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조선 후기문화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김정희의 서예론

서법은 「예천명(醴泉銘))」이 아니면 손을 들여 놓을 수가 없다. 이미 조이재(趙彝齋) 때로부터 「예천명」을 해법(楷法)규얼(圭臬)로 삼았으니 그때에 어찌 우군서(右軍書)의 『황정경(黃庭經)』⋅『악의론(樂毅論)』이 없었으랴마는 (친필이) 다 돌고 돌면서 변하고 잘못되어 준칙을 삼을 수가 없으니, 옛 석탑(石搨)에서 진본 글씨를 취하는 것만 못하다. 이 때문에 머리를 숙이고 「예천명」⋅「화도사비(化度寺碑)」 등 비석을 좇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화도사비」는 지금 원래의 비석은 없고 송나라 때 탑본한 범씨서루본(范氏書樓本) 같은 것은 우리나라 사람이 더욱 얻어 볼 수가 없다. 오히려 예천명의 원석 탑본이 그대로 남아 있으니, 설사 많이 낡고 부스러졌다 해도 이것이 아니면 종요(鍾繇, 151~230)삭정(索靖, 239~303)의 옛 법도를 거슬러 올라갈 수 없다. 어찌하여 이를 버리고 딴 것을 구한단 말이냐.

네가 말한 바 “겨우 두어 글자를 쓰면 글자 글자가 따로 놀아 마침내 하나로 귀결되지(歸一) 않는다. ”는 것은 곧 네가 입문하는 진보된 경지이다. 모름지기 마음을 가라앉히고 힘써 따라 꾹 참고 이 한 관문을 넘어서야만 쾌히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니, 절대 이것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서 물러나지 말고 더욱더 공덕을 쌓아 나가야 할 것이다. 나는 60년이 되어도 오히려 하나로 귀결되지 못하는데 하물며 너는 초학자가 아니더냐. 그러나 나는 너의 이 말을 들으니 매우 기쁘며 반드시 얻는 바가 이 한 마디 말에 있다고 생각한다. 절대 범연히 보고 부질없이 지내지 말아야 묘체가 된다.

예서(隷書)는 바로 서법의 조가(祖家)이다. 만약 서도에 마음을 두고자 하면 예서를 몰라서는 아니 된다. 그 법은 반드시 방경(方勁)함과 고졸(古拙)함을 높이 치는데, 그 고졸한 곳은 또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한나라 예서[漢隷]의 묘미는 오로지 고졸한 곳에 있다.

「사신비(史晨碑)」1)는 진실로 좋으며 이 밖에도 「예기비(禮器碑)」⋅「공화비(孔和碑)」⋅「공주비(孔宙碑)」 등의 비가 있다. 그러나 촉도(蜀道)2)의 여러 석각이 아주 예스러우니 반드시 먼저 이로 들어가야만 속된 예서체나 평범한 팔분체(八分體)3)의 번드르르한 자태와 속된 기운을 없앨 수 있다. 더구나 예법은 가슴속에 청고고아(淸高古雅)한 뜻이 들어 있지 않으면 손에서 나올 수 없고, 가슴속의 청고고아한 뜻은 또 가슴속에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4)가 들어 있지 않으면 능히 팔 아래와 손끝에 발현되지 않으며, 또 심상한 해서 같은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모름지기 가슴속에 먼저 문자향과 서권기를 갖추는 것이 예서 쓰는 법의 근원이며, 예서를 쓰는 신묘한 비결(神訣)이 된다.

근일에는 조지사(曺知事), 유기원(兪綺園) 같은 여러 사람들이 예서 쓰는 법에 깊다. 다만 문자기(文字氣)가 적은 것은 안타깝다.이원영(李元靈)은 예법이나 화법이 다 문자기가 있다. 시험 삼아 이를 살펴보면 그 문자기가 있는 것을 해득할 수 있으니, 그런 뒤에 해야 할 것이다. 집에 소장한 예첩이 자못 구비되어 있으니 「서협송(西狹頌)」5) 같은 것은 촉도(蜀道)의 여러 석각 중에서도 매우 좋은 것이다.

우리나라의 난 그림은 대가 끊어져 오래도록 작가가 없었다. 다만 살펴보건대 우리 선묘(宣廟, 선조)의 어화(御畫)는 하늘이 내린 솜씨로서, 잎 그리는 방식과 꽃의 품격이 정소남(鄭所南)의 방법과 흡사하다. 대개 그때 송나라 사람의 난초 그리는 법이 우리나라에 전해졌는데 역시 어화도 그를 옮긴 것이다. 정소남의 그림은 역시 중국에도 드물게 전하며 근래에 (작가들이) 익힌 것은 또 원(元)⋅명(明) 이후의 방법이다.

비록 그림에 능한 자는 있으나 반드시 다 난(蘭)에 능하지는 못하다. 난은 화도(畫道)에 있어 특별히 하나의 격을 갖추고 있으니, 가슴속에 서권기(書卷氣)를 지녀야만 붓을 댈 수 있는 것이다. “봄은 무르익어 이슬은 무겁고 땅은 따뜻하여 풀은 돋아나며 산은 깊고 해는 긴데 사람은 고요하고 향기는 뚫고 든다. ” 이 한 조(條)는 조이재의 말이다.

