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조선 후기문화성리학의 교조화와 그에 대한 비판

박세당의 성리학 비판

육경(六經)의 글은 모두 요(堯)⋅순(舜) 이하 여러 성인의 말을 기록한 것으로, 그 이치가 정밀하고 그 뜻이 자세하며, 그 생각은 깊고 취지는 심원(深遠)하다. 대개 그 정밀한 것을 논한다면 털끝만큼도 어지럽힐 수 없으며, 그 자세한 것을 논한다면 조그마한 것도 빠뜨린 것이 없다. 그 깊이를 재어 보려고 해도 그 밑바닥을 찾을 수 없으며, 그 깊고 원대한 것을 궁구하려고 해도 그 끝나는 곳을 볼 수 없으니, 이는 진실로 세상의 하찮은 선비라든가 변통 없는 유자(儒者)의 얕은 도량이나 고루한 식견으로서는 밝혀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위로 진(秦)⋅한(漢) 시대부터 아래로 수(隋)⋅당(唐) 시대에 이르기까지, 문호(門戶)를 나누어 쪼개고 사지(四肢)를 잘라 내고 폭을 찢어 내다가, 결국 그 대체(大體)를 파괴하고 만 것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그 이단(異端)1)에 빠진 자는 비슷한 것을 빌려다가 간사하고 기만하는 말을 꾸며 내기도 하고, 그 전대(前代)의 전적(典籍)만을 굳게 지키는 자는 고착되어 막히고 오활(迂闊)하고 편벽하여 전혀 평탄한 길에 어둡다. 아아, 이것이 어찌 성현들이 부지런하고 간절하게 이 책을 만들고 이 말씀을 기록함으로써, 이 법을 밝혀 천하 후세에 기대한 뜻이겠는가.

전(傳)에, “먼 곳을 가려면 반드시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하야 한다”2)라고 했으니, 이것은 무엇을 두고 한 말인가. 어둡고 가려진 사람을 일깨워 가르쳐서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깨닫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진실로 세상의 배우는 자들이 이곳에서 얻는 것이 있다면, 앞에서 말한 먼 곳은 곧 가까운 곳으로부터 시작해서 도달하게 됨을 알 것이다. 그렇다면 이른바 깊다는 것 역시 얕은 곳에서부터 들어가고, 이른바 자세하다는 것 역시 간략한 곳에서부터 미루어 가고, 이른바 정밀하다는 것 역시 거친 것에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니, 세상에는 진실로 거친 것도 능하지 못하면서 그 정밀한 것을 먼저 한다거나, 간략한 것도 능하지 못하면서 그 자세한 것을 일삼거나, 얕은 것도 능하지 못하면서 그 깊은 것을 앞당겨 한다거나, 가까운 것도 능하지 못하면서 그 먼 것을 찾아 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지금 육경에서 구하는 것이 대부분 그 얕고 가까운 것을 뛰어넘어서 깊고 먼 곳으로만 달려가며, 그 거칠고 간략한 것은 소홀히 하고서 정밀하고 자세한 것만을 엿보고 있으니, 그 어둡거나 어지럽고, 빠지거나 넘어져서 아무런 소득도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저들은 다만 그 깊고 멀고 정밀하고 자세한 것만을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얕고 가까우며 간략한 것마저 모두 잃게 될 것이니, 아, 슬프도다. 그 또한 매우 미혹한 것이다.

무릇 가까운 것은 미치기가 쉽고, 얕은 것은 헤아리기 쉬우며, 간략한 것은 얻기 쉽고, 거친 것은 알기가 쉬운 것이다. 그 도달한 것에 따라서 차츰 멀리 가고 또 멀리 간다면 그 먼 곳까지 다 갈 수 있을 것이며, 그 헤아린 것에 따라서 차츰 깊게 들어가고 또 깊게 들어간다면 그 깊은 데를 다 들어갈 수 있을 것이며, 그 얻은 것에 따라서 점점 자세히 하고 그 아는 것에 따라서 점점 정밀히 하고, 정밀한 것을 더욱 정밀하게 하고, 자세한 것을 더욱 자세하게 한다면, 그 자세한 것을 끝까지 할 수 있고, 그 정밀한 것을 끝까지 할 수 있을 것이니, 그렇게 되면, 어찌 어둡고 어지러우며 빠지고 넘어지는 근심이 있겠는가.

