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조선 후기문화실학의 발달과 국학 연구의 확대

유희의 한글 연구

정씨 어른【동유(東愈 : 정동유, 1744~1808)】께서 일찍이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자네는 언문의 묘함을 아는가? 대저 자음(字音)으로써 자음(字音)을 전하는 것은 이것이 변하면 저것이 따라 변해서 옛날의 구음과 지금의 운이 여러 번 틀린 것은 당연하다. 만일 이것을 언문으로 주한다면 영원히 전할 수 있으니, 어찌 참됨[眞]을 잃을 염려가 있겠는가. 더구나 문장은 반드시 간결하고 심오한 것을 숭상해야 하는데, 간결하고 심오한 것을 숭상하다 보면 잘못 해석하는 것을 금할 길 없다. 이것을 만일 언문으로 써서 왕복한다면 만에 하나도 의심할 것이 없다. 자네는 언문이 부녀자의 학문이라 하여 경홀히 하지 말라” 하였으며, 또 탄식하기를, “기우(奇耦)가 나누어진 것은【ㅏ, ㅓ와 ㅑ, ㅕ를 가리킨다】 광운(廣韻)이 나오기 이전이었고【서역의 자모가 처음 왔을 때를 가리킨다】 청탁(淸濁, 훈민정음 초성(初聲)의 청음(淸音)과 탁음(濁音)을 합하여 일컫는 말)이 혼돈된 것은【점형과 초성이 폐지된 것을 가리킨다】 통석(通釋)1)이 나온 뒤였으나【박성원의 때를 가리킨다】, 내가 어찌 통석이 나온 뒤의 사람과 함께 광운이 나오기 이전의 글자를 논하겠는가” 하셨다. 나는 마침내 함께 뜻을 풀이하기를 몇 달 동안 한 다음 돌아와서 한 책을 편찬하고는 『언문지』라 하였는데, 먼저 초성, 중성, 종성에 대하여 전서(前書)의 연혁을 열거하였고 논단을 붙였으며, 끝에는 온전한 글자를 나열하여 1만 250자를 가지고 종횡으로 행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에게【한 번】 보고도 다 알도록 하여 후진에게 보여 주었으나 이해해 주는 자들이 적으므로 마침내 책상 속에 넣어 든 지 15~16년 만에 분실하고는 홀로 서글퍼하였다. 그 후 5~6년이 지난 오늘에 『사성통해(四聲通解)』2)를 빌려어, 다시 옛날 기억한 것을 생각해 내고 간간이 새로 본 것을 넣어 다시 한 책을 만들었다. 그러나 글자를 종횡으로 나열하여 원을 만드는 것은 너무 더디므로 삭제하였다. 갑신년(1824) 중하 상순에 비 내리는 서파(西陂)에서 쓰다.

『문통』권19, 언문지서

1)조선 후기 학자 박성원(朴性源)이 1747년(영조 23년) 저술한 『화동정음통석운고(華東正音通釋韻考)』를 말한다.
2)1517년(중종 12년) 최세진(崔世珍)이 편찬한 책으로, 한자(漢字)를 운(韻)으로여 분류한 자서(字書)이다.

鄭丈【東愈】工格物, 嘗語不佞, 子知諺文妙乎. 夫以字音傳字音, 此變彼隨變, 古叶今韻, 屢舛宜也. 若註以諺文, 傳之久遠, 寧失眞爲慮. 況文章必尙簡奧, 以簡奧通情, 莫禁誤看. 諺文往復, 萬無一疑. 子無以婦女子學忽之. 又嘆曰, 奇耦之分【謂ㅏㅓ及ㅑㅕ】, 在廣韻前【謂西域字母初來時】, 淸濁之混【謂廢雙形初聲】, 在通釋後【謂朴性源時】, 吾安能與後通釋之人, 論及先廣韻之字哉. 乃不佞與講辨, 旣數月, 歸著一書, 名諺文志, 先於初中終聲, 列前書沿革, 繼以論斷, 末列全字, 立成萬有二百五十, 縱橫爲行. 使人【一】閱盡得之, 以示後進, 理會者寡, 遂投巾衍十五六年, 因失之, 獨自悵恨. 又五六年及今, 借得四聲通解, 更繹舊記, 間易新見, 復以成一本. 至其立成字圖, 苦太遲遲, 刊落之. 時甲申仲夏上旬, 西陂雨中書.