옛사람은 난초를 그리되 한두 장에 지나지 않았으며 일찍이 다른 그림같이 여러 폭을 연대어 만든 일이 없다. 이는 우격다짐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세간에서 난 그림을 요청하는 자들은 이 경지가 극히 어렵다는 것을 모르고서 혹은 많은 종이로, 심지어는 팔첩(八疊)을 무리하게 청하는 자도 있는데, 다들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사양한다.

『완당집』권7, 잡저, 서시우아

1)후한 시대인 169년에 세운 비이다. 노(魯)나라의 승상 사신(史晨)이 공자묘에 성대하게 제사를 지낸 것을 기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2)중국 삼국시대 촉나라의 영토였던 촉(蜀) 땅, 곧 지금의 쓰촨성(四川省)으로 통하는 험준한 길을 말한다.
3)예서(隷書)의 한 종류로서 예서(隷書)에서 2분, 소전(小篆)에서 8분을 취하여 만든 서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서의 복잡함이 상당 부분 해소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본래 예서가 특정 인물이 창작한 것이 아니라 진나라의 하급 관리들이 문서 기록의 효율성을 위해 전서의 복잡함을 간략하고 직선적인 형태로 수정하면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본다. 진나라 때부터 전한 중기까지 목간(木簡)에 자주 보이는 초기의 예서는 계속 글자가 정리되고 수정되어 후한의 팔분체가 되었다. 팔분체가 이전의 예서와 다른 점은 글자의 마지막 획을 삐침으로 표현하는 파책(波磔)이 생겼다는 점이다. 팔분체로 쓴 글자는 상하가 짧고 가로가 긴 예서의 특성에 파책이 더해지며 마치 여덟 팔(八) 자와 비슷한 모양을 띠는데, 팔분체라는 이름은 여기서 유래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4)‘문자의 향기’와 ‘서책의 기운’이라는 뜻으로, ‘좋은 책을 읽으면 기운이 솟는다’는 의미이다.
5)자연 암벽을 갈고 닦아 글씨나 그림을 새긴 마애(摩崖)의 하나이다. 중국 간쑤성(甘肅省) 룽난(隴南)에 있으며 한나라 예서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

書法非醴泉銘, 無以入手. 已自趙彝齋時, 以醴泉銘爲楷法圭臬, 其時豈無右軍書之黃庭樂毅論也, 皆轉轉翻訛, 不可準則, 不如原石搨取之眞蹟. 所以不得不俛首就醴泉化度等碑也. 化度今無原石, 如宋搨范氏書樓本, 非東人所可得見, 尙有醴泉之原石拓本無恙, 設有殘泐過甚, 非此無以上溯於鍾索舊規. 何以舍是他求也. 汝所謂纔書數字, 字字各出, 終不歸一云者, 是汝可以入門之進境處. 須潛心力追, 忍過此一關然後, 可以快得悟處, 切勿以此爲不成而退轉, 益加用工可也. 吾則六十年, 尙不得歸一, 况汝之初學者乎. 第汝此語, 吾甚喜之, 以爲必有所得, 在此一語. 切勿泛看漫過, 爲妙爲妙. 隷書是書法祖家. 若欲留心書道, 不可不知隷矣, 隷法必以方勁古拙爲上, 其拙處又未可易得. 漢隷之妙, 專在拙處. 史晨碑固好, 而外此又有禮器孔和孔宙等碑. 然蜀道諸刻甚古, 必先從此入然後, 可無俗隷凡分膩態市氣. 且隷法非有胷中淸高古雅之意, 無以出手, 胷中淸高古雅之意, 又非有胸中文字香書卷氣不能現發於腕下指頭, 又非如尋常楷書比也. 須於胸中先具文字香書卷氣, 爲隷法張本, 爲寫隷神訣. 近日如曺知事兪綺園諸公, 皆深不隷法, 但少文字氣, 爲恨恨處. 李元靈隷法, 畵法皆有文字氣, 試觀於此, 可以悟得其有文字氣, 然後可爲之耳. 家儲隷帖頗具, 如西狹頌, 是蜀道諸刻之極好者也. 吾東畵蘭, 絶無作者, 惟伏覩宣廟御畵天縱, 葉式花格, 似鄭所南法. 盖於時宋人蘭法, 流傳於東, 御畵亦以臨倣也. 所南畵, 中國亦罕傳, 近日所習, 又皆元明以後法耳. 雖有工於畵者, 未必皆工於蘭. 蘭於畵道, 別具一格, 胷中有書卷氣, 乃可以下筆. 春濃露重, 地煖草生, 山深日長, 人靜香透. 此條趙彝齋語. 古人寫蘭, 不過一二紙, 未甞連㡧累幅如他畵. 是不可强之者. 世之要蘭畵者, 不知此境之極難, 或以多紙, 至以八疊强索, 皆謝不能.

