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조선 후기문화서양 문물의 수용과 과학의 발달

거중기의 발명과 화성 축조

신이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활차(滑車)를 이용하여 무거운 물건을 운반하는 것은 두 가지 편리한 점이 있으니, 첫째는 사람의 힘을 줄이는 것이고, 둘째는 무거운 물건을 떨어뜨리지 않고 안전하게 운반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힘을 줄이는 것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대개 일반 사람들이 무거운 물건을 들려면 반드시 힘과 무게가 서로 대등해야 비로소 들어서 운반할 수 있으니, 만약 1 00근(斤)의 무게라면 반드시 100근을 들 수 있는 힘이 있어야만 비로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방법은 다만 활차 한 대만 사용하면 능히 50근의 힘을 가지고 100근의 무게를 들 수 있으니, 이는 힘을 반만 들이고도 100근의 힘을 완전히 해 내는 것입니다. 만일 활차 2대를 사용하면 능히 25근이 힘을 가지고 100근의 무게를 들 수 있으니, 이는 4분의 1 힘만을 가지고도 100근의 무게를 완전히 해 내는 것입니다. 세대, 또는 네 대를 증가함에 따라 그 힘이 이 비례로 증가하여, 이러한 예를 따라 매양 새 바퀴를 증가할 때마다 그 힘이 배로 늘어나니, 이는 이치가 그런 것입니다. 이제 위아래에 8개의 바퀴를 달면 25배의 힘이 나오니 이야말로 대단합니다.

무거운 물건을 떨어뜨리지 않고 안전하게 운반하는 것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대개 물건의 경중은 일정하지 않고 새끼줄의 크기는 한정이 있는데, 일정한 새끼줄로 일정하지 않은 중량을 든다면 세가 오래갈 수 없으며, 우연히 실수하게 되면 무겁고 큰 물건이 반드시 떨어져 부상당할 염려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위아래에 8개의 바퀴를 다는 방법을 사용하면 새끼줄 하나가 여러 번 감기어 그 힘이 서로 연해져서 한 가닥의 외줄이 두 가닥의 줄과 맞먹으며, 8번 도는 힘에 의하여 수만 근의 무게를 들고도 남는 힘이 있으니, 어찌 떨어뜨릴 위험이 있겠습니까?

또 무릇 무거운 물건이 수직으로 되어 밑으로 내려올 때에 떨어지는 속도가 빠르고 느림은 그 중량이 많고 적음에 달려 있으며, 떨어지는 시간차 역시 중량에 달려 있는바, 만일 크고 무거우면 떨어지는 속도가 더욱 빠릅니다. 그러나 이제 8개의 바퀴를 다는 방법을 사용하면 새끼줄이 여러 번 감겨져 있어 갑자기 풀리지 못할 것이니, 혹 실수하는 경우가 있다 해도 반드시 점차 풀리게 되어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붙들어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릇 활차를 사용해서 가장 무거운 물건을 운반할 때에는 반드시 고패 시렁[轆轤]을 만들어야만 그 힘을 배가시킬 수 있습니다. 가령 두 대의 활차가 있는 경우, 각각 4개의 바퀴를 달면 40근을 들 수 있는 힘으로 1000근의 무게를 들어 올릴 수 있으며, 여기에 다시 고패 시렁 자루[轆轤架]를 만들되 고패 시렁의 자루가 고패 기둥의 지름에 비하여 10분의 1쯤 되게 하면 40근을 들 수 있는 힘으로 2만 5000근의 무게를 들어 올릴 수 있습니다.【십자 모양의 막대를 사용할 때 막대의 길이가 녹노 기둥과의 길이 비율이 이와 같다.】

그러므로 고패 시렁과 활자가 서로서로 힘을 내어 능히 무거운 무게를 들어 올리는 것입니다. 위에서 논한 힘이 배가되는 비례는 모두 별도의 전문(專門)에 자세히 적혀 있으므로 일일이 아뢰지 않겠습니다.

이 방법은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는 데는 가장 간단하고 보잘것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힘을 줄이는 것은 상당합니다. 만일 크고 작은 바퀴가 서로 통하고 서로 튕기는 방법을 이용하면 천하에 무거운 물건이 없습니다. 또 나사를 돌려서 저것과 이것이 서로 튕기는 방법을 이용하면 조그마한 어린아이의 손 하나 힘으로 수만 근의 무게를 들어 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성을 쌓는 데에는 석재가 그리 무겁거나 크지 않으니, 닭을 잡는 데 소를 잡는 연장을 쓸 필요는 없습니다.

여유당전서』제1집 제10권 문집, 설, 총설

臣伏念, 用滑車運動重物, 其便有二, 省人力一也, 重物不致于崩墜二也. 論省人力. 蓋凡人之起重, 必力與重相等, 方得起動, 如一百斤之重, 必須一百斤之力, 始足以當之. 今法止用一具滑車, 則能以五十斤之力, 起一百斤之重, 此以力之半, 抵重之全也. 若用二具滑車, 則能以二十五斤之力, 起一百斤之重, 此以力之四分之一, 抵重之全也. 三具四具之遞加其力, 皆倣此例, 每加新輪, 遞加倍力, 其理則然也. 今此上下八輪之倍力, 爲二十五倍, 斯亦雄矣. 論重物不致于崩墜. 蓋物之輕重不等, 繩之圜徑有限, 以一定之繩, 閱不齊之重, 其勢不能持久, 偶有脫手, 重大之物, 必崩墜觸傷. 今用上下八輪之法, 則一繩屢纏, 其力相連, 此一股單繩, 能當二股之繩, 八重之力, 以起數萬斤之重, 而猶有餘力, 豈有崩墜之理乎.

