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조선 후기사회민중의 불만과 저항

춘향전 중 이몽룡의 한시

금으로 만든 술동이에 담긴 향기로운 술은 천 사람의 피요,

옥쟁반에 담긴 아름다운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촛대에서 촛농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 떨어지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의 소리 높더라.

『춘향전』

金樽米酒千人血

玉盤佳肴萬姓膏

燭淚落時民淚落

歌聲高處怨聲高

『春香傳』

이 사료는 한국의 대표적인 고전 소설인 『춘향전(春香傳)』의 일부이다. 『춘향전』은 남원 부사의 아들 이몽룡과 퇴기(退妓) 월매(月梅)의 외동딸 춘향의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줄거리를 살펴보면, 두 남녀가 서로 사랑에 빠졌을 때 이 도령의 아버지가 서울로 옮기게 되어 두 사람은 이별의 쓰라림을 맛보게 된다. 이때 새로 부임한 남원 부사 변학도(卞學道)가 수청을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춘향을 옥에 가두고 고초를 받게 하여 사경(死境)에 빠뜨린다. 서울로 간 이몽룡은 과거에 급제하여 암행어사가 되어 다시 남원으로 내려온다.

사료로 제시된 한시는 변학도의 생일 잔칫날 각 읍의 수령이 모인 자리에 거지 차림으로 참석한 이몽룡이 지은 것이다. 이몽룡은 그 자리에서 ‘기름 고(膏)’와 ‘높을 고(高)’를 압운(押韻)으로 하여 거침없이 글을 지어 간다. 이 한시는 탐관오리 변학도의 실정(失政)과 그의 가렴주구로 인한 백성의 고통을 안타까워하는 내용이다. 한시의 내용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몇몇이 그 자리를 뜨려 할 때, 이몽룡은 정식으로 어사출두를 하여 변학도를 파직시키고 춘향을 구해 내어 백년을 해로한다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줄거리는 여러 종의 『춘향전』 사본에서는 대개 같으나 그 세목은 사뭇 다른데, 이는 『춘향전』이 판소리로, 판소리라는 구비문학의 전통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러한 『춘향전』의 내용은 춘향과 몽룡의 계급을 초월한 사랑, 특권계급의 전횡을 대표하는 변학도와 이에 대한 평민들의 저항, 특히 변학도에 항거하여 이 도령에 대한 절개를 지키는 춘향의 모습은 모순을 내포하면서도 상승을 희구하는 조선 후기 민중의 자화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비록 이 도령이 극적으로 내려와 변학도를 응징하는 모습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그것은 바로 민중의 꿈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 후기는 사회 경제적 변화에 따라 신분제가 동요하고 민중 의식이 성장하는 시기였다.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 신분제가 흔들리면서 부농으로 성장한 농민들도 있었지만, 가난한 소작농으로 전락하고 빈농으로 살아가는 농민들도 많아졌다. 이러한 가운데 사회 불안은 더욱 심화되어 각 처에서 도적이 일어나고, 『정감록(鄭鑑錄)』과 같은 예언서가 유행하기도 했다.

또한 17세기부터 여러 차례 자연 재해가 거듭되면서 백성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매우 컸다. 게다가 점점 강력한 권한을 갖게 된 수령 및 지방 관리들의 수탈이 날로 심해지면서 농민들의 삶은 극도로 피폐해져 갔다. 화전민(火田民)과 유랑민의 비중이 늘어 갔고, 농민을 수탈하는 탐관오리에 대한 불만과 분노도 커져 갔다.

당시 농민들이 겪었던 고통과 아픔들이 『춘향전』에도 담겨 있는데, 특히 사료에 제시된 이몽룡이 변학도에게 바친 한시는 당시 백성을 수탈하는 관리들을 적나라하게 비판한 것으로,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만큼 당시 지방관들이 농민들을 가혹하게 수탈하였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지배층의 수탈이 점점 심해지면서 결국 19세기에 들어 지배층에 맞서 농민들의 저항이 시작되었다. 농민들은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가혹한 수탈에 맞서 부세 납부를 거부하거나, 회피 또는 도망 등 다양한 형태로 저항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춘향전』-이몽룡을 통해 본 조선의 양반관료-」,『역사비평』65,권내현,역사문제연구소,2005.
저서
『춘향전』, 신동흔, 한겨레아이들, 2004.
『고전소설 속 역사여행』, 신병주, 돌베개,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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