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조선 후기문화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꼭두각시 놀이와 탈놀이

내 나이 겨우 열 살,

문밖 길도 나가지 않고.

책상머리에서 부지런히 공부하여,

창살 너머로 뜨는 아침저녁을 보내네.

……(중략)……

돌연히 뛰쳐나온 얼굴이 안반(案盤) 같은 놈,

대성일갈로 사람을 겁주는데,

머리 흔들고 또 눈을 굴려,

왼쪽을 바라보고 다시 오른쪽으로 굴린다.

부채로 얼굴 가리고 홀연 사라져,

사납게 노여움을 꾸며 보이네.

휘장이 획 거치더니,

춤추는 소맷자락 어지럽게 돌아오다!

홀연 사라져 자취도 없는데.

더벅머리 귀신 낯바닥 나타나,

두 놈이 방망이 들고 치고받고,

펄쩍펄쩍 잠시도 서 있지 못하더니,

홀연 사라져 자취도 없는데.

……(중략)……

노장 스님 어디서 오셨는지?

석장 짚고 옷소매도 넉넉하다.

구부정 몸을 가누지 못하고,

수염 눈썹 하얀 백로 같다.

사미승 그 뒤를 따라오며,

연방 합장하고 배례하고.

힘이 쇠약해 바람에 따라 흔들,

넘어지기 몇 번이던고?

또한 젊은 계집 등장하니,

이 만남에 깜짝 반기며.

노흥을 스스로 억제하지 못해,

파계하고 청혼을 하더라.

광풍이 문득 크게 일어나,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를 즈음.

또 웬 스님이 크게 취해서,

고래고래 외치고 주정을 부린다.

……(하략)……

「남성관희자」

余年纔十歲

不出門前路

矻矻書几傍

一窓送朝暮

……(中略)……

突出面如盤

大聲令人怖

搖頭且轉目

右視後左顧

忽去遮面扇

猙獰假餙怒

巾帷倏披靡

舞神紛回互

忽然去無蹤

鬅髮鬼面露

短椎兩相擊

跳梁未暫駐

忽然去無蹤

……(中略)……

老釋自何來

拄杖衣袂裕

龍鍾不能立

鬚眉皓如鷺

沙彌隨其後

合掌拜跪屢

力微任從風

顚躓凡幾度

又出一少妹

驚喜此相遇

老興不自禁

破戒要婚娶

狂風忽大作

張皇而失措

有僧又大醉

呼號亦姿酗

……(下略)……

「南城觀戱子」

이 사료는 강세황(姜世晃)의 손자로 18세기 정조(正祖, 재위 1776~1800) 당시의 문인이었던 중암(重菴) 강이천(姜彛天, 1768~1801)이 열 살 때 지은 「남성관희자(南城觀戱子)」의 일부이다. 강이천은 1779년(정조 3) 열두 살 되던 해에 임금의 총애를 받고 궁궐에 출입하면서 응제시(應製詩)를 지어 올릴 만큼 어렸을 때부터 영민하였으나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젊은 나이에 생을 달리 하였다. 그런 그가 열 살 무렵 남대문 밖 애오개현방(懸房)에서 열렸던 꼭두각시놀음과 탈놀이를 보고는, 그 본 것을 한시로 읊은 것이 바로 ‘남대문 밖에서 본 놀이’라는 뜻의 「남성관희자」이다.

「남성관희자」를 이해하는 전제는 조선 후기 서민 문화의 활발한 전개이다. 첫째 조선 후기에는 도시민의 유흥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형태의 상업화 경향 속에서 시장이나 거리, 마을에서 노래를 부르고 그 대가를 받는 연예인적 형태가 나타나며, 둘째는 사료에서 볼 수 있듯 전문화되고 대형화된 직업적인 예인 집단의 등장이다.

연희 집단의 존재 형태와 시대적 변천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시기적으로 구분 짓는 것이 어렵지만, 적어도 18세기 전반까지는 서울 부근으로 줄타기, 꼭두각시놀음 따위의 흥행을 노리는 본산대 등이 존재했던 것이 분명하다. 한편 본래 국가 소속이던 음악 기관이 상업화되었던 것도 당시 탈춤 등의 서민 예술이 크게 유행하게 된 것에 대한 전제로서 대답될 수 있다. 즉, 장악원(掌樂院)이나 5군영(五軍營)의 군악대가 그것인데, 장악원은 원래 종묘 제례나 임금, 고급 관료들의 연회 등 국가 행사의 음악적 수요를 위한 것이었으나 조선 후기로 들어서며 민간의 음악 수요에도 부응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5군영의 음악대 경우에는 다소 시정적 감각을 띠어서, 이들이 연주했던 군악 중 세악(細樂)은 다분히 상업적 흥행을 벌이기까지 하였다. 이와 같은 양상은 당시 급격하게 팽창한 인구와 그에 따른 수요 창출이 증가하면서 나타나게 된 현상으로 보인다.

