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조선 후기문화서양 문물의 수용과 과학의 발달

동의보감의 간행

의사들은 늘 황제(黃帝)와 기백(岐伯)1)에 대하여 말한다. 황제와 기백은 위로는 변천하는 자연현상에 정통하고 아래로는 사람들 사이에서 지켜야 할 도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책 쓰기를 힘들어 했으나 그래도 묻고 대답하여 해명(解明)하는 식으로 써서 후대(後代)에 전하였으니 의학책이 나온 지는 이미 오래라고 말할 수 있다. 옛날 태창공(太倉公)2)진월인(秦越人)으로부터 그 후 유하간(劉河間)장자화(張子和)주단계(朱丹溪)이동원(李東垣)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의학자(醫學者)들이 연이어 나와서 의학 이론은 더욱 복잡하게 만들어졌다. 한편 경전(經典)의 구절을 따다가 각기 다투어 자기의 학파를 내세움으로써 의학책은 더 많아졌으나 의술은 더욱더 애매해졌다. 그리하여 『영추(靈樞)』의 본래의 뜻과 거리가 멀어졌다. 서투른 의사들은 깊이 이치를 알지 못하고 혹 『내경(內經)』의 말을 저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하거나 옛날 방법에만 매달렸을 뿐이지 변통(變通)해서 쓸 줄을 몰랐다. 또 취사선택해서 그 중심을 잃었기 때문에 사람을 살리려고 하다가 죽이는 일이 많았다.

선종왕(宣宗王)은 몸조리를 하는 방법으로써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의학에 관심을 두고 백성들이 병으로 앓는 것을 걱정하여 병신년(1596년, 선조 29)에 태의(太醫)로 있던 허준(許浚)을 불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요즘 조선이나 중국의 의학책들은 모두 변변치 않고 보잘 것이 없는 초록(抄錄)들이므로 그대는 여러 가지 의학책을 모아서 좋은 의학책을 하나 편찬하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사람의 병은 다 몸을 잘 조섭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므로 수양하는 방법을 먼저 쓰고 약과 침, 뜸은 그 다음에 쓸 것이며 또 여러 가지 처방이 번잡(煩雜)하므로 되도록 그 요긴한 것만을 추려야 할 것이다. 산간벽지에는 의사와 약이 없어서 일찍 죽는 일이 많다. 우리나라에는 곳곳에 약초가 많이 나기는 하나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니 이를 분류하고 지방에서 불리는 이름도 같이 써서 백성들이 알기 쉽게 하라”

허준(許浚)은 유의(儒醫) 정작(鄭碏, 1533~1603)과 태의(太醫) 양예수(楊禮壽, ?~1597)⋅김응탁(金應鐸)⋅이명원(李命源)⋅정례남(鄭禮男) 등과 함께 편집국(編輯局)을 설치하고 책을 편찬하기 시작하였다. 대략적인 체계를 세웠을 때 정유년(1597년, 선조 30) 난리를 만나 의사들이 여러 곳으로 흩어졌기 때문에 편찬은 할 수 없이 중단되었다. 그 후 선조가 또 허준에게 혼자서라도 편찬하라고 하면서 국가에 보관하였던 의학책 500여 권을 내주면서 참고하라고 하였다. 편찬이 아직 절반도 못 되었는데 선조가 세상을 떠났다. 새 왕이 즉위한 지 3년째 되는 경술년(1610년, 광해군 2)에 비로소 이 사업이 끝나서 왕에게 바쳤다. 이 책의 이름을 『동의보감(東醫寶鑑)』이라고 지었으며 모두 25권으로 되어 있다.

왕이 살펴보고 높이 평가하면서 말하기를 “양평군(陽平君) 허준은 일찍이 선조에게 의학책을 편찬하라는 특명을 받고 여러 해 동안 깊이 연구하였다. 심지어는 옥중과 유배살이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 사업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한 열매로 지금 편찬을 끝냈다. 생각하면 선종왕이 편찬할 것을 명령한 책이 내가 왕위에 오른 때 완성되었으니 비감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라고 하면서 허준에게 좋은 말 한 필을 주면서 그의 공로를 표창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급히 내의원에 명령하여 출판청(出版廳)을 설치하고 인쇄하여 국내외에 널리 배포하라고 하였다. 또 제조(提調)로 있던 나[이정귀(李廷龜)]에게 서문(序文)을 써서 책머리에 싣도록 명령하였다. 나는 생각하건대 원기(元氣)가 한번 흩어지고 6기가 조화되지 못하면 여러 가지 병이 생겨서 백성들이 화(禍)를 입게 되는데 의약품으로 죽어 가는 환자를 구원하는 것은 실로 제왕의 인자한 정치에서 첫째가는 일이다. 그러나 의술은 책이 아니면 기재할 수 없으며 책은 잘 선택하지 않으면 자세하게 쓸 수 없고 폭넓게 수집하지 않으면 그 이치가 명료하지 못하며 널리 배포하지 않으면 혜택이 널리 미치지 못한다.