대개 귀머거리는 우레와 벼락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소경은 해와 달의 빛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저 귀머거리와 소경의 병일 뿐, 우레와 벼락, 해와 달은 본래 그대로인 것이다. 우레와 벼락은 천지 사이에서 소리가 진동하고, 해와 달은 고금에 비추어 빛이 환하니, 한 번이라도 귀머거리가 듣지 못하고 소경이 보지 못했다 하여 소리나 빛이 혹시라도 작아지거나 흐려진 적은 없다.

그러므로 송(宋)나라 때에 와서 정자(程子), 주자(朱子) 두 선생이 나와서 마침내 해와 달 같은 거울을 닦아 내고 우레와 벼락같은 북을 두드리니, 소리는 멀리 미치고, 빛은 넓게 퍼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육경의 뜻이 이에 다시 세상에 환하게 밝혀졌으니, 지난날의 오활하고 편벽한 것이 이미 사람의 생각과 뜻을 고착시키고 막을 수 없으며, 그 비슷한 것이 또한 명칭을 빌릴 수 없게 되어, 간사하고 기만된 선동과 유혹이 마침내 끊어지고 평탄한 표준이 있게 되었다. 이렇게 된 이유를 따져 보면 또한 끝을 잡아 근본을 헤아리고 물줄기를 따라 근원을 거슬러 감으로써 얻은 것이었으니, 이는 자사(子思)가 말한 지침(指針)에 참으로 깊이 합하고 묘하게 맞은 것이다.

그러나 경전에 실린 말은 그 근본은 비록 하나이나 그 실마리는 천 갈래 만 갈래이다. 이것이 이른바 “한 가지 이치인데도 백가지 생각이 나오고 귀결은 같으면서도 길은 다르다”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독특한 지식과 깊은 조예(造詣)로서도 오히려 그 뜻을 전부 알아서 세밀한 것까지 틀리지 않기는 불가능하므로 반드시 여러 사람의 장점을 널리 모으고 조그마한 선(善)도 버리지 않은 다음에야 거칠고 간략한 것이 유실되지 않고, 얕고 가까운 것이 누락되지 아니하여, 깊고 멀며 정밀하고 자세한 체제가 비로소 완전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나는 문득 참람한 짓임을 잊고 좁은 소견으로 터득한 것을 대강 기록한 다음 이것을 모아 책을 만들고 『사변록(思辨錄)』이라 명명하였는데, 이는 선유(先儒)들이 세상을 깨우치고 백성을 도와준 본의에 티끌만 한 도움이 없지 않을까 한다. 그러므로 이론(異論) 하기를 좋아하여 하나의 학설을 만들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나의 이 경솔하고 망녕되어 소략하고 모자람을 헤아리지 못한 죄로 말하면 회피할 수 없지만, 뒷날에 이 책을 보는 이들이 혹시 딴 뜻이 없음을 생각하여 특별히 용서해 준다면 이 또한 다행이겠다.

『사변록』, 서

1)이단(異端) : 유교(儒敎)에 배반되는 것, 곧 노(老)⋅불(佛)⋅양(楊)⋅묵(墨) 등을 가리킨다.
2)전(傳) : 성경현전(聖經賢傳), 즉 성인(聖人)이 지은 글은 경(經)이라 하고, 현인(賢人)이 지은 글은 전(傳)이라 한다. 여기서의 전은 고서(古書)를 말하며, 공자(孔子)의 손자인 자사(子思)가 지었다는 『중용(中庸)』의 일부를 인용한 것이다.

