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조선 후기문화서양 문물의 수용과 과학의 발달

배다리의 설치

주교지남(舟橋指南)

배다리의 제도는 『시경(詩經)』에도 실려 있고, 역사책에도 나타나 있으니, 그 제도가 시작된 지는 벌써 오래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지역상 외지고 고루하여 지금까지 시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내가 반드시 시행하고자 하여, 묘당(廟堂)에 자문을 구하고 부로들에게까지도 탐문하기를 근면하고도 간절히 하였다. 그러나 명에 응하여 일을 시행함에 ‘분수명(分數明)’ 세 글자를 마음속에 새기고 일을 착수한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요량(料量)이나 배포(排布)가 주먹구구식의 서툰 계책에서만 나와, 강물의 너비는 총 400~500발[把]이 되고, 배의 척수는 총 80~90척이면 되고, 재목은 총 4000~5000그루[株]면 되고, 모역(募役)은 총 500~600명이면 된다는 생각으로 일을 진행하며 계획을 세우고는, 마침내 사전의 치밀한 분석은 다시 해 보지 않았다. 조치를 취함에 미쳐서 배를 연결할 경우 배 한 척을 끌어다 그 높낮이를 비교해 보고는 서로 맞지 않으면 물려 보내므로 배 한 척을 연결하는 데 거의 한나절이 소비되고, 다리를 제조할 경우 100척을 매어 놓고 배치되길 기다렸다가 남으면 돌려 보내므로 100척의 배가 폐업을 하는 기간이 수개월이나 되고, 나무를 켜는 것은 많은 고을에 독촉하므로 고을과 백성이 곤란을 겪고 있다. 역정(役丁)의 경우 군교(軍校)에게 분부하여 제 마음대로 감독하도록 하므로, 헛된 고함으로 꾸짖을 줄만 아니, 어찌 몰래 농간질을 하는 일이 없겠는가. 잔디를 깔 경우 작은 일이라는 핑계만 대고 전혀 유의를 하지 않고, 선창(船艙)의 경우 명색은 규례를 상고하여 보았다고 하나, 물 위의 파랑을 한 번 만나 보고서야 비로소 야단법석들이다. 이러고도 일을 잘 기획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배다리의 설치는 매년 거둥의 필수 사항이니, 이제는 마땅히 한 벌의 확고한 법식을 강정(講定)하여야 하는데, 그 요체를 강구하여 보면 ‘분수명’이라는 세 글자에 불과하다. 한가로운 여가를 이용하여 부질없이 아래와 같이 적어서, 일을 맡은 자가 배다리의 제정을 품지(稟旨)하여 오기를 기다리는 바이니, 위로는 경비의 사용에 보탬이 되고 아래로는 민폐를 덜게 될 것이다. 어찌 옛 법도를 본받는 효과뿐이랴. 일거양득이라는 말이 바로 배다리를 두고 하는 말이리라. 경술년(1790, 정조 14) 맹추(孟秋)에 쓰다. ……(하략)……

『홍재전서』권59, 잡저6, 주교지남

舟橋之制, 載於詩, 見於史, 昉之久矣. 我國僻陋, 至今未之行, 予於是決意欲行之, 諮于廟堂, 詢及父老者, 非不勤且懇矣. 對揚之地, 未嘗以分數明三字, 留心著手, 故其料量排布, 只出於麤拳闊籌, 以水則摠爲之四五百把, 以船則摠爲之八九十隻, 以材木則摠爲之四五千株, 以募役則摠爲之五六百名, 行且謀之, 遂不復更事綜核. 及其措置也, 結船則進一船, 較其高低, 不合則退之, 一船聯結, 殆費半日, 造橋則繫百艘而待其排比, 有餘則退之, 百艘之廢業, 殆爲數月, 斫材則催督諸路, 民邑受困. 役丁則吩咐軍校, 任渠董督, 惟知有虛聲唪喝, 豈能無暗地姦僞. 鋪莎則諉以細節, 都不置意, 船艙則名雖按例, 一遇水上之添波, 始乃棼棼聒聒. 若是而其可曰善料事乎. 舟橋之設, 爲每歲幸行之須, 則一副金石之式, 趁今合有講定, 究其要, 不過曰分數明三字. 燕閒之暇, 漫錄如左, 以待有司者稟旨, 舟橋之制定, 則上以補經用, 下以除民弊. 豈直師古云爾乎哉. 一擧而有兩得, 舟橋之謂也. 庚戌孟秋, 書. ……(下略)……

『弘齋全書』卷59, 雜著6, 舟橋指南

이 사료는 정조(正祖, 재위 1776~1800)가 배다리에 대한 각종 사항을 기록한 『주교지남(舟橋指南)』으로, 1책 37장의 필사본이다. 정조는 봄가을에 온양온천과 선릉(宣陵)⋅정릉(靖陵)⋅장릉(章陵)에 갈 때는 노량진에, 헌릉(獻陵)⋅영릉(英陵)⋅영릉(寧陵)에 갈 때는 광나루에 배다리를 놓았는데, 이에 대한 여러 가지 것들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정조는 1789년(정조 13년) 아버지 사도세자, 곧 장헌세자(莊獻世子)의 무덤을 현륭원(顯隆園)으로 격상시키며 현재의 수원으로 천묘하고 수원 화성(華城)이 지어지는 상황을 보기 위한 왕래 방법으로 배다리를 자주 이용하였다.

