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조선 후기사회민중의 불만과 저항

삼정의 폐단을 구제하는 대책-강위의 시무책 「의삼정구폐책(擬三政捄弊策)」

전정(田政)

……(중략)…… 전제의 어려움은 신성(神聖) 시대의 중엽에도 오히려 국경이 문란하고 세금이 불균등한 것에 대해 고통스러워하여 수차례 그것을 개정하였다. 현재의 폐단은 이에 그치지 않고 있다.진세(陳稅)허복(虛卜)⋅백징(白徵)1)의 폐단은 또한 논할 겨를도 없으며, 그 외에 은결(隱結)여결(餘結)도결(都結)2)가결(加結)궁결(宮結)둔결(屯結) 등의 허다한 명목은 이미 백성과 나라가 지탱하기 힘든 폐단이다. 이에 관흠(官欠)을 거듭 징수하는 것, 이포(吏逋)를 대신 나르는 것, 저채(邸債)3)를 거두어들이는 것, 민고(民庫)에서 항시 쓰는 잡다한 비용, 관청의 사객(使客)들에 대하여 수시로 쓰이는 접대비는 큰 것 작은 것 할 것 없이 모두 결(結)에 부과되었다. 1결에서 내는 것이 많으면 혹 30냥에서 40냥에 이르고 있다. ……(중략)…… 특히 거성(巨姓)⋅대족(大族)⋅향리(鄕里)의 부호(富豪)가 백성을 어지럽힐 따름이다. 그러나 지금 이 시기는 거성⋅대족⋅호민(豪民)들의 세력으로는 소민(小民)들의 무리들을 이길 수 없다. 또 지금 소민은 궁핍하고 괴로운 것을 이기지 못하여 그 독함을 부리고 있으며, 많은 호민이나 거족이 이들을 대적하지 못하고 있다. 이 기회를 타야 할 것이다. ……(하략)……

『고환당수초』권4, 의삼정구폐책, 임술

1)세금을 물 만한 까닭이나 관계없는 사람에게 억지로 세금을 물려받던 일.
2)토지에 모든 종류의 세금을 부과하여 징수하는 방식. 지방 관아 차원에서 징수가 이루어졌으므로, 이 과정에서 고을 아전이 공전(公錢)이나 군포를 축내고 그것을 매워 넣으려고 결세(結稅)를 정액 이상으로 받는 등 부정이 발생하여 문제가 되었다.
3)경저리(京邸吏)나 영저리(營邸吏)가 백성들의 공납방납(防納)함으로써 백성이 이들에게 진 빚.

田政

……(中略)…… 田制之難, 在中葉神聖之世, 猶苦其彊界漸紊, 賦斂不均, 而屢改之矣. 到今之弊, 乃不止此. 陳稅虛卜白徵之弊, 且未暇論, 其外隱結,餘結,都結,加結,宮結,屯結許多名目, 已爲民國難支之弊矣. 乃有官欠之再徵也, 吏逋之代輸也, 邸債之布斂也, 民庫常用閒雜之費也, 營員使客不時之需也, 無大無小, 皆敷於結. 一結之出, 多或至三四十兩. ……(中略)…… 特巨姓大族及鄕里豪猾之民耳. 然今之時, 巨姓大族豪民之勢, 不足以勝小民之衆. 又今小民不勝窮苦, 一肆其毒, 而衆豪巨族不能敵. 此其機可乘也. ……(下略)……

『古歡堂收草』卷4, 擬三政捄弊策, 壬戌

이 사료는 조선 말기의 문인 강위(姜瑋, 1820~1884)의 문집인 『고환당수초(古歡堂收草)』에 실려있는 「의삼정구폐책(擬三政捄弊策)」이다. 「의삼정구폐책」은 당시 어지러운 삼정(三政), 곧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곡(還穀)의 세 가지 행정에 관한 시정책으로 무려 2만 9000여 자나 되는 논책(論策)인데, 이는 중국에서도 간행될 정도로 유명한 명론(名論)이다.

임술년인 1862년(철종 13년) 당시 삼정의 문란으로 전국적인 농민 항쟁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전국의 선비들에게 그 대책을 물었다. 강위는 1862년 삼남 지방의 민란을 몸소 겪으면서 현실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때마침 친구인 정건조(鄭健朝)의 요청으로 2만 9000여 자에 이르는 시무책인 「의삼정구폐책」을 작성했으나, 지나치게 혁신적인 내용으로 정건조가 조정에 제출하기를 꺼려하자 불태워 버리기도 하였다.