六經之書,皆記堯舜以來羣聖之言,其理精而其義備,其意深而其旨遠. 蓋論其精也, 毫忽之不可亂,語其備也,纖微之無或闕. 欲測其深,莫得其所底,欲窮其遠,不見其所極,固非世之曲士拘儒淺量陋識, 所可明也. 是以, 上自秦漢, 下逮隋唐,分門割戶,斷肢裂幅,卒以破毀乎大體者,不可勝數. 其陷溺異端者, 多假借近似, 以飾其邪遁之辭,其抱持前籍者, 又膠滯迂僻全昧夫坦夷之塗. 嗚呼, 此豈聖賢, 所以勤勤懇懇, 爲此書記此言, 以明乎此法, 而庶幾有望於天下後世之意哉. 傳曰, 行遠必自邇,此何謂也. 非所以提誨昏蔽, 使其能自省悟乎. 誠使世之學者,有得乎此,向所謂遠者,卽可知自邇而達之. 然則, 所謂深者,亦可自淺而入之,所謂備者,亦可自略而推之,所謂精者,亦可自粗而致之, 世固未有粗之未能而能先其精,略之未能而能業其備,淺之未能而能早其深,邇之未能而能宿其遠者. 今之所求於六經,率皆躐其淺邇而深遠是馳,忽其粗略而精備是規,無怪乎其眩瞀迷亂沈溺顚躓而莫之有得. 彼非但不得乎其深遠精備而已,倂與其淺邇粗略而盡失之矣, 噫嘻悲夫,其亦惑之甚乎. 夫邇者易及, 淺者易測, 略者易得, 粗者易識. 因其所及而稍遠之,遠之又遠,可以極其遠矣. 因其所測而稍深之,深之又深,可以極其深矣, 因其所得而漸加備,因其所識而漸加精,使精者益精, 備者益備,可以極其備極其精矣. 又何有眩瞀迷亂沈溺顚躓之患哉. 夫聾則不聞乎雷霆之聲,瞽則不覩乎日月之光,彼聾瞽者病耳, 雷霆日月,固自若也. 行乎天地而震烈,耀乎古今而晃朗,未嘗爲聾與瞽而聲光之或虧. 故及宋之時,程朱兩夫子興,乃磨日月之鏡,掉雷霆之鼓,聲之所及者遠,光之所被者普, 六經之旨, 於是而爛然復明於世. 囊之迂僻者, 旣無足以膠人慮而滯人意,其近似者, 又不能以假之名而借之號,邪遁之煽誘遂絶,坦夷之準的有在. 究其所以至此者,亦莫非操末探本, 沿流沂源以得之,則是於子思所言之指,眞有深合而妙契者乎. 然經之所言, 其統雖一,而其緖千萬,是所謂一致而百慮,同歸而殊塗. 故雖絶知獨識,淵覽玄造,猶有未能盡極其趣而無失細微. 必待乎博集衆長,不廢小善,然後粗略無所遺,淺邇無所漏,深遠精備之體, 乃得以全. 是以, 輒忘僭汰槩, 述其蠡測管窺之所得,裒以成編,名曰思辨錄, 倘於先儒牖世相民之意,不無有塵露之助. 故非出於喜爲異同. 立此一說. 若其狂率謬妄不揆疏短之罪,有不得以辭爾,後之觀者,或以其意之無他而特垂恕焉,則斯亦幸矣.

『思辨錄』, 序

이 사료는 조선 후기 성리학박세당(朴世堂, 1629~1703)이 지은 『사변록(思辨錄)』의 서문이다. ‘사변록’은 신중하게 생각하고 정확하게 판단하여 기록하겠다는 의미이다. 박세당의 학문적인 특징을 잘 보여 주는 대표적 저서이기도 하다.

박세당은 『사변록』 서문에서 주자에 의해 육경의 뜻이 다시 세상에 밝혀졌다고 주자의 영향력을 인정하면서도, 주자 일변도의 해석으로는 요순 이래 여러 성인의 말이 담긴 육경의 본뜻을 분명하게 헤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당시 주자학만을 고집하는 조선 성리학자들이 깊고 먼 것, 정밀하고 다 갖춘 것만을 추구하여 관념적인 논쟁만을 일삼고 있다고 본 것이다. 이에 박세당은 가깝고 소략한 것에서부터 출발하여 차츰 깊고 심원한 이론으로 나아가야 한다면서 실천과 경전의 본뜻에 따른 해석을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사변록』을 저술하여 여러 사람의 생각과 장점을 모으는 한편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자 한 것이다.

