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조선 후기문화성리학의 교조화와 그에 대한 비판

호락논쟁

‘이통기국(理通氣局)’ 네 글자는 율곡 선생께서 이(理)와 기(氣)의 큰 근원을 통찰하신 것으로 이기론에 대한 탁월한 길잡이이다. 선생의 주장은 우계(牛溪) 선생과 주고받은 편지에 갖추어져 있는데, “이와 기는 원래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문장이 바로 그 핵심이다.

원래 서로 떨어져 있지 않으면서 형체⋅본말⋅선후가 없는 것이 이의 ‘통’이고, 형체⋅본말⋅선후가 있는 것이 기의 ‘국(局)’이다. 이것이 바로 이통기국의 핵심에 대해 8글자로 명명백백하게 밝힌 것이다. 율곡 선생의 뜻은 천지 만물은 기국(氣局)이고 천지 만물의 이는 이통(理通)이지만, 이른바 ‘이통’이라는 것은 기국과 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니 기국에 나아가 기국과 섞이지 않는 그 본체를 가리켜 말하는 것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지금 수암(遂菴) 선생의 「천명도(天命圖)」는 곧 이통을 따로 뽑아 위쪽에, 그리고 기국을 아래쪽에 따로 그려서 두 개의 동그라미로 잘라서 그렸으니, 상하가 분명히 나뉘어 이통은 기국의 앞에 있고 기국은 이통 밖에 있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하나의 이, 하나의 기 사이가 너무 심하게 떨어지니, 율곡 선생의 설이 어찌 이렇겠는가?

심지어 ‘태극(太極)’과 ‘천명(天命)’을 사람과 만물이 아직 태어나기 전의 천(天)의 이(理)라 하여 이통의 권역에 두고 그것을 곧 명(命)이요 근원[源]이라 하고, ‘오상(五常)’과 ‘물성(物性)’을 인물이 이미 태어난 후의 사물의 이(理)라 하여 기국의 동그라미를 메우고 그것을 곧 성(性)이요 유행[流]이라 하니, 이 무슨 말인가?

태극과 오상은 단지 이(理)이다. 천하의 사물 중에 이보다 더할 것이 없으므로 ‘극(極)’이라 한 것이고, ‘태(太)’는 그것을 높이는 말이다. 천하의 변화무쌍한 현상 속에서도 그 이를 변하게 할 수 없으므로 그것을 ‘상(常)’이라 한 것이고, ‘오(五)’는 그 숫자를 일컫는 것이다. 천에서는 태극은 되지만 오상은 될 수 없으며 물에서는 오상은 되지만 태극은 될 수 없는 이치가 천하에 어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또한 아직 태어나기 전이면 태극은 되지만 오상이라고는 할 수 없으며 이미 태어나면 오상은 되지만 태극이라고는 할 수 없는 이치가 어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하물며 ‘이통기국’이 아직 태어나기 전과 이미 태어난 후, 근원[源]과 유행[流]으로 나누어 이름 붙인 것이겠는가? 천이 없으면 성이 나올 수 없고 물이 없으면 명이 부여될 곳이 없으니, 성이란 것은 물에만 있고 천에는 없으며, 명이란 것은 천에만 있고 물에는 없는 것인가? 비록 일물(一物)에 근본하더라도 천에 있는 것은 명이라 하고 성이라 할 수 없고 물에 있는 것은 성이라 하고 명이라 할 수 없다면 반드시 천과 물이 둘 다 존재한 후에라야 비로소 성과 명이 갖추어질 것이다.

