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조선 후기사회민중의 불만과 저항

양근을 잘라 버린 서러움-애절양

노전 마을 젊은 여인의 통곡 소리 그칠 줄 모르네

현문(縣門)을 향해 울부짖다 하늘 보고 호소하길

싸움터 간 지아비가 못 돌아오는 수는 있어도

예부터 남절양(男絶陽)은 들어 보지 못했구나

시아버지 죽어 이미 상복 입었고, 갓난아인 배냇물도 안 말랐는데

삼대(三代)의 이름이 군적에 모두 다 실렸으니

가서 억울함 호소해도 문지기는 호랑이요

이정(里正)은 호통하며 마구간 소 끌고 갔네

칼을 갈아 방에 드니 자리에는 피가 가득

스스로 탄식하길 자식을 낳은 것이 화로구나

무슨 죄가 있어서 잠실음형(蠶室淫刑) 당했던고

민(閩) 땅 아이[囝]들이 거세한 것1) 그도 역시 슬픈 일인데

자식 낳고 또 낳음은 하늘이 정한 이치거늘

하늘땅 어울려서 아들 되고 딸 되는 것이지

말⋅돼지 거세함도 그 또한 서럽거늘

하물며 뒤를 잇는 사람에게 있어서랴

부호들은 한평생 풍류나 즐기면서

낟알 한 톨 비단 한 치 바치는 일 없는데

똑같은 백성 두고 왜 이다지 차별일까

객창에서 거듭거듭 시구편(鳲鳩篇)을 외워 보네

여유당전서』제1집 제4권 시집, 시, 애절양

1)청대 역사가인 조익(趙翼,1727~1812)의 『이십이사차기(二十二史箚記)』에 따르면 당나라 때는 여러 지역에서 어린 환관을 바쳤는데, 그중 지금의 복건(福建)인 민(閩)과 광동(廣東)에 해당하는 광(廣) 출신이 많았다고 한다. 이는 아이들을 팔아 가계를 꾸려야 할 정도로 곤궁한 당시 백성들의 처지에서 비롯된 풍속으로 보인다. 『전당시(全唐詩)에 수록된 고황(顧況, 727?~815?)의 시 작품인 「상고지십보망훈전(上古之什補亡訓傳)」(전13장) 중 10장「건(囝)」의 주석에서는 민(閩)의 속어로 아이는 건(囝), 아버지는 낭파(郞罷)라고 한다고 되어 있다. 시에서 민 땅의 아이들은 관리에게 팔려 생식기를 잘리고 장획(臧獲)이 되었다고 나오는데, 장(臧)은 죄지은 관리의 벼슬을 빼앗고 노비를 만드는 형벌이며, 획은 도망가다 잡혀서 노비가 되는 벌이었다.

  蘆田少婦哭聲長 / 哭向縣門號穹蒼

  夫征不復尙可有 / 自古未聞男絶陽

  舅喪已縞兒未澡 / 三代名簽在軍保

  薄言往愬虎守閽 / 里正咆哮牛去皁

  磨刀入房血滿席 / 自恨生兒遭窘厄

  蠶室淫刑豈有辜 / 閩囝去勢良亦慽

  生生之理天所予 / 乾道成男坤道女

  騸馬豶豕猶云悲 / 況乃生民恩繼序

  豪家終歲奏管弦 / 粒米寸帛無所捐

  均吾赤子何厚薄 / 客窓重誦鳲鳩篇

『與猶堂全書』第1集 第4卷 詩集, 詩, 哀絶陽

이 사료는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지은 7언 20구의 한시로 당시 사회의 수취 체제 모순과 지배층의 횡포를 극명하게 고발하는 내용이다. 1~4구에서는 자신의 양근(陽根)을 자른 전대미문의 가슴 아픈 사건과 그것을 목격한 아낙이 처절하게 목 놓아 우는 모습을 그렸다. 5~10구에서는 이러한 배경을 적고 있다. 죽은 시아버지를 대상으로 군포를 징수하는 백골징포(白骨徵布), 또한 갓 낳은 자식을 관청에서 16세로 올려 군적에 기록하여 갓난아이가 군포를 내야 하는 황구첨정(黃口添丁)의 횡포를 고발하고 있다. 11~16구에서는 양근을 자른 일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를 다시 객관화하여 따져 묻고 있다. 소나 돼지가 그런 일을 당해도 측은한데 하물며 사람이 그런 일을 스스로 행할 수밖에 없는 슬픔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고 표현하고 있다. 17~20구에서는 백성들이 세금을 견디다 못해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현실에 처해 있는데도 당시 지배층인 양반 부호들은 오히려 1년이 가도록 풍류나 즐기면서 세금은 한 톨도 내지 않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고발하고 있다.