이 책은 옛날이나 지금의 의학책의 내용을 모두 포괄하였고, 여러 사람의 이론을 절충하여 기본을 찾아서 근원을 해명하였으며, 강령을 세우고 요점을 따서 자세하면서도 간결하며 간결하면서도 빠진 것이 없다. 내경(內景)과 외형(外形) 편으로부터 시작하여 잡병(雜病)의 여러 가지 처방에 이르기까지 분류하였으며 맥결(脈訣), 증후론(症候論), 약성(藥性), 치료법(治療法), 섭생(攝生)에 대한 요점과 침과 뜸에 대한 모든 규범(規範)에 이르기까지 빠짐없이 다 써 놓았다. 그리고 체계가 정연하여 복잡한 것이 없으므로 환자의 증상이 비록 천백(千百) 가지라 할지라도 치료에서 보(補)하고 사(瀉)할 것과 빨리하고 늦게 하는 것 등이 모두 폭넓고 적절하게 응용되도록 써 놓았다. 구태여 옛날 고전(古典)이나 근래의 여러 학설을 광범히 참고하지 않아도 병증 분류에 따라 처방을 찾으면 여러 가지를 다 알 수 있다. 그리고 증상에 따라서 약을 쓰면 꼭 들어맞는다. 진실로 의사들에게는 보배로운 거울이며 백성을 구원하는 좋은 법이다.

이것은 모두 선조가 가르쳐 준 묘책이고 우리 성상이 계승한 높은 뜻이다. 백성에게 혜택을 주고 만물을 사랑하는 어진 마음과 백성의 생활을 넉넉하게 하고 그들의 수요를 충족시키는 방법은 예나 지금이나 한가지이기 때문에 잘하는 정치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어진 사람이 마음을 쓰면 그 혜택이 널리 미친다”고 하였으니 어찌 신뢰하지 못하겠는가. 만력(萬曆) 신해(辛亥) 39년 이른 여름(에 이 서문을 쓰다.)

『월사선생집』권39, 서, 동의보감

1)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황제(皇帝)와 그의 신하이자 천하의 명의(名醫)인 기백(岐伯)으로, 이 두 사람이 의술에 관해 나눈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 가장 오래된 중국의 의학서인 『황제내경(皇帝內經)』이다.
2)태창공(太倉公) : 제나라 태창(太倉)의 장(長)이었다. 임치(臨菑) 사람으로 성은 순우(淳于) 씨이고 이름은 의(意)다

醫者雅言軒⋅岐. 軒⋅岐上窮天紀, 下極人理. 宜不屑乎記述, 而猶且說問著難, 垂法後世, 則醫之有書, 厥惟遠哉. 上自倉⋅越, 下逮劉⋅張⋅朱⋅李, 百家繼起, 論說紛然. 剽竊緖餘, 爭立門戶, 書益多而術益晦. 其與靈樞本旨, 不相逕庭者鮮矣. 世之庸醫, 不解窮理, 或倍經訓而好自用, 或泥故常而不知變. 眩於裁擇, 失其關鍵, 求以活人而殺人者多矣. 我昭敬大王以理身之法, 推濟衆之仁, 留心醫學, 軫念民瘼, 嘗於丙申年間, 召太醫臣許浚, 敎曰, 近見中朝方書, 皆是抄集, 庸瑣不足觀, 爾宜裒聚諸方, 輯成一書. 且人之疾病, 皆生於不善調攝, 修養爲先, 藥石次之, 諸方浩繁, 務擇其要, 窮村僻巷. 無醫藥而夭折者多. 我國鄕藥多產, 而人不能知, 爾宜分類, 竝書鄕名, 使民易知. 浚退與儒醫鄭碏,太醫楊禮壽⋅金應鐸⋅李命源⋅鄭禮男等, 設局撰集. 略成肯綮, 値丁酉之亂, 諸醫星散, 事遂寢. 厥後先王又敎許浚獨爲撰成, 仍出內藏方書五百餘卷, 以資考據. 撰未半而龍馭賓天. 至聖上位之三年庚戌, 浚始卒業而投進. 目之曰東醫寶鑑, 書凡二十五卷. 上覽而嘉之, 下敎曰, 陽平君許浚, 曾在先朝, 特承撰集醫方之命, 積年覃思. 至於竄謫流離之中, 不廢其功, 今乃編帙以進. 仍念先王命撰之書, 告成於寡昧嗣服之後, 予不勝悲感. 其賜浚太僕馬一匹, 以酬其勞. 速令內醫院設廳鋟梓, 廣布中外. 且命提調臣廷龜撰序文, 弁之卷首, 臣竊念大和一散, 六氣不調, 癃殘扎瘥, 迭爲民災, 則爲之醫藥, 以濟其夭死, 是實帝王仁政之先務, 然術非書則不載, 書非擇則不精, 採不博則理不明, 傳不廣則惠不布. 是書也該括古今, 折衷群言, 探本窮源, 挈綱提要, 詳而不至於蔓, 約而無所不包. 始自內景外形, 分爲雜病諸方, 以至脈訣症論, 藥性治法, 攝生要義, 鍼石諸規, 靡不畢具. 井井不紊, 卽病者雖千百其候, 而補瀉緩急, 泛應曲當. 蓋不必遠稽古籍, 近搜旁門, 惟當按類尋方, 層見疊出. 對證投劑, 如符左契. 信醫家之寶鑑, 濟世之良法也. 是皆先王指授之妙算, 我聖上繼述之盛意. 則其仁民愛物之德, 利用厚生之道, 可謂前後一揆, 而中和位育之治, 亶在於是. 語曰, 仁人之用心, 其利博哉, 豈不信然矣乎. 萬曆辛亥孟夏.