‘통설(通說)’이라고도 불리는 『사변록』은 이러한 목적으로 지은 탈주자적 유교 경전의 주해서다. 여기에서 박세당은 『대학』⋅『논어』⋅『맹자』⋅『중용』 등의 사서와 『상서』⋅『시경』에 대해 주석을 붙였는데, 52세부터 65세에 이르기까지 14년에 걸친 대작업을 통해 그가 가장 주력한 것은 사서에 관한 주석이었다. 주자의 견해를 반박하며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 그의 독자적인 경향은 특히 『대학』과 『중용』에 대한 해석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러나 주자의 설을 비판하고 독자적인 해석을 붙이는 박세당의 행적은 정주(程朱)의 해석을 유일한 전통적 권위로 받아들이던 당시의 주류적 경향에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 결과 그는 당시의 정통 주자학자들로부터 이단으로 규정되어 혹독한 배척을 당하게 되었다.

박세당의 『대학』 주석에서 주자와 대립되는 대표적인 쟁점은 ‘물(物)’과 ‘사(事)’의 개념과 ‘격물치지(格物致知)’에 대한 문제이다. 주자는 명명덕(明明德), 신민(新民), 지어지선(止於至善)의 세 강령을 ‘물(物)’로 파악한 반면 박세당은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 8조목에서 ‘물∙지∙의∙심∙신∙가∙천하’를 ‘물’로 파악하고, ‘격∙치∙성∙정∙수∙제∙치∙평’을 ‘사’로 해석하였다. 주자는 물과 사를 같은 것으로 해석하였지만, 박세당은 대상으로서의 물과 행위로서의 사를 다른 것으로 파악한 것이다. 또한 격물치지에 대한 해석에서도 주자는 “물(物)에 이르른다(至物)”라고 해석한 반면 박세당은 “격물은 물(物)의 법칙을 구하여 바른 것을 얻는 것”이라고 해석하여 “격을 바로잡는다[正]”라고 정의하였다.

『중용』 해석에서는 ‘천명(天命)’과 ‘성(性)’의 개념이 대표적인 쟁점이었다. 주자는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 한다”는 구절에서 천명을 ‘하늘이 시키는 것[令]’이라고 해석하지만, 박세당은 ‘주는 것’이라고 정의하여 천(天)과 성(性)을 일치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또한 “사람(人)과 물(物)이 각각 그 성(性)의 자연스러움을 따르는 것이 도(道)이다”라고 언급한 것에 대해서도 박세당은 『중용』은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며, 사람은 도를 알 수 있지만 물은 도를 알 수 없다고 하면서 주자가 물까지 언급한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하였다.

박세당은 당시의 성리학 일변도의 분위기에서 탈출해 실사구시 학문을 지향하였다. 귀납적이고 고증학적 비판 방식을 취하면서 실증적이고 자유로운 태도로 경전을 재해석하여 탈주자학(脫朱子學)의 철학 체계를 모색하였다는 점에서 사상적 의의를 갖는다. 당시의 송시열(宋時烈, 1607~1689)과 그 문인들이 주자의 뜻에 충실했던 것과 달리 도학적 정통주의를 비판하면서 주자의 해석을 상대화하고 육경과 제자백가 등에서 모순 해결의 사상적 기반을 찾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경서를 객관적으로 온당히 주해했는가에 대해서는 재평가의 여지가 있다고 할 수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서계 박세당의 정치사상」,『국학기요』1,김만규,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1978.
「박세당의 실학사상에 관한 연구」,『아세아연구』15-2,윤사순,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1972.
「박서계와 반주자학적 사상」,『대동문화연구』3,이병도,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1960.

관련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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