다산은 「애절양(哀絶陽)」 외에도 극적인 상황을 포착하여 당시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고발하고 부패한 지배층의 탐학무도한 정치로 인해 질고를 당하던 피지배층의 애닮픔을 고발한 현실 참여적인 시를 여러 편 남겼다. 이는 쓸데없는 전쟁을 일으켜 백성을 사지로 몰아 간 당나라 지배층을 비판하고 군역을 면하기 위해 자신의 팔을 스스로 잘라 버린 비극적 상황을 묘사한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 772~846)의 「절비옹(折臂翁)」 혹은 관리들이 매화나무에도 세금을 부과하는 횡포에 저항하여 매화나무를 쪼개 버리는 모습을 목격하고 그 참담한 정경을 노래한 조선 중기 시인 어무적(魚無迹, ?~?)의 「작매부(斫梅賦)」의 시정신과 맞닿아 있다.

조선 후기 사회는 신분제의 동요와 붕괴로 인해 양반 신분이 증가하고 양인 신분이 감소하는 현상을 보였다. 양반군포를 부담하지 않고 군적에 올라 있는 양인 농민만이 병역을 대신해 군포를 부담했기 때문에 양반 신분은 증가하고 양인 신분은 감소하여 남은 양인 농민들의 군포 부담이 배가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징수해야 할 군포액이 미리 결정되어 각 군현에 할당되었다. 이 때문에 지방관들은 할당된 목표액은 물론 여기에 개인적인 축재까지 더해 농민에게 과도하게 징세를 강요하였다. 종래부터 있던 백골징포⋅황구첨정⋅족징(族徵)⋅인징(隣徵)⋅강년채(降年債)⋅마감채(磨勘債)⋅군정수(軍政修)⋅신입례(新入禮) 등 군정의 문란은 극에 달하였다. 이와 같이 군포 제도는 양반 관리의 부정과 불합리한 각종 제도와 사회 경제적 부조리로 인해 문란을 초래하고 있었다.

백골징포와 황구첨정을 견디지 못한 농민들은 도망하거나 화전민이 되었는데, 수령들은 도망한 농민들의 결손을 보충하기 위해 이웃이나 친척에게 군포의 책임을 지우는 인징⋅족징으로 농민들을 괴롭혔다. 또한 강년채라 하여 60세 이상 역이 면제된 자에 대해서도 연령을 낮추어 군포를 징수하고 마감채라 하여 병역 의무자에게 면역시켜 준다는 구실로 잔여분을 일시불로 받아들이는 면역 군포를 징수하였다. 결국 군정 문란은 국가재정의 파탄을 초래하였을 뿐 아니라 전정(田政)⋅환곡(還穀)과 함께 삼정이 모두 문란해져 민란 발생의 원인이 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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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시의 사실성; 「시랑」⋅「애절양」을 중심으로」,『벽사이우성선생정년퇴직기념 국어국문학논총』,윤경수,논총간행위원회,1990.
「조선왕조말기 군정문란의 사회경제적고찰」,『이산조기준박사화갑기념논문집』,정덕기,기념사업준비위원회,1977.
「숙종조 양역변통론의 전개와 양역대책」,『국사관논총』7,정만조,국사편찬위원회,1990.
「17⋅18세기 양역균일화 정책의 추이」,『한국사론』13,정연식,서울대학교 국사학과,1985.
「임란이후의 양역과 균역법의 성립」,『사학연구』10⋅11,차문섭,한국사학회,1961.
저서
『조선 후기 ‘역총’의 운영과 양역 변통』, 정연식,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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