정조는 1790년(정조 14년) 2월부터 1800년(정조 24년)까지 11년간 모두 12차례에 걸쳐 현륭원을 참배하는 능행을 거행하였는데, 매년 수원까지 능행하기 위해서는 한강을 건너야 했기에 배다리를 설치해야만 했다. 이를 위해 사도세자의 무덤을 현륭원으로 옮긴 직후 종래의 부교(浮橋)를 운영하는 데 드는 노고와 경비를 줄이기 위해 비변사와 논의해 주교를 운영하기로 하고, 그 주무관서로 주교사(舟橋司)를 설치해 주교절목(舟橋節目)을 작성하게 하였다.

주교사란 배다리의 설치를 주관하는 관청으로서, 호남 지방의 조운 업무도 함께 담당하였다. 아울러 정조정약용(丁若鏞, 1762~1836)에게 배다리의 설계를 지시하였다. 정약용은 1789년 3월 정조 앞에서 치른 식년시에 급제해 초계문신의 칭호를 얻었는데, 바로 그해 어명을 받들어 이전과는 달리 매우 효율적인 배다리를 설계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주변을 크게 놀라게 하였다. 이처럼 배다리 제도를 정비한 정조의정부에 명하여 그 세목을 만들어 올리게끔 하였으나, 의정부에서 만들어 온 세목이 마음에 들지 않자 직접 생각을 짜내 1790년 『주교지남』이란 책을 간행하고 그대로 시행하게 하였다.

『주교지남』에는 배다리를 놓을 지형 선택에서부터 배의 선택, 사용되는 배의 수효 및 배의 높이, 배를 연결하는 법, 난간의 설치 등 배다리에 관한 모든 세부 사항이 상세히 적혀 있다. 배다리를 설치하는 데 필요한 제반 조건과 시설을 15개 항목으로 세분해 기재했고, 배다리를 설치할 때 훈련도감의 배나 조운선⋅사선(私船)이 동원됨으로써 발생하는 폐단 등 운영상의 문제점과 그 해결 방안까지 기록하였다.

특히 이전 시대와 비교해 당시의 배다리 설치가 과학적이면서도 경제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예전에는 배다리를 설치할 때마다 큰 배를 물가에 집채처럼 몰아 선창을 세워서 공역과 비용은 아주 많이 소요되었으나 배다리 철거 시 이를 함께 헐어 버렸는데, 당시에는 강가의 잡석들을 모아 물고기 비늘처럼 연달아 축대를 높이 쌓은 다음 석회로 틈을 메워 영구히 사용할 수 있는 선창을 만들었다. 또 배다리에 사용될 배가 몇 척이나 필요한지 알기 위해 노들나루 양쪽의 거리를 정확히 재었다. 그 결과 190 발(把)로 측정되었는데, 요즘 길이로 환산하면 약 336m 정도였다. 따라서 한강을 직선으로 잇는 데 필요한 배는 계산을 통해 모두 36척을 사용하였고 그 외 나머지 작은 배들을 배다리의 왼쪽과 오른쪽에 나누어 세워서 배다리를 끈으로 잡아매거나 호위하는 구실에 쓰이도록 하였다. 연산군 때 배다리 건설에 800척의 배가 소요된 것에 비하면 매우 경제적인 방법이었다.

배다리 건설에 사용되는 기둥이나 난간, 판자 등의 재료들을 상하지 않게 보관하는 창고를 노량 근처에 별도로 지어, 다음 배다리 건설에 재활용할 수 있게 했으며, 심지어는 보행자들의 심리적 안정감까지 고려하여 배다리가 시작하는 양쪽에 홍살문을 설치하고 다리에 흙을 까는 등 여러 장치를 설치한 흔적이 엿보인다.

정조 대를 포함한 조선 후기에 과학이 발달하게 된 것은 정약용과 같은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서양의 과학기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노력들이 계속 이어진 탓이다. 정약용정조가 청으로부터 5000여 권의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을 사들여 오자 그 가운데 하나인 『기기도설』을 참고하여 거중기 등 새로운 기계를 만들어 화성을 축조하는 데 이용하였고, 사료에서 보듯 한강에 가설할 배다리도 설계하였다. 이것은 이전에 이익(李瀷, 1681~1763)이 서양 과학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지구는 둥글며, 따라서 지구 어느 곳에도 중심이 없다는 지심론(地心論)을 주장하고, 홍대용이 지전설(地轉設)과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무한 우주론을 주장한 것과 같은 맥락의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서양인들과의 직접적인 접촉보다는 한역된 서양 과학서를 통한 간접적인 접촉으로서 서양 과학기술의 수용과 이해라는 측면에서는 그리 높은 수준이라고 할 수 없었다. 또한 서양의 과학기술들이 천주교와 함께 전래되었기 때문에 천주교를 탄압하는 사회 분위기도 과학에 대한 관심을 떨어뜨리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조선후기 한성부 준천의 시행」,『서울학연구』11,염정섭,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1998.
「주교사 설치와 변천」,『향토서울』36,이현종,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1979.
저서
『조선후기선운업사연구』, 최완기, 일조각,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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