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조선 후기사회민중의 불만과 저항

홍경래 난의 농민 격문

평서대원수(平西大元帥)1)는 급히 격문을 띄우노니 우리 관서(關西)의 부로자제(父老子弟)와 공사천민(公私賤民)은 모두 이 격문을 들으시라. 무릇 관서는 기자(箕子)의 옛 터요, 단군 시조의 옛 근거지로 훌륭한 인물이 넘치고 문물이 번창한 곳이다. ……(중략)…… 그러나 조정에서는 서토를 버림이 썩은 흙[糞土]이나 다름없다. 심지어 권세 있는 집의 노비들도 서로의 인사를 보면 반드시 평안도놈[平漢]이라 일컫는다. 서토에 있는 자가 어찌 억울하고 원통치 않은 자 있겠는가. ……(중략)…… 지금 나이 어린 임금이 위에 있어서 권세 있는 간신배가 날로 치성하여 김조순(金祖淳)⋅박종경(朴宗慶)의 무리가 국가의 권력을 제멋대로 하니 어진 하늘이 재앙을 내린다. ……(중략)…… 이제 격문을 띄워 먼저 열부군후(列府君侯)에게 알리노니 절대로 동요치 말고 성문을 활짝 열어 우리 군대를 맞으라. 만약 어리석게도 항거하는 자가 있으면 기마병의 발굽으로 밟아 무찔러 남기지 않으리니 마땅히 명령을 따라서 거행함이 좋으리라.

『패림』권10, 순조기사, 신미 12월 21일

1)홍경래는 1811년(순조 11년) 민심이 흉흉한 틈을 타 병력 2000여 명을 동원하여 각급 지휘관을 임명하고 스스로 평서대원수(平西大元帥)라 칭한 후 난을 일으켰다.

平西大元帥, 爲急, 急馳檄事. 我關西, 父老子弟, 公私賤, 或聽此檄. 盖關西, 箕聖故城, 檀君蒼窟, 衣冠及濟, 文物炳烺. ……(中略)…… 朝廷之等棄西土, 不異於棄土. 甚至於, 權門奴婢, 見西人則, 必曰, 平漢其爲西人者, 豈不冤抑哉. ……(중략)…… 見今冲王在上, 權奸日熾. 如金祖淳, 朴宗慶輩, 專弄國,, 柄仁 天降災. ……(中略)…… 玆以檄文, 先諭列府君侯, 切勿撓動, 洞開城門, 以迎我師. 若有蠢爾抗拒者, 當以鐵騎, 五天, 蹙之無遺矣. 須速請命擧行宜當者.

『稗林』卷10, 純祖記事, 辛未 12月 21日

이 사료는 1811년(순조 11년) 홍경래(洪景來, 1771~1812)가 난을 일으킬 때 작성했던 격문으로 편자 미상의 야사(野史) 총서인 『패림(稗林)』에 수록되어 있다. 『패림』은 『대동패림』이라고도 하는데, 야사가 96종이나 수록되어 있는 방대한 서적으로 귀중한 자료이다.

당시 평안도 지역에 대한 정치⋅사회적 모순에 불만을 품은 홍경래는 치밀하게 봉기를 준비하였다. 전국적으로 대흉년이 들었던 1811년, 홍경래는 2000여 명이라는 숫자로 평안도 가산군 다복동에서 봉기하였다. 홍경래는 대외적으로 격문을 띄워 봉기의 명분을 천명하였다. 격문에는 관서, 곧 평안도 지역에 대한 부당한 차별 정책에 대해 불만이 표출되어 있으며, 또한 당시 부패한 세도 정치를 강력하게 비판하는 내용이 드러나 있다.

조선 후기 정부의 대청 무역 규제에도 평안도 지방의 개성상인의주상인 가운데는 대상인으로 성장한 사람이 많았다. 또한 18세기 전후로 견직물업⋅유기 등 수공업 생산과 담배 등 상품 작물 재배, 금⋅은의 수요 급증으로 광산 개발이 활발하였다. 이에 양반 지주⋅상인층에 의한 고리대업의 성행으로 소농민의 몰락도 심화되었다. 반면 신흥 상공업 세력, 부를 축적한 일부 농민들은 향촌 사회의 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해 돈으로 향임직(鄕任職)을 사거나 무사직에 진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서북인, 곧 황해도⋅평안도(서도, 서북면)와 함경도(북관, 동북면) 지역의 사람들은 정부의 서북 차별 정책으로 중앙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가 매우 제한되었다.

또 다른 기록에는, 홍경래사마시(司馬試)에 실패한 뒤 급제한 자를 보니 모두 귀족의 자제들이었다고 한다. 당시 과거 제도도 크게 부패하여 권문세가의 자제는 무학둔재(無學鈍才)라도 급제 영예를 차지하고 그렇지 못한 자는 쉽게 성공할 수 없으며, 특히 평안도 사람들을 제외한 데 대해 분노하며 봉기의 뜻을 굳게 하였다고 하였다.

순조 연간에 세도 정권은 서울 특권 상인의 이권을 보호하기 위해 평안도민의 상공업 활동을 잠상(潛商)잠채(潛採)란 이유로 억압하였다. 또한 이전부터 평안도는 변방이라는 특성을 고려하여 사신 접대비나 군사비에 충당토록 조세 곡식을 본도에 남겨 두는 것이 상례였는데, 이 시기에 들어오면서 부족한 중앙 정부의 재정을 보충하기 위하여 환곡 이자를 상납토록 하였다. 이에 평안도의 상공업계는 위축되고, 지방 재정 파탄의 요인이 되었으며, 그 폐해는 평안도의 신흥 상공업자와 일반 민인들에게 고스란히 전가되었다. 결국 이들은 홍경래의 주도 아래 난을 일으키는 데 참여하였다.

홍경래가 이끄는 군은 열흘 만에 평안도 청천강 이북을 석권하였으나 이후 관군에 밀려 정주성에서 끝까지 저항하다 결국 진압되었다. 홍경래의 난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조선 사회에 큰 변화를 초래하였다. 이 난을 기점으로 일반 농민층은 봉건 권력에 저항할 수 있는 자신의 힘을 의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농민들은 홍경래가 죽지 않았다고 소문을 퍼뜨리면서 언젠가 올 중앙 정부 타도와 사회 변혁의 기회를 엿보았다. 이러한 하층 농민들의 각성과 성장은 1862년(철종 13년)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전국 규모의 민란이 일어나는 원동력이 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홍경래의 난’ 연구의 쟁점」,『한국인물사연구』11,권내현,한국인물사연구소,2009.
「조선후기 농민봉기의 정치의의」,『대동문화연구총서」Ⅱ(한국인의 생활의식과 민중예술』,정창열,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1984.
「1811년 황해도 곡산지방의 농민항쟁」,『역사와현실』5,한상권,한국역사연구회,1991.
편저
『민란의 시대』, 고성훈, 가람기획,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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