그러나 선후의 시간은 병립할 수 없으니, 비록 천하에서 뛰어나게 지혜로운 자라 하더라도 태어나기 전의 명과 태어난 후의 성을 어찌 일시에 병존시킬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이른바 ‘성’과 ‘명’은 전⋅후로 나뉘는 것이 될 수밖에 없고 ‘이통’과 ‘기국’이란 것 또한 마땅히 고(古)와 금(今)의 일로 나뉘게 될 것이다. 정말 그러한가? 만약 “사람과 만물이 성을 받은 후 따로 태어나기 전의 명이 있어 사람과 만물의 심에 모두 나란히 병립한다. ”고 한다면 일성(一性)과 일명(一命)이 겹치는 것을 면치 못할 것이다. 만약 “사람과 만물이 성을 받은 것 이 외에 따로 태어나기 전의 명이 있어 하늘에서 주장하고 추동한다. ”고 한다면 바로 또한 하늘과 땅이 곧 황홀하고 괴이한 것이 되어 버린다. 이 몇 가지 설 이외의 것들이 곧 나의 설이다. 그렇다면 만물이 태어난 것은 유행이 되고 태어나게 한 것은 근원이 되며 천지는 태어나게 하는 것이고 만물은 태어난 것이니, 태극과 천명은 근원이 되고 오상과 물성은 유행이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천지는 진실로 만물의 아버지지만, 천명도 과연 오상의 아버지인가? 만물은 진실로 천지의 아들이지만 오상도 정말 태극의 아들인가? 아버지의 경우에는 ‘통’이라 하고 아들의 경우에는 ‘국’이라 한다면 어디에 그 무형함이 있겠는가? 아버지가 있고 아들이 있고 근원이 있고 유행이 있는데 어디에 그 본말이 없고 선후가 없는 것이 있겠는가? 게다가 천지가 진실로 만물을 낳고 원기가 또한 천지를 낳는데, 이렇게 되면 원기가 이통(理通)이 되고 천명이 도리어 기국(氣局)이 되는 것인가? 만물이 진실로 천지에서 생겨나고 만물은 또한 만물을 낳을 수 있는데, 이렇게 되면 앞의 만물은 태극이 되고 뒤의 만물은 오상이 되는 것인가? 천지의 앞에 여러 천지가 있고 만물의 뒤에야 비로소 만물이 생겨나는데, 그렇다면 태극과 오상은 본래 정리(定理)가 없고 이통기국(理通氣局)은 특정하게 가리키는 것이 없게 되니, 이것들이 낳고 낳아진 바의 사이에 선전하는 ‘허위(虛位)’에 불과한 것이란 말인가?”

어떤 이가 말했다. “기로 말하면 천 또한 기이니, 그 천이 기국에서 떨어져 홀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로 말하면 원래 기와 떨어지지 않는 것이니 그 이가 허공에 걸려서 고립될 수 없는 것 또한 명백하다. 그렇다면 수암 선생의 뜻은 또한 이 기국에 나아가 겸지한 것을 오상이라 하여 아래에 그리고, 단지한 것을 태극이라 하여 위에 그린 것에 불과하다. 그림을 그리면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어 그런 것이지, 실제로 양자를 그렇게 떼어 놓고 설명하려 한 것은 아니다. 그대는 어째서 말꼬투리를 잡아 뜻을 흐리면서 이 그림에 대해 그토록 심하게 문제를 제기하는 것인가?”

대답했다. “설사 그대의 말과 같다 하더라도 그 겸지(兼指)한 것은 오상이 되고 단지(單指)한 것은 태극이 되는데, 이미 모두 의혹이 더해진다. 주자께서 ‘성은 형이상자로 태극이 혼연한 본체이고 그 커다란 강리(綱理)를 인의예지라 한다’고 하셨으니, 이에 근거한다면 태극과 오상이 어찌 단지와 겸지로 나눌 수 있는 것이겠는가? 또한 사람은 인의롭고 소와 말은 밭 갈고 짐을 싣는 등 정연하게 조리가 있으니, 이는 실로 천명의 정분(定分)이 그런 것이다. 이 외에 다시 단지한 바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하물며 선생께서는 본디 ‘태어나기 전’과 ‘태어난 후’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말씀하셨으니 단지와 겸지가 어찌 이것과 관계가 있는 것이었는가?”