『阮堂集』卷7, 雜著, 書示佑兒

이 사료는 완당(阮堂)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시문집 『완당전집(阮堂全集)』에 수록되어 있는 「서시우아(書示佑兒)」이다. ‘우아(佑兒)’, 즉 ‘아들에게 써서 보이는 글’이라는 뜻으로, 예서(隷書)의 중요성과 서예가가 갖추어야 할 내면세계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학자이자 서화가인 김정희는 중국에서 금석문 감식법과 서도사(書道史) 및 서법(書法)에 대한 전반적인 가르침을 받았다. 특히 옹방강(翁方綱)의 서체를 따라 배우면서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 조맹부(趙孟頫)⋅소동파(蘇東坡)⋅안진경(顔眞卿) 등의 여러 서체를 익혔다. 다시 더 소급하여 한(漢)⋅위(魏) 시대의 여러 예서체(隷書體)에 서도의 근본이 있음을 간파하고 이를 본받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들 모든 서체의 장점을 밑바탕으로 해서 보다 나은 독창적인 길을 창출한 것이 바로 ‘졸박청고(拙樸淸高)추사체(秋史體)다. 이는 타고난 천품(天品)에다 무한한 단련을 거쳐 이룩한 고도의 이념미의 표출로서, 그의 글씨는 일정한 법식에 구애되지 않는 법식이 있었다.

김정희의 글씨는 중국 진나라 시대에 만들어진 예서(隷書)와 흘려 쓰는 행서(行書)가 대종을 이루었다. 그는 「서시우아」에서 특히 예서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는데, 예서는 서법의 조가(朝家)로서, 서도에 마음을 두고자 한다면 예서를 몰라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그는 예서의 진수를 피력하면서 서법의 조종(朝宗)으로 예서를 들었다. 무릇 서도에 뜻을 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까지 강조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김정희 서법의 특징이라고 하였다.

그는 또한 가슴속에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가 들어 있지 않으면 팔과 손끝에서 발현되지 않는다고 하여 ‘문자향, 서권기’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형식적으로 본다면 ‘문자향’이란 고전서의 임서(臨書)와 고비(古碑)의 문자 연구를 통해서 우러나오는 심미 의식을 말하고, ‘서권기’란 많은 독서와 학문을 통해서 형성되는 지성과 인품이 예술적 통찰로 승화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료에 제시된 문장은 단순히 고전서를 많이 임서하고 비문을 연구한 사람은 누구나 문자향을 지닐 수 있고, 독서를 많이 한 사람은 모두가 서권기를 가질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하기보다는 문인 정신의 요체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문자향, 서권기’는 문인으로서, 인간 지식의 유한성과 인간 생명이 유한함을 인정하는 삶에의 통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김정희는 사료에서 보듯 “예서법은 가슴속에 청고(淸高)하고 고아(古雅)한 뜻이 들어 있지 않으면 손을 통해 나올 수 없고, 가슴속의 청고하고 고아한 뜻은 또 가슴속에 문자향과 서권기가 들어 있지 않으면 능히 팔 아래 손끝으로 발현시킬 수 없다. 또한 이것은 흔히 보는 해서(楷書) 같은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리하여 모름지기 가슴속에 문자향과 서권기를 갖추고 나서야 예서법의 근본이 되며 예서 쓰는 신통한 비결이 된다. ”라고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그의 예술은 조희룡(趙熙龍, 1789~1866)⋅허유(許維, 1809~1892)⋅이하응(李昰應, 1820~1898)⋅전기(田琦, 1825~1854)⋅권돈인(權敦仁, 1783~1859) 등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 서화가로서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조선 후기 예원(藝苑)을 풍미하였다. 현전하는 그의 작품 중 국보 제180호인 「세한도(歲寒圖)」와 「모질도(耄耋圖)」⋅「부작란도(不作蘭圖)」 등이 특히 유명하다.

김정희는 학문으로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장하였고, 서예에서는 독특한 추사체(秋史體)를 대성시켰으며, 특히 예서⋅행서에서 새 경지를 이룩하였다. 이로써 금석학(金石學)⋅서학(書學) 등의 예술 및 역사 방면에서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찾으려는 민족적 주체성을 자각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김정희는 단순한 예술가⋅학자가 아니라 시대의 전환기를 산 신지식의 기수로서,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받아들여 조선 왕조의 구문화 체제로부터 신문화의 전개를 가능하게 한 선각자로 평가된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추사 김정희 산문 연구」,『대동한문학회지』25,김윤호,대동한문학회,
「추사 김정희의 예서풍」,『국립중앙박물관 미술자료』76,이완우,,2007.
「추사실기」,『간송문화』30,최완수,한국민족미술연구소,1986.
저서
『언간의 연구』, 김일근, 건국대학교 출판부, 1986.
『추사가의 한글편지들』, 김일근, 건국대학교 출판부, 1998.
『추사 김정희의 예술론』, 정혜린, 신구문화사, 2008.

관련 사이트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링크연결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