜렷한 것이다. 하지만 어리석은 사람들은 비와 이슬의 혜택을 알지 못하고 무위이화(無爲而化)1)로 알더니 오제후(五帝後)부터 성인이 나시어 일월성신(日月星辰)천지도수(天地度數)를 글로 적어 내어 천도의 늘 그러함을 정하고 일동일정(一動一靜)과 일성일패(一盛一敗)2)를 천명(天命)에 부쳤으니, 이는 천명을 공경하고 천리를 따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군자가 되고 배움은 도덕을 이루었으니 도는 천도요 덕은 천덕이라. 그 도를 밝히고 그 덕을 닦음으로 군자가 되어 지극한 성인에까지 이르렀으니 어찌 부러워 감탄하지 않으리오. 또 근래에 오면서 온 세상 사람이 각자위심(各自爲心)하여 천리를 순종치 않고 천명을 돌아보지 않으므로 마음이 항상 두려워 어찌 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경신년(1860)에 와서 전해 듣건대 서양인들은 천주(天主)의 뜻을 행한다 하고 부귀는 취하지 않는다 하면서 천하를 쳐서 빼앗아 그 교당을 세우고 그 도를 행한다 들었다. 그래서 내 또한 그것이 그럴 수 있을까, 어찌 그것이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있었더니, 뜻밖에도 사월에 마음이 선뜩해지고 몸이 떨려서 무슨 병인지 알아 낼 수도 없고 말로 형상하기도 어려울 즈음에 어떤 신선의 말씀이 있어 홀연히 귀에 들리므로 놀라 캐물으니 대답하시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마라. 세상 사람이 나를 상제(上帝)라 이르거늘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시기를 “내 또한 공이 없으므로 너를 세상에 내어 사람에게 이 법을 가르치게 하니 의심하지 말고 의심하지 마라” 묻기를 “그러면 서도(西道)로써 사람을 가르치리이까” 대답하시기를 “그렇지 않다. 나에게 신성한 부적[靈符]이 있으니, 그 이름은 선약(仙藥)이요, 그 형상은 태극(太極)이요, 또 형상은 궁궁(弓弓)이니 나의 부적을 받아 사람을 질병에서 건지고, 나의 주문을 받아 사람을 가르쳐 나를 위하게 하면, 너도 오래 살며 덕을 천하에 펴리라”

나도 또한 그 말씀에 감동하여 그 부적을 받아써서 물에 타 마셔 본즉 몸이 윤택해지고 병이 낫는지라 그야말로 선약인 줄 알았더니, 이것을 병에 써 봄에 이른즉 혹 낫기도 하고 낫지 않기도 하므로 그 까닭을 알 수 없어 그러한 이유를 살펴본즉 정성을 드리고 또 정성을 드리어 지극히 한울님을 위하는 사람은 매번 들어맞고, 도덕을 순종치 않는 사람은 하나도 효험이 없었으니 이것은 받는 사람의 정성과 공경이 아니겠는가.

이러므로 우리나라는 악질이 세상에 가득 차서 백성들이 언제나 편안할 때가 없으니 이 또한 상해(傷害)의 운수요, 서양은 싸우면 이기고 치면 빼앗아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으니, 천하가 다 멸망하면 또한 순망지탄(脣亡之歎)이 없지 않을 것이라.보국안민(輔國安民)의 계책이 장차 어디서 나올 것인가.

애석하도다. 지금 세상 사람은 시운(時運)을 알지 못하여 나의 이 말을 듣고는 들어가선 마음에 그르다 여기고 나와서는 모여 수군거리며 도덕을 순종치 않으니 심히 두려운 일이로다. 어진 사람도 이를 듣고는 그것이 혹 그렇지 않다고 여기니 내 못내 개탄하거니와 세상은 어찌 할 수 없는지라 간략하나마 적어 내어 가르쳐 보이니 공경히 이 글을 받아 삼가 교훈의 말씀으로 삼으라.

『동경대전』, 포덕문

1)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교화한다는 뜻으로, 억지로 꾸밈이 없어야 백성이 진심으로 따르게 된다는 말.
2)나타나는 우주의 모든 현상. 움직임과 고요함, 무성해짐과 쇠잔해짐이라는 대립하는 두 종류의 양태를 들어 항상성 있는 우주 변화의 순환 반복성을 표현한 것.

蓋自上古以來, 春秋迭代, 四時盛衰, 不遷不易. 是亦天主造化之迹, 昭然于天下也. 愚夫愚民, 未知雨露之澤, 知其無爲而化矣, 自五帝之後, 聖人以生, 日月星辰, 天地度數, 成出文卷 而以定天道之常然. 一動一靜. 一盛一敗, 付之於天命. 是敬天命而順天理者也. 故人成君子, 學成道德, 道則天道, 德則天德. 明其道而修其德, 故乃成君子, 至於至聖, 豈不欽歎哉. 又此挽近以來, 一世之人, 各自爲心, 不順天理, 不顧天命, 心常悚然, 莫知所向矣. 至於庚申, 傳聞西洋之人, 以爲天主之意, 不取富貴, 攻取天下, 立其堂行其道. 故吾亦有其然, 豈其然之疑, 不意四月, 心寒身戰, 疾不得執症, 言不得難狀之際, 有何仙語, 忽入耳中, 驚起探問, 則曰勿懼勿恐. 世人謂我上帝, 汝不知上帝耶. 問其所然, 曰余亦無功, 故生汝世間, 敎人此法, 勿疑勿疑. 曰然則, 西道以敎人乎. 曰不然, 吾有靈符, 其名僊藥, 其形太極. 又形弓弓, 受我此符, 濟人疾病, 受我呪文, 敎人爲我, 則汝亦長生, 布德天下矣.