어떤 이가 말했다. “천명지성, 천지지성, 본연지성은 모두 단지한 일설이다. 인물지성, 기질지성의 경우에는 그 일설 중에 또 구별이 없을 수 없겠는가?”

내가 말했다. “이 또한 일설이다. 원래 기질지성은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다. 예컨대 사람이 인의롭고 소가 밭을 갈고 말이 짐을 싣는 것은 기질이 치우치고 온전함에 따른 큰 구분이고 선 일변에 나아간 것이다. 사람이 불인 불의하고 소와 말이 밭 갈고 짐을 싣지 못하는 것은 치우치고 온전한 구별 중에 세분되어 악 일변에 나아간 것이다. 지금 그 큰 구분으로써 ‘인물지성’이라 하고 세분한 것을 ‘기질지성’이라 하여 둘로 구별한다면, 의심할 바 없이 잘못된 것이다. ”

“그렇다면 자사(子思)께서 말씀하신 ‘솔성지도(率性之道)’는 바로 인간은 온전하게 받은 것이고 동물은 일부만 받은 것인데, 이것을 기질지성으로써 설명할 수 있겠는가?”

말했다. “그렇지 않다. 천명과 솔성 두 구절은 원래 모두 인간과 만물에 나아가 그 성과 도를 단지한 것이다. 성은 일본(一本)이고 도는 만수(萬殊)이니, 이미 만수라 했으면 치우치고 온전하고 넓고 좁은 것으로 리가 가지런하지 않다. 그러나 자사의 의도는 도에 있지 일찍이 기(器)에 있지 아니하니, 어찌 여기에 기질을 섞을 수 있겠는가? 하물며 위 구절은 성에 대해 말한 것이고 아래 구절은 도에 대해 말한 것이라 체와 용 사이에 그 구분이 저절로 있으니, 이른바 ‘성’이라는 글자를 여기에서 의론할 수 있는 바가 아님에 있어서랴? 주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천명지성은 이를 전언(專言)한 것이니 만약 기를 겸하여 말한다면 다시 솔성지도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라 하셨으니, 이 구절이 만약 기질로써 말씀하신 것이라면 상지(上智)⋅하우(下愚)가 모두 솔성할 수 있다는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주자께서 어찌 나를 속이셨겠는가? 자사의 뜻과 주자의 말씀이 이와 같은데 지금 수암 선생께서는 천명의 성에서부터 곧바로 상지⋅하우의 일정한 선악으로써 말씀하시니, 이는 내가 알 수 없는 차원의 이야기로 끝내 혼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

어떤 이가 말했다. “수암이 해석한 이통기국도 율곡의 뜻이 아니고 수암이 해석한 천명⋅솔성도 자사의 뜻이 아니라면 그대는 이 그림이 전혀 참고할 만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옛사람이 ‘자신할 수 없으면 스승을 믿으라’고 했는데, 그대는 자신하지 못하면서 어찌 조급히 스승의 설을 이와 같이 강고하게 불신하는가?”

내가 말했다. “그렇지 않다. 그대는 진실로 남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자신하지 못하기에 장차 스승을 믿으려 한다. 까닭에 밤늦도록 생각하고 아침에 또 생각하면서 스승님의 권위와 존엄에도 불구하고 묻고 따지기를 그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어리석음은 진실로 가련하지만 그 뜻은 또한 볼 만하다. 선배들의 말씀을 돌아보지 않고 사실을 탐구하지 않으며 그 뜻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오직 스승의 말씀만 믿는 것이 어찌 스승을 믿는 도이겠는가? 이 말을 함께 실어 이통기국변으로 삼는다. ”

