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조선 후기사회민중의 불만과 저항

삼정이정절목

희정당에서 차대(次對)하였다. 좌의정 조두순(趙斗淳, 1796~1870)이 아뢰기를, “군정(軍政)은 이미 품처(稟處)를 거쳐 행회(行會)하였는데, 구파(口疤)⋅동포(洞布) 사이에 각기 편의를 따라서 할 것이 요구됩니다. 전정(田政)은 오로지 다시 양전(量田)하는 길뿐인데, 이는 일시에 한꺼번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환자(還上)에 관한 한 가지 일을 지금 바로잡아야 할 정사인데, 환상이라는 이름을 폐지시킨 후에야 비로소 나라를 보존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식(耗殖)을 중외(中外)의 경용(經用)으로 삼아 왔으므로 반드시 그 급대(給代)를 요구하게 되는데, 이는 전결(田結)에 분배시키는 방법뿐입니다. 따라서 정당한 부세(賦稅) 이외에는 전결(田結)에 첨부하는 것을 엄중히 끊어 버리고, 단지 급대(給代)할 수효만 간략히 마련하게 해야 합니다. 삼가 물러가서 책자(冊子)를 갖추어 우러러 을람(乙覽)에 대비하게 한 뒤 절목(節目)을 만들어 내어 중외(中外)에 반시(頒示)하겠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이정청(釐整廳)을 설치한 지 상당히 오래되었는데, 백성을 위한 일념(一念)이 더욱 간절하여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경이 아뢰는 말을 듣건대, 아직 절목(節目)이 어떤지 모르겠다. 그러나 충분히 강구하여 기어이 실효가 있게 하라” 하였다.

철종실록』권14, 13년 8월 27일(정축)

次對于熙政堂. 左議政趙斗淳啓言 軍政旣已經稟行會, 口疤洞布之間, 要之各隨便宜. 田政惟改量而已, 而此非一時幷擧之事. 而惟還上一事, 在今拯捄之政, 罷此還上之名, 然後始可以保邦安民. 而第耗殖之爲中外經用者, 必責其給代, 惟結排而已. 正賦之外, 添付於結者, 痛行割斷, 只令此給代之數, 略綽磨鍊. 謹當退具冊子, 仰備乙覽後, 成出節目, 頒示中外矣.敎曰 設廳稍久, 爲民一念, 尤切憧憧矣. 卽聞卿奏, 姑未知節目之何如. 而十分講究, 期有實效.

『哲宗實錄』卷14, 13年 8月 27日(丁丑)

이 사료는 1862년(철종 13년) 삼남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농민 봉기에 대한 수습 방안을 강구하고자 설치되었던 이정청(釐整廳)을 중심으로 한 삼정(三政), 곧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곡(還穀)의 개혁 방안에 대한 논의 과정이다. 이에 앞서 1862년 5월 25일 이정청 설치를 명하는 전교가 내려졌고, 이후 윤8월 19일 「삼정이정절목(三政釐整節目)」이 만들어졌다.

철종(哲宗, 재위 1849~1863) 연간은 지배층에 의한 농민 수탈이 절정을 이룬 시기였다. 농민 수탈의 주 내용은 삼정의 문란으로 요약된다. 세도 정치기에는 자연재해가 잇달아 기근과 질병이 만연하고 인구가 급속히 줄어들었다. 그러나 정부는 이러한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여전히 총액제(總額制)에 의해 각종 세금을 징수하였으므로, 농촌 사회의 불만은 극에 달하였다.

전세는 비총제, 군포는 군총제, 환곡환총제를 실시하여 각 면⋅리 단위로 세금의 총액을 미리 정해 놓았기 때문에 수령과 향리 그리고 향임(鄕任)들은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그 액수를 채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에 전세는 1결당 100두 정도를 거두어 갔고, 군포는 황구첨정(黃口簽丁)⋅백골징포(白骨徵布)⋅인징(隣徵) 등으로 농민들에게 가중 부과되었다. 한편 환곡은 농민의 구휼이라는 본래 목적을 상실하고 이자 수입을 통해 정부의 재정을 보충하는 부세의 수단이 되었는데, 날이 갈 수록 이자로 납부하는 그 결가(結價)가 높아져 농민의 삶을 고통스럽게 했다.

19세기 중엽 철종 대에 이르러 부세 제도의 모순에 불만을 품은 민중의 항거가 발생하여 점차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그 중에서도 충청⋅전라⋅경상의 삼남 지방이 가장 치열하였다. 1862년 2월 경상도 단성에서 시작된 민중 봉기는 이웃 진주로 이어졌고 경상도 20개 군현, 전라도 37개 군현, 충청도 12개 군현, 그리고 부분적으로 경기도⋅함경도⋅황해도 등지에서도 일어났다. 이 해에 일어난 민란을 통칭해 임술민란(壬戌民亂)이라 한다.

이에 조정에서는 긴급 대책으로 안핵사와 선무사를 파견하여 난을 수습하고 민심을 가라앉히도록 하는 한편, 봉기 지역 수령은 그 책임을 물어 파직시켰다. 또 진주에 파견된 안핵사 박규수(朴珪壽, 1807~1877)상소로 시정책이 건의되었다. 그 결과 민란의 근본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조정 대신들로 구성된 ‘삼정이정청’을 설치하고 그해 5월부터 윤8월까지 4개월 동안 「삼정이정절목」 41개 조를 제정하여 반포⋅시행하였다. 골자는 전정⋅군정은 민의에 따라 현황을 시정하고 환곡파환귀결(罷還歸結)에 따르기로 한다는 것이었다. 교구책으로 민란은 한때 진정되는 듯했으나, 5월과 6월의 가뭄과 7월의 심한 물난리 때문에 민심은 계속 흉흉하였다.

그 뒤 삼정이정청 업무가 비변사로 넘어간 10월에 새 정책을 폐지시키고 기존의 삼정 제도로 돌아감으로써 농민군이 바라던 근본적인 제도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 창원⋅황주⋅청안⋅남해 등지에서 항쟁이 끊임없이 이어진 것도 이 때문이다. 그리하여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 집권기에도 광양민란(光陽民亂, 1869), 이필제(李弼濟, 1824~1871)의 난(1871) 등 민란이 지속되었다. 또 횃불을 들고 수십 명이 대오를 지어 조직적으로 약탈을 자행하는 도적인 명화적(明火賊)이 출현하였다. 이들은 본래 조선 전기에도 있었지만 19세기 들어 전국에 걸쳐 집중 발생하였으며 관아, 지주, 여각과 객주 등 물화가 드나드는 곳을 주로 공격하였다. 이러한 각종 민란과 도적의 발생은 19세기 조선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해소되지 않고 있는 데서 기인한 것으로, 1894년(고종 31년)의 동학혁명 또한 그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철종조 민란발생과 그 지향」,『동박학지』94,김용섭,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1996.
「삼정이정절목에 관한 검토」,,장영환,건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1981.
저서
『한국근대농업사연구-신정증보판-』1, 김용섭, 지식산업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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