吾亦感其言, 受其符, 書以呑服, 則潤身差病, 方乃知仙藥矣, 到此用病, 則或有差不差, 故莫知其端, 察其所然, 則誠之又誠, 至爲天主者, 每每有中, 不順道德者, 一一無驗, 此非受人之誠敬耶. 是故, 我國惡疾滿世, 民無四時之安. 是亦, 傷害之數也, 西洋戰勝攻取, 無事不成, 而天下盡滅, 亦不無唇亡之歎. 輔國安民, 計將安出. 惜哉. 於今世人, 未知時運, 聞我斯言則, 入則心非, 出則巷議, 不順道德, 甚可畏也. 贒者聞之, 其或不然, 而吾將慨歎, 世則無奈, 忘略記出, 諭以示之, 敬受此書, 欽哉訓辭.

『東經大全』, 布德文

이 사료는 동학(東學)의 창시자 최제우(崔濟愚, 1824~1864)가 지은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東經大全)』에 수록된 「포덕문(布德文)」이다. 『동경대전』은 「포덕문」⋅「논학문(論學文)」⋅「수덕문(修德文)」⋅「불연기연(不然其然)」 등 네 편으로 되어 있다. 경전의 첫째 편인 「포덕문」은 최제우가 1861년(철종 12년) 전라북도 남원 근처 은적암(隱寂庵)에서 수도하면서 지은 것으로, 총 525자의 한문으로 되어 있다. 「포덕문」이란 천도(天道)인 하늘의 조화로 밝은 덕을 널리 온 천하에 베풀어 보국안민(輔國安民)하고 광제창생(廣濟蒼生)하는 경문(經文)이라는 뜻이다.

최제우동학을 창시할 당시는 안팎으로 변화가 휘몰아치는 격변기였다. 안으로는 삼정(三政), 곧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곡(還穀)의 문란으로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 홍수⋅지진⋅역질 등으로 전국에 걸쳐 농민반란의 양상이 나타나던 시기였다. 밖으로는 이양선(異樣船)의 출현과 천주교의 전개로 왕조 질서가 흔들리고 있었다. 이와 같은 내외적인 위기 시대에 그에 대응할 만한 사상으로 일어난 것이 ‘동학’이었다. 동학은 백성들에게 인간 평등과 존중의 길을 제시하였으며, 영⋅호남 지방을 중심으로 급속도로 번지기 시작했다.

동학은 1860년(철종 11년) 4월에 최제우가 창도한 종교로, 교지가 시천주(侍天主) 신앙에 기초하면서도 보국안민과 광제창생을 내세운 점에서 민족적이고 사회적인 종교라 할 수 있다. 동학이 보국안민과 광제창생의 사회적 운동이자 사상⋅종교로 대두된 데는 나라의 시운이 다하였다는 말세관과 사회변동기의 불안이 크게 작용하였다. 양반 사회의 신분 차별과 적서 차별을 반대하던 서민층에서 신분 평등을 주장하는 동학에 공명하는 자가 많았다.

최제우동학의 원리는 결코 우연히 자신의 뛰어난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세상이 어지럽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한 피나는 노력과 정성에서 비롯된 것임을 강조하였다. 즉 세상 사람들이 천리에 순종하지 않고 천명을 돌보지 않아 항상 마음이 두려워 어찌 할 바를 몰랐다는 점, 나쁜 질병이 온 나라에 가득 차서 백성들이 잠시도 편안할 날이 없으며, 어려운 시련이 닥쳐오리라는 지적, 서양 세력의 위협에 대한 보국안민의 계책이 과연 나올 것인가 하는 걱정 등이 기록되면서 찬사문답으로 이어지고 있다.

상제와의 대화에서 상제는 자신이 공이 없음을 자책하고, 구세의 일을 최제우에게 일임하면서 서도(西道)가 아닌 새로운 도의 필요성을 언급하는데, 이로써 동학이 만들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얻은 동학을 세상에 펴려고 하였으나 정성을 다하는 몇몇 사람 이 외에 많은 사람이 순종하지 않아 올바른 이치를 간략하게 적어 교훈으로 삼도록 하겠다는 것이 이 글의 취지이다. 즉 「포덕문」은 동학에 대한 윤곽과 득도 과정을 중심으로 당시의 사회와 동학에 대한 이해를 기술하고 있다.

한편 동학교도들의 교세가 날로 커지자 조정에서는 동학서학(西學)과 같이 민심을 현혹시킨다 하여 나라에서 금하는 종교로 규정하고, 1862년(철종 13년) 9월 교조 최제우를 백성을 현혹시킨다는 이유로 경주 진영에서 체포하여 이후 1864년(고종 1년)사도난정(邪道亂政)의 죄목으로 효수에 처했다. 그러나 한번 일어난 동학의 불길은 수그러들지 않고,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 1827~1898)에 이르러 더욱 그 사상적 기반을 다지면서 조선 말기의 국내외 정세에 영향을 미치는 민족종교로 발돋움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수운 최제우, 동학의 창시자」,『내일을 여는 역사』,오문환,서해문집,2007.
「‘동경대전’ 연구」,『동학연구』3,윤석산,한국동학학회,1998.
「‘동경대전’의 종교철학적인 이해」,『동학학회』2,최동희,동학학회,2000.
「포덕문에 나타난 종교사상」,『신인간』,표영삼,신인간사,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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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우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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