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조선 후기문화실학의 발달과 국학 연구의 확대

안정복의 삼국 인식

정통(正統)은 단군⋅기자⋅마한⋅신라 문무왕【9년 이후】고려 태조【19년 이후】를 말한다【신라는 고구려에 대해 나라를 합병한 예를 썼으므로 통일한 이듬해에 정통을 이었다. 고려는 견훤(甄萱)에게 도적을 평정한 예를 썼으므로 통합한 해에 정통을 이었다】. 무통(無統)은 삼국이 병립한 때를 말한다【구사(舊史)에는 백제가 의자왕(義慈王)에서 그쳤으나, 의자왕 뒤에 왕자 풍(豊)이 3년 동안 즉위하였으므로 이제 풍으로 대를 이었다】.

동사강목』 범례 통계

正統, 謂檀⋅箕⋅馬韓⋅新羅文武王【九年以後】⋅高麗太祖【十九年以後】.【新羅之於高句麗, 用幷國之例, 故繼正統, 於混一之明年. 高麗之於甄萱, 用平賊之例, 故繼統於統合之年.】無統, 謂三國幷立之時.【舊史, 百濟止於義慈, 義慈後王子豊立三年, 故今以豊繼世.】

『東史綱目』凡例 統系

이 사료는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이 1778년(정조 2)에 완성한 『동사강목』의 범례에서 제시한 내용이다. 여기서 안정복은 신라 통일 이전의 삼국은 정통(正統)이 없다는 관점에서 서술했음을 밝히고 있다. 안정복은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의 문인이었다. 이익은 역사학을 독립적인 학문으로 인정하지 않고 경학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한 조선 후기인들의 잘못된 역사관을 통렬하게 비판하며 새로운 인식 체계를 세우고자 했다고 평가되는 학자이다. 이 같은 이익의 역사관은 안정복에게 그대로 영향을 미쳐서, 안정복이익의 사론(史論)에서 영향을 받아 자신의 역사관을 확립하였다. 『동사강목』은 그러한 관점을 가지고 우리나라의 역사를 고대부터 체계적으로 정리하고자 했던 역사서였다.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주희(朱熹), 즉 주자(朱子, 1130~1200)의 강목법(綱目法)에 따라 체계를 세웠지만,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가 다르므로 우리나라 형편에 맞는 원칙을 세웠다고 밝혔다. 『동사강목』 범례의 「통계(統系)」에서는 역사의 시작과 흐름의 줄거리를 명백하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할 일임을 지적하고, 단군과 기자(箕子)로부터 우리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분명히 하였다.

이 같은 정통론(正統論)은 조선 후기 역사학의 특징 중 하나였다. 중국 한(漢)나라 때부터 시작된 정통론은 왕조를 자연 또는 천명에 의하여 세워진 정통 왕조로서 합리화하려는 의도에서 출현하였다. 중국 송(宋)나라 때 주자는 세계사를 중화[華]와 오랑캐[夷]로 구분하면서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강하게 드러냈다. 이때 정통론은 복잡한 중국의 역사를 중국 정통의 역사와 오랑캐의 역사로 구분하는 역할을 하였다. 특히 송나라가 여진족이 세운 금(金)나라의 압박을 받는 상황이었으므로, 송나라에 대한 의리를 강조하려는 명분으로도 작용하였다. 정통론은 이후 조선 후기에 이르러 역사학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게 되는데, 이는 소속 왕조에 대한 의리를 주장했던 주자학적 명분론과는 달리, 한국사도 중국사만큼 역사가 유구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 후기 역사학에서 정통론이 본격적으로 적용된 것은 17세기 중엽 홍여하(洪汝河, 1621~1678)의 『동국통감제강(東國通鑑提綱)』에서였다. 여기서 홍여하는 기자-마한-신라를 정통으로 하는 체계를 확립하였다. 또한 18세기 초엽에 임상덕(林象德, 1683~1719)은 『동사회강(東史會綱)』에서 삼국 무통-통일신라-통일 고려로 체계화하면서 마한을 정통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단군-기자-마한-삼국 무통-통일신라-고려(통일 이후)로 한국사를 체계화하였다. 삼국을 무통으로 본 것은 삼국이 서로 균등하였던 현실을 고려한 것으로, 이는 현실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비롯되었다. 이에 비해 신라의 통일 이후와 고려 통일 이후를 정통으로 처리하였는데, 이는 당시 강목체 역사서의 공통적인 현상이었다.

삼국을 무통으로 보는 안정복의 입장은 『동사강목』의 서술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각국의 역사를 서술할 때 각 국 연도 표기나 발생하였던 사건을 동등하게 병렬시켜 서술하였던 것이다. 안정복은 또한 삼국의 건국에 대해서도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였다. 즉, 고구려는 현도군 아래에 있던 고구려현(高句麗縣)에서 발전하였으며, 백제는 마한의 백제국(伯濟國)에서, 신라는 진한의 사로국(斯盧國)에서 발전하였다고 하였다. 이어 삼국은 건국 초기에는 조그만 지역의 작은 나라였으나 시간이 경과하면서 점차 강역을 넓혔다고 보았다. 이 밖에도 이전 기록과는 달리 삼국 중 고구려 건국이 가장 먼저였다는 사실을 중국 측 역사서인 『한서(漢書)』의 자료를 통해 논증하였고, 고구려나 백제도 신라에 뒤지지 않는 강대함을 보였다고 주장하였다.

동사강목』에서는 이 밖에도 삼국과 관련한 많은 사실을 고증하였다. 예를 들어 신라의 국명은 본래 사로(斯盧)인데 『삼국사기』에서 서나벌(徐那伐)로 적은 것은 왕도(王都)의 뜻이 와전된 것이라고 하였다. 『동국통감』에서 탐라(耽羅)가 신라 경덕왕 때 탐진(耽津)으로 개명되었다고 한 것에 대해서도 중국 역사서인 『북사(北史)』를 인용하여 탐라라는 이름은 백제에 있었으며, 또 백제에 예속된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고구려의 경우에는 고구려가 부여에서 나온 것은 사실이지만 해모수와 금와에 관한 설화는 황당무계하며, 동명왕 때는 평양이 낙랑(樂浪)의 치하에 있었기에 그의 무덤이 평양에 있다는 설은 잘못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렇듯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이전에 나온 역사서와 삼국 당시의 상황에 맞추어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 그 사실 여부를 고증하였다.

이러한 안정복의 연구에서는 조선 후기 실학이 가졌던 실증주의적 태도와 탈중국 의식을 엿볼 수 있다, 『동사강목』은 이러한 실학의 학풍에서 비롯된 국학, 곧 민족의 전통과 현실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면서 우리의 역사, 지리, 국어 등을 연구하는 경향을 대표하는 저서라 하겠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안정복의 역사관과 동사강목」,『조선사연구』1,차장섭,조선사연구회,1992.
「안정복의 사상과 동사강목」,『한국학보』14-1,한영우,일지사,1988.
저서
『한국근세사학사-조선중⋅후기편』, 정구복, 경인문화사, 2008.
편저
「한국 사학사의 흐름」, 정두희, 한길사, 1994.
「조선후기의 역사인식」, 조광, 을유문화사, 1985.

관련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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