『외암유고』권12, 잡저, 이통기국변

理通氣局四字, 此栗谷先生洞見大原, 逈出常情之大端也. 其說具在原書, 而理氣元不相離一句, 卽其頭腦也. 元不相離中, 無形而無本末無先後, 理之通也, 有形而有本末有先後, 氣之局也. 此卽其頭腦上八字打開者也. 盖栗谷之意, 天地萬物, 氣局也, 天地萬物之理, 理通也, 而所謂理通者, 非有以離乎氣局也, 卽氣局而指其本體, 不襍乎氣局而爲言耳. 今先生天命圖, 則乃以理通, 爲一頭地, 而圖於上方, 又以氣局, 爲一頭地, 而圖於下方, 截然作兩箇圈子, 上下截拍分明, 理通在氣局之先, 而氣局在理通之外矣. 一理一氣之間離之, 無乃已甚, 而栗谷之說, 曷甞有如此者哉. 至於以太極天命, 爲人物未生時在天之理, 而安於理通節拍, 卽命也源也, 以五常物性, 爲人物已生後在物之理, 而塡於氣局圈子, 卽性也流也, 此何謂哉. 太極五常, 只理也. 天下之物, 無加於理, 故謂之極, 而太其尊辭也, 天下之變, 不易其理, 故謂之常而五其名數也. 天下豈有在天則爲太極而不得爲五常, 在物則爲五常而不得爲太極之理哉, 亦豈有未生則爲太極而不得爲五常, 已生則爲五常而不得爲太極之理哉. 况理通氣局, 是未生已生源流之名歟, 無天則性無所出, 無物則命無所寓, 不知性者在物而不在天, 命者在天而不在物乎. 雖本一物, 而在天爲命而不得謂之性, 在物爲性而不得謂之命, 則必天與物兩存而後, 性命方備矣. 但時之不可並者, 先後也, 未生之命, 已生之性, 雖天下之絶智, 豈得以並存於一時也. 然則所謂性命者, 未免爲前後之物, 而理通氣局者, 亦當爲古今之事矣. 是然乎. 如曰人物受性之後, 別有人物未生之命, 齊頭並立於人物之心, 則一性一命, 未免重倂疊積. 如曰人物受生之外, 別有人物未生之命, 主張機緘於太空之中, 則一霄一壤, 正亦怳惚疑怪. 外此數者, 則卽鄙說矣. 然則凡物之生者爲流, 而生之者爲源, 天地是生之者, 而萬物是生者也, 太極天命之爲源, 五常物性之爲流, 其謂是歟. 曰, 天地固萬物之父也, 天命果五常之父乎. 萬物固天地之子也, 五常果太極之子乎. 在父則通, 在子則局, 惡在其無形乎. 有父而有子, 有源而有流, 惡在其無本末無先後乎. 况天地固生萬物, 而元氣又生天地, 到此則元氣爲理通, 而天命反爲氣局歟. 萬物固生於天地, 而萬物又能生萬物, 到此則先萬物爲太極, 而後萬物爲五常歟. 天地之先, 有多少天地, 萬物之後, 有方生萬物, 然則太極五常, 本無定理, 理通氣局, 元無定指, 不過爲生與所生之間, 禪傳之虛位歟. 或者曰, 以氣言則天亦氣也, 其不能獨尊於氣局也審矣. 以理言則元不離氣, 其不能懸空而孤立也亦明矣. 然則先生之旨, 亦不過卽此氣局, 以兼指者爲五常而圖於下, 以單指者爲太極而圖於上. 作圖不得不然, 而其實非以此離彼而言也. 子何執辭迷旨, 深病於是圖歟. 曰, 縱如子言, 其兼指爲五常, 單指爲太極, 已是大家疑晦矣. 朱子曰, 性形而上者, 是太極渾然之體, 而綱理之大者, 曰仁義禮智, 據此則太極五常, 豈可以單指兼指分張之物乎. 且人而仁義, 牛馬而耕載, 井然而有條, 此實天命之定分然也. 外此而復所單指者, 果何物歟. 况先生之敎, 本以未生已生爲言, 則單指兼指, 曷嘗干涉於是哉. 或者曰, 天命之性, 天地之性, 本然之性, 是皆單指之一說也. 至於人物之性, 氣質之性, 則是一說之中, 又不能無別耶. 曰是亦一說也. 元來氣質之性, 也有善, 也有惡. 如人之仁義, 牛耕馬載, 是偏全之大分, 而卽善一邊也. 其不仁不義不能耕載, 是偏全中細分, 而卽惡一邊也. 今以其大分, 謂人物之性, 細分, 謂氣質之性, 別而二之, 則誤之亦無疑矣. 然則子思所謂率性之道, 正是人物偏全之分也, 此可以氣質之性言之乎. 曰不然. 天命率性此兩句, 本皆卽人物而單指其性道. 性則一本, 道則萬殊, 旣曰萬殊, 則偏全闊狹, 理所不齊. 而然其指在道, 未嘗在器, 則豈可以氣質混而汩之於此哉. 况上句是性, 下句是道, 體用之間, 界分自在, 則所謂性字, 非所可議於是者乎. 朱子曰, 天命之性, 是專言理, 若兼氣言, 則便說率性之道不去, 此句若以氣質言之, 則上智下愚, 擧皆率性大大說不去矣. 朱子豈欺我哉. 子思之旨, 朱子之言如是, 而今先生乃從頭天命之性, 直以上智下愚善惡之一定者言之, 此愚所以滋惑於語氷, 終不能有以自解者也. 或者曰, 理通氣局, 旣非栗谷之意, 而天命率性, 又非子思之旨, 則子謂此圖全局, 全無可據者歟. 古人曰, 不能自信, 信其師, 子非自信之時也, 何遽不信師說如是之固歟. 曰否否. 子誠淺之爲知言矣柬不能自信, 將以信師. 故中夜以思之, 平朝以念之, 干冒威尊, 問辨而不已. 其愚誠可憫, 而其志亦可見矣. 不稽前言, 不究事實, 不得其旨, 而惟言之是信, 豈信師之道哉. 並載其言, 爲理通氣局辨.