『月沙先生集』卷39, 序, 東醫寶鑑序

이 사료는 1610년(광해군 2년) 허준(許浚, 1546~1615)이 지은 『동의보감(東醫寶鑑)』의 서문으로 당시 제조(提調)로 있던 이정귀(李廷龜, 1564~1635)가 썼다. 『동의보감』 편찬은 1596년(선조 29)에 시작되었으나 정유재란으로 중단되었다가, 14년 후인 1610년(광해군 2) 8월 6일에 완성되어 1613년 11월에 인쇄⋅간행되었다.

동의보감』의 편찬 배경은 그 서문에서 잘 나타난다. “의학에 관한 서적들이 오래 전부터 있었으나 ……(중략)…… 논설이 분분하고 이론이 복잡할 뿐만 아니라 각기 다투어 자기의 학파를 세웠기 때문에 의학책은 더 많아지고 의술은 더욱 애매해져 ……(중략)…… 세상의 서투른 의사들이 깊이 이치를 알지 못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거나 또는 선례에 얽매여서 변통할 줄 몰라 ……(중략)…… 사람을 살리려고 하다가 죽이는 일이 많았다”고 할 정도로 임상 처방에 큰 혼란이 초래되고 있었다. 중국 의학의 수용은 조선 의학의 수준을 끌어올리고 그 내용을 풍부하게 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나, 지나치게 많은 중국 의학 서적이 수입되어 이전의 의서들과 함께 실제 임상 처방에서 큰 혼란을 초래했던 것이다. 『동의보감』 편찬은 조선의 의학과 중국의 의학 전통을 통합하여 이 같은 혼란 상황을 다스리기 위해 이루어졌다.

책의 전체적인 체제는 내과에 관계되는 내경편(內經篇) 4권, 외과에 관한 외형편(外形篇) 4권, 유행성병⋅급성병⋅부인과⋅소아과 등을 합한 잡병편 11권, 약제학⋅약물학에 관한 탕액편(湯液篇) 3권, 침구편(鍼灸篇) 1권, 목차편 2권 등 총 25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경편은 내과에 딸린 질병 등을, 외형편은 외과적 질병을 기록하였다. 잡병편은 각종 진단법으로부터 내과 질환과 외과 질환들을 섞어 기록하였으며, 부인과와 소아과를 따로 첨부하였다. 탕액편은 각종 탕약의 사례를 소개하고, 약부 140여 부에 우리의 속명을 붙여 본초학적 지식을 간략하게 기록하였다. 침구편은 각종 침법 등을 소개하고, 임상의학의 각 과와 함께 약물학 및 침구술에 관한 일반적인 지식을 적었다. 내형, 외형, 잡병, 탕액, 침구 등 5개의 주제 아래 질병에 따라 항목을 정하고, 각 항목 아래에는 그에 해당하는 병의 설명과 약방들을 출전과 함께 자세히 열거하여 그 질병에 관한 고금의 처방을 분명하고 간략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각 병증의 항과 목이 주로 증상을 중심으로 열거되어 환자들이 말하는 증상을 쉽게 식별할 수 있도록 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동의보감』은 실사구시의 실증적 자세와 명민한 관찰력, 그리고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토대로 허준 본인의 풍부한 임상 경험을 살려 기본적인 의학 지식이 임상에 직결되도록 하였다. 획기적 조선 의학과 중국 의학의 전통을 총집성한 통합 의학 체계를 만들어 낸 것이다. 『동의보감』 편찬 당시 중국에서도 이와 같은 의학의 통합⋅정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동의보감』은 동방 의학을 총집성하고 우리 민족의 한의학을 정립시키면서 체계적이고 실용적인 의술의 구체화를 이룩하였다고 평가 받고 있다. 한편 조선 의학의 독자적 전통을 강조한 허준의 자부심은 조선 후기 이제마(李濟馬, 1838~1900)에게로 이어졌으며, 후대에 『동의보감』을 원전으로 하는 많은 의서가 간행되어 우리 의학의 전통을 풍부하게 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동의보감〉의 유학적 배경에 대한 이해」,『동양고전연구』15,성호준,동양고전학회,2002.
저서
『한의학에 미친 조선의 지식인들-유의열전-』, 김남일, 들녘, 2011.
『한국의학사』, 김두종, 탐구당, 1966.

관련 이미지

동의보감

관련 사이트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링크연결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