사료의 배경이 되는 시기에는 자연 재해가 잇달아 일어나 기근과 질병이 만연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이러한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여전히 총액제(總額制)로 세금을 거두고 있어서 농촌 사회의 불만이 극에 달하였다. 총액제란 구체적으로 세원을 파악하지 않고 국가 재정의 총액을 미리 정해 놓고 도별 총액을 할당하여 군현 단위로 정해진 총액을 부담하는 제도를 말한다.

전세는 원래 1결당 20두, 곧 전세 4두, 대동미 12두, 결작 2두, 삼수미 1.2두 정도였으나, 전세 이외도 여러 종류의 부가적인 세금이 토지에 매겨졌다. 그 결과 인정미(人情米)선가미(船價米)낙정미(落庭米) 등의 명목으로 1결당 100두 정도를 거두어 갔다. 또한 전세의 수납 과정에서 토호와 관속들이 주체가 되어 작부 과정에서 부민의 민결을 모아 자기의 호명(戶名)에 옮겨 기록하고 여러 무리의 호수직을 대행하여 돈이나 곡식을 거두어 관아에 세를 내고 남는 것을 차지하였다. 이들은 사람들을 강제로 자기의 양호로 만들어 세를 징수하기도 하였다.

군포(軍布) 역시 장정마다 1필에 지나지 않았지만, 총액을 채우기 위해 젖먹이와 어린아이, 죽은 사람, 노인에게까지도 군포를 받아 내거나, 도망친 이웃과 친척의 군포를 대신 납부하도록 요구하는 일이 빈번하였다. 환곡을 운영하는 과정에서도 각종 폐단이 끊이지 않았다. 본래 환곡은 구휼의 목적으로 설치되었으나, 환곡의 이자가 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면서 이자는 갈 수록 고리로 바뀌었다. 또 환곡이 필요 없는 농민에게도 이자 수취를 위하여 필요 이상의 곡식을 강제로 빌리게끔 하거나, 반작(反作)이라 하여 출납을 허위 보고 하여 잉여분을 차지하는 등 운영 과정에서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하였다.

삼정의 문란을 견디지 못한 농민들이 봉기하자 조정에서는 제도를 개혁함으로써 농민 항쟁을 수습하고자 하였다. 반면 강위는 조정에서 고려하는 삼정의 개혁 방안은 농민 항쟁을 수습할 수 없으며, 보다 근본적인 토지 개혁론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의 토지 개혁론은 사료로 실린 「의삼정구폐책」에서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토지의 사적 소유권은 그대로 두되, 현재의 지주제를 조정⋅개혁하여 지대의 수취율을 낮추어 지주층의 농민 수탈을 경감시킴으로써 농민 경제를 안정시키는 방안을 내놓았다. 또한 농민 항쟁을 농민층 분화와 그 몰락 과정에서 발생하였다고 생각하였다. 특히 지주와 전호 간의 대립, 나아가 계급 대립적인 측면에서 농민 항쟁을 이해하여, 삼정이정책(三政釐正策)을 수습책으로 삼으려면 농민층 입장에서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지금 이 시기는 거성(巨姓)⋅대족(大族)⋅호민(豪民)들의 세력으로는 소민(小民)들의 무리들을 이길 수 없다. 또한 지금 소민은 궁핍하고 괴로운 것을 이기지 못하여 그 독함을 부리고 있으며 많은 호민이나 거족이 이들을 대적하지 못하고 있다. 이 기회를 타야 할 것이다”라고 하여 개혁의 시기란 바로 농민 항쟁이 일어난 현재이며, 더 늦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그는 국왕이 이러한 기회를 놓치지 말고 삼정을 개혁하는 호기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지엽적인 문제를 부분적으로 개선하는 것은 국가재정이나 농민 경제 안정에 별로 효과가 없다고 하였다.

그가 제시한 구체적인 방법은 군정을 주축으로 하면서 병농 일치의 원칙 하에서 귀천을 불문하고 누구나 균일하게 그 세를 부담하는 새로운 호(戶)⋅구(口)⋅전(田)의 세제를 마련하고 지주제를 개혁하는 것이었다. “국가를 다스리는 것은 세 가지가 있는데, 실은 단지 병정(兵政)만이 있을 따름이다[國家之政 其目有三 然實則只一兵政而已]”라고 하는 그의 언급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임술민란기 부세문제 인식과 삼정개혁의 방향」, 『한국사학보』49, 송양섭, 고려사학회, 2012.
저서
『강위의 개화사상 연구』, 이헌주, 도서출판 선인, 2018.

관련 사이트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링크연결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