『巍巖遺稿』卷12, 雜著, 理通氣局辨

이 사료는 외암(巍巖) 이간(李柬, 1677~1727)이 당시에 전개되던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을 둘러싼 논쟁에서 자신의 주장인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피력한 글이다.

인물성동이론에 대한 논쟁은 학맥의 지역적 특성에 따라 호락논쟁(湖落論爭)이라고도 불렀으며, 한국 성리학에서 대표적인 보편 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같다고 보는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은 이간(李柬)을 위시한 낙하(洛下, 지금의 서울)과 그 인근(기호 지방) 학자들이 주로 따랐으므로 낙론(洛論)이라 불렸고, 인성과 물성이 다르다고 보는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은 한원진(韓元震)을 비롯한 호서(湖西, 충청도) 지방 학자들이 주로 지지하였으므로 호론(湖論)으로 불렸다. 이 논쟁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두 가지로, 우선 인성과 물성이 같은가 다른가에 대한 문제와, 마음이 아직 발현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선악(善惡) 유무에 관한 문제이다.

이 논쟁은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에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로 이어지는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적통인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 1641~1721)의 문하에서 제기되어, 그의 문하에 있던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 1682~1751)과 이간 사이에서 본격화되었다. 이간은 인성과 물성이 같다는 입장에서, 그리고 한원진은 인성과 물성이 다르다는 입장에서 논쟁이 전개되는데, 이 논쟁은 1709년(숙종 35년)부터 1715년(숙종 41년)에 이르기까지 7년간이나 완결을 보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 논쟁은 이후 200여 년에 걸쳐 계속된다.

이간은 한원진보다 5년 위로 충남 온양의 외암에서 살았는데 자는 공거(公擧), 호는 외암(巍巖)이며, 권상하의 문인이다. 저서로 『외암유고(巍巖遺稿)』 16권 8책이 있다. 한원진은 충남 결성의 남당(홍성군)에서 살았는데, 자는 덕소(德昭), 호는 남당(南塘)이며 21세 때부터 청풍 황강(충북 제천군 한수면)의 권상하 문하에서 이간과 함께 수업하였다. 두 사람 모두 수암의 제자로서 가장 뛰어났는데, 호락논쟁은 1709년(숙종 35년) 한원진의 나이 27세, 이간의 나이 32세 때 시작되었다.