◦ 又凡重物之垂壓向下者, 其墜勢之緩急, 隨其體重之多少, 其時刻之幾何,係乎斤兩之幾何, 物若鉅重則其墜勢益急, 然今用八輪之法, 則繩旣屢纏, 不能驟開, 設有脫手之患, 必有先後漸次之頃, 可以扶救也. 凡用滑車運動最重之物, 必須轆轤架, 所以倍加其力也. 假有兩對之滑車于此, 各有四輪, 則四十斤之力, 能動一千斤之重, 若又添轆轤架, 而其轆轤柄于其轆轤柱之徑, 爲十與一之比例, 則以四十斤之力, 能動二萬五千斤之重.【用十字橛, 則橛之長于轆轤柱之徑, 與此同率.】 故轆轤架與滑車, 互相爲力, 所以能起重也. 右所論倍力之比例, 具有專門, 不具陳也. 此法在起重家, 最爲粗淺者. 然省人力亦多. 若用大小輪相通相撥之法, 則天下無重物矣. 至於螺旋轉彼此相撥之法, 亦可使小孩一手之力, 起數萬斤之重. 然今此築城石材, 無甚重大, 割雞無用牛刀也.

『與猶堂全書』第1集 第10卷 文集, 說, 總說

이 사료는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의 저술을 총정리한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 수록된 「기중도설(起重圖說)」 총설(總說)이다. 정약용은 수원 화성(華城)을 쌓을 때 직접 기중기(起重機)를 고안하여 공사가 수월하게 진행되도록 하였는데, 이 「기중도설」은 기중기의 원리를 간략하게 설명한 것이다.

정약용의 「기중도설」은 한마디로 ‘무거운[重] 물건을 일으켜[起] 세우는 방법을 그림[圖]으로 설명한[說] 책’으로 이러한 원리를 바탕으로 제작된 중기는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하여 물체를 들어 올리게 되어 있다. 실제 화성의 성곽을 쌓는 공사에는 왕실에서 직접 제작한 거중기 1대가 사용되었는데 위에 네 개, 아래에 네 개의 도르래를 연결하고 아래 도르래 밑으로 물체를 달아매고, 뒤 도르래의 양쪽으로 잡아당길 수 있는 끈을 연결하여 이 끈을 물레에 감아 돌림에 따라 도르래에 연결된 끈을 통해 물체를 위로 들어 올리도록 했다.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도 완전히 조립된 모습의 전체 그림과 각 부분을 분해한 그림이 실려 있어 이를 확인해 볼 수 있다.

정조는 청으로부터 5000여 권의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을 사들인 뒤, 그 중 스위스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테렌츠 장(Terrenz Jean, 鄧玉函)이 16세기까지의 서양 과학 기술을 최초로 중국에 소개한 『기기도설(奇器圖說)』을 직접 읽은 후, 이를 정약용에게 소개하였다. 이후 정약용은 31세 때부터 『기기도설』 등을 참고하여 「성설(城說)」과 「기중도설」을 쓰게 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유형거(遊衡車)거중기(擧重機)를 만들어서 사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1789년(정조 13년) 한강에 배다리를 놓을 때와 1792년(정조 16년) 수원 화성을 축조할 때 경비를 크게 아끼는 등 공사를 수월하게 하였다.

원래 정조의 권유로 정약용이 참고하게 되었다는 『기기도설』은 역학(力學)의 기본원리를 소개하고 특히 그 응용 기구와 장치를 상세히 설명하는 책이었다. 작은 힘으로 무거운 것을 들어 올리거나 운반하고, 또 낮은 곳으로부터 높은 곳으로 물을 길어 올리는 장치 등이 50여 개 그림과 함께 설명되어 있었으나, 소개된 10개의 기중 장치가 어떤 것은 너무 조잡하고 또 어떤 것은 당시 조선에서는 제작하기 어려운 구리를 꼬아 만든 줄을 이용해야 하는 것도 있어 제작에 어려움이 많았다. 다만 『기기도설』에서는 기계 작동의 원리에 대한 설명, 특히 도르래의 효용 가치에 대해 상술하였으므로, 정약용은 이 도르래의 원리에 큰 관심을 가지고 주목하면서 보다 독창적인 장치로서 개선하였던 점이 보인다.

정약용의 이러한 관심과 업적은 조선 후기 실학파의 이용후생적(利用厚生的) 학풍을 단적으로 알려 주는 예로, 정약용은 기술의 진보가 사람들의 삶을 윤택하게 한다고 확신하고 기술개발에도 앞장서서 노력하였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서양 기술을 이론적으로만 받아들인 18세기의 실학자들과는 달리 이를 실천에 옮기고자 노력하였던 것이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조선후기 화성 성역에서의 물자확보와 부역노동」,『진단학보』93,조병로,진단학회,2002.
「조선후기 화성축조와 향촌사회의 제양상; 정조대의 수원지방문제와 《관수만록》을 중심으로」,『국사관논총』30,최홍규,국사편찬위원회,1991.
저서
『한국과학기술사』, 전상운, 정음사, 1965.
『실학파와 정다산』, 최익한, 청년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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