「남성관희자」는 총 120구(句)의 오언고시(五言古詩) 장편 시이다. 도입부에서 어린 강이천은 제한된 공간 속에서 지루하고 권태로운 일상을 호소하며 놀이 문화와 단절된 사대부 집 학동(學童)의 삶을 보여 준다. 이어 남대문 밖 자신의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연극패들이 놀이판을 벌이는 모습을 소개하면서 당시 놀이마당의 현장과 대비하고 있다. 이 시의 전체적인 구성은 크게 꼭두각시놀음과 가면극 두 가지로 나뉘어 진행되는데, 그 절정은 연희(演戱) 장면의 생동감 있는 묘사에 있다.

먼저 꼭두각시놀음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묘사가 아주 뛰어나다. 또한 등장인물과 장면이 바뀔 때마다 “홀연 사라져 자취가 없다”라는 말이 반복되는 것을 통해 꼭두각시놀음의 각 장면이 매우 빠르게 전환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당시 현장의 긴장감까지 전달되고 있다. “낯짝이 안반(案盤) 같은 놈”은 꼭두각시 얼굴을 표현한 것인데, 바로 얼굴이 넓적한 박첨지를 말한다. 이 인형이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홀연 사라지는 모습은 오늘날의 꼭두각시놀음에서 박첨지가 퇴장하는 방식과 일치한다. 꼭두각시놀음은 내용과 주제 면에서 가면극과 비슷하나 꼭두각시 인형을 놀려 연행한다는 독자성을 가지는 것이 특징이다.

시의 뒷부분 가면극의 장면을 묘사한 부분에서는 상좌, 노장 스님, 소매, 취발이, 샌님, 포도부장, 거사, 사당, 할미 등 여러 인물이 가면을 쓰고 나온다. 오늘날의 양주별산대놀이나 봉산탈춤과 동일한 배역이 상당수 발견되는 점으로 보아 강이천은 애오개의 본산대(本山臺) 놀이를 구경한 것으로 보인다.

이 사료에 제시된 노장 과장(科場)은 양주별산대놀이와 하회, 봉산 탈춤 등 거의 모든 우리의 가면극에서 등장하는 과장 중 하나로 가장 인기 있는 연희이며, 늙은 파계승이 젊은 계집에게 반하여 청혼하는 내용이다. 뒷부분에서 술에 취한 중, 즉 취발이가 등장해 주정하는 장면도 오늘날의 가면극에서 동일하게 등장하는 장면이다.

본산대 놀이는 양주별산대놀이나 송파별산대놀이 등이 갖고 있는 상좌춤과장, 노장과장, 샛님과장, 거사와 사당춤과장, 영감과 할미과장 등 5개 과장을 모두 포함하고 있어 이들 별산대놀이가 본산대 놀이에서 파생되었으며, 이로써 국내 가면극의 계통이 크게 두 개로 나뉘었음을 알 수 있다. 본산대 놀이에서 갈려 나간 것이 양주별산대놀이와 송파별산대놀이, 봉산탈춤 등 황해도 가면극, 수영야류 등 야류와 오광대 등이고 다른 하나는 마을굿이었던 동제에서 나온 마을 굿 계통의 가면극으로 하회별신굿과 강릉관로가면극이 그 예이다.

이들은 조선 후기에 완성되어 꼭두각시놀이와 함께 오늘날까지 전승되는 대표적인 극의 장르로 민속극으로 계승되었다가 1930년대 그 대사가 채록되고, 연구되어 1964년 이래 그 중 13종목의 가면극과 꼭두각시놀음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꼭두각시놀음의 대립양상과 사회의식」,『한국민속학』12,임재해,민속학회,1980.
「조선후기 민속놀이 연구」,『논총』59-1,조성환,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1957.
저서
『민속문화의 탐구』, 임동권, 민속원, 2001.
편저
「연극」, 이두현, 국사편찬위원회,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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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별산대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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