호락논쟁의 요점을 정리해 보면, 인성과 물성에서 동일하게 쓰이는 ‘성(性)’ 자는 성리학에서 말하는 본연지성(本然之性)을 일컫는 말이다. 만약 한원진이 인성과 물성이 다르다고 하는 그 성이 기질지성이라 한다면 이는 당연히 인성과 물성이 다를 뿐 아니라 인성과 인성, 물성과 물성도 다른 것이므로 논쟁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동일한 본연지성을 놓고 한원진은 다르다고 하고 이간은 같다고 하는 데서 논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간은 『중용(中庸)』의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에 대한 주자의 해석, 즉 “인(人)과 물(物)이 생(生)함에 각기 그 부여한 바의 이(理)를 얻음으로 인하여 건순오상(建順五常)의 덕이 되니 이른바 성이다”라는 말을 근거로 인간과 금수는 모두 건순오상의 덕을 선천적으로 동일하게 부여받았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이간은 천명이나 오상, 태극이나 본연이 명목은 비록 많으나, 이의 가리킴에 따라 명목을 달리한 것에 지나지 않으니, 처음부터 이것과 저것, 근본과 말단, 치우침과 온전함, 크고 작음의 다름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는 본연으로 말하면 성(性)과 명(命)에 본래부터 인(人)과 물(物)의 다름이 없고, 기질로 말하면 기(氣)의 바름과 통함을 얻은 것은 사람이 되고, 치우침과 막힘을 얻은 것은 물(物)이 되며, 바르고 통한 가운데에도 또 맑고 흐리고 순수하고 섞여서 나뉘어 다름이 있고, 치우치고 막힌 가운데에도 또 혹시 통함과 온전히 막힘의 차별이 있으니, 이것은 사람과 만물이 만 가지로 같지 아니한 것이 그것이라고 하였다.

이러므로 그 기질을 논하면 오직 개의 성이 소의 성이 아닐뿐더러 도척의 성이 순임금의 성이 아니며, 그 본연을 말하면 오직 도척의 성이 곧 순임금의 성일뿐더러 물의 성이 곧 사람의 성이라는 것이다. 이간은 태극(太極)의 이와 음양오행의 기가 묘합(妙合)한 가운데 이의 측면, 즉 본연지성만 보아 인성과 물성이 같음을 주장한다. 곧 이간은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을 구별하고 본연지성만 가리켜 인성과 물성의 보편성을 주장하였다.

이간은 태극(太極)⋅천명(天命)⋅건순오상(建順五常)의 덕을 합해 본연지성이라 하고, 이를 사람이나 물이나 모두 선천적으로 갖추고 있다고 보았다. 다만 사람과 물이 다른 것은 기(氣)의 같지 않음으로 인한 것이라고 보았다. 또 사람은 기(氣)의 바르고 통한 것을 받았으나 물(物)은 치우지고 막힌 것을 받았을 뿐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이간은 본연지성으로서의 인성과 물성의 보편성을 설명하고 기질로써 인성과 물성의 차이를 설명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호락논쟁을 통해 본 철학논쟁의 사회정치적 의미」,『한국사상사학』26,이경구,한국사상사학회,2006.
「호락논쟁의 철학사적 의의」,『제2회 동양문화 국제학술회의논문집-주자학과 한국유학-』,이남영,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1980.
저서
『논쟁으로 보는 한국 철학』, 김형찬, 예문서원, 1995.
『한국유학사』, 배종호,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2.
『한국인물유학사』, 한국인물유학사편찬위원회, 한길사, 1996.
『한국의 유학 사상』, 황의동, 서광사, 1977.
『한국사상의 이해』, 황준연, , 1992.

관련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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