『文通』卷19, 諺文志序

이 사료는 1824년(순조 24년) 유희(柳僖, 1773~1837)가 저술한 『언문지(諺文志)』의 서문에 해당한다. 『언문지』는 그의 문집 『문통(文通)』제19권에 수록되어 있으며, 서문과 훈민정음 자모를 분류한 초성례(初聲例)⋅중성례(中聲例)⋅종성례(終聲例)의 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을 저술한 유희는 일찍이 실학자이며 정음학자인 정동유(鄭東愈, 1744~1808)로부터 직접 문자 음운학을 사사받았다. 유희의 스승인 정동유는 강화 출신으로 정제두(鄭齊斗)양명학을 연구한 이광려(李匡呂)의 문인이자 『주영편(晝永編)』의 저자이다. 유희는 정동유로부터 문자 음운학을 배워 국어학의 연구에 힘쓴 결과 당대의 문자 음운학에 일가견을 가지게 되었다. 유희의 학문은 유교적 도학(道學)을 기반으로 훈고학적 성과를 수용하는 태도를 보여 주고 있으며, 무엇보다 다양한 분야에 대한 폭넓은 연구와 우리 글에 대한 관심이 돋보인다. 그의 연구 성과는 『언문지』에서 잘 드러난다.

유희는 『문통』 100권을 저술할 정도로 매우 박학하였으며, 『언문지』는 정음(正音) 연구에 관한 것이다. 이 『언문지』는 그의 스승인 정동유와 더불어 정음에 대하여 강론하기를 수개월 만에 저술한 것이 있었으나, 이를 분실하고 20년이 지난 1824년(순조 24년) 5월에 다시 한 책을 이룬 것이라고 그의 서문에서 밝혔다. 제시한 사료에서도 스승인 정동유의 권유에 따라 이 책을 저술하게 되었다는 것과 언어 전달 및 이해에 있어 한 줄의 정확성과 탁월성을 당시에 이미 갈파하였다는 내용이 담긴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언문지』는 서(序)⋅초성례⋅중성례⋅종성례⋅전자례로 나누어졌다. 초성례에서 정동유의 23자모에 순경음(脣輕音) 2모(ㅸ, ㅹ)를 추가하여 ‘유씨교정초성이십오모(柳氏校定初聲二十五母)’를 만들었다. 중성례에서는 ‘유씨교정중성(柳氏校定中聲)’으로 ‘정례(正例) 15형(形)’과 ‘변례(變例) 1형’의 도합 16형을 인정하였는데, 이것은 훈민정음의 11중성에 ‘ㅘ, ㅝ, ᆄ, ’의 4형을 추가하여 정례 15형을 만든 것이고, 변례 1형은 ‘딴이의 ㅣ’를 첨가한 것이다. 종성례에서는 ‘유씨교정종성(柳氏校定終聲)’으로 ‘정례(正例) 6운(韻)’, 즉 3평(平)(ㆁㄴㅁ)과 3입(入)(ㄱㄷㅂ)을 들었으며, 변례(ㄹ) 하나를 더하여 모두 7종성을 인정하였다.

또한 문자의 기원과 관련해 『언문지』에서는 ‘전자례’의 “언문은 비록 몽고에서 시작되었으나 우리나라에서 완성되었으며 실로 세간에서의 지극히 오묘한 것이다”라는 기사와 ‘초성례’의 “세종 때에 사신에 명하여 몽고자양(蒙古字樣)에 의거하고 명학사(明學士) 황찬(黃瓚)에게 질문하여 지은 것이다”라는 기사를 통하여 이익의 몽고문자 기원설을 지지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한글의 기원이 몽골문자에서 유래했으며 ㅇ과 이 혼용은 잘못이라고 했다. 또한 사성점은 한문에서는 필요하나 우리말에는 불필요하며, 된소리는 각자 병서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또한 초성, 중성, 종성의 문자 음운을 새롭게 해석하고 표기하여 한자음을 제대로 표기할 수 있도록 한글을 교정할 것을 강조했다.

『언문지』는 이전의 한자음 위주의 연구를 극복해, 처음으로 우리말 위주의 연구를 시도한 것으로 조선 시대 국어학 연구서 중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다. 유희는 신숙주(申叔舟, 1417~1475)⋅최세진(崔世珍, ?~1542)⋅박성원(朴性源, 1697~1757)⋅이광사(李匡師, 1705~1777)⋅이영익(李令翊)⋅정동유(鄭東愈) 등이 이전에 이루어 놓은 학설을 수용⋅비판하는 가운데 자신의 학설을 펼칠 수 있었다. 『언문지』는 1937년 한글학회에서 단행본으로 간행되었고, 1958년 유창돈이 번역한 『언문지주해(諺文志註解)』가 간행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한국문자발달사」,『한국문화사대계』5(언어⋅문학사),박병채,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1967.
저서
『한국근현대사회사상사탐구』, 노용필, 한국사학회, 2010.
『조선후기 『훈민정음』연구의 역사적 변천』, 이상혁, 역락, 2004.
『고친 한글갈』, 최현배, 정음사, 1961.

관련 사이트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링크연결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