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국의 역대 흥망은 대략 중국과 서로 시대를 같이 한다. 단군은 요임금과 동시대에 일어났으며, 무왕이 천명을 받아 주나라를 건국할 때에 기자(箕子)가 조선에 봉해졌다.
짐작건대, 단군
의 후손이 쇠약해져서 다시 국가나 임금이 없어졌기 때문에 기자가 와서 기업을 닦을 수 있었던 것이다. 팔조의 가르침 중에 현재 전하는 것은 세 가지로, 즉 사람을 살해한 자에게는 즉시 죽임으로 보상해 주고 상해를 입힌 자에게는 곡식으로 보상해 주며 도둑질을 한 자에게는 적몰하여 도둑을 맞은 자의 노비를 삼는다는 것인 바, 이는 한고조의 약법삼장과 동일하다. 기타 이윤(彝倫)인 오전(五典)은 국가에 없어서는 안 될 법이니, 만일 부자간에 친하지 못하거나 군신 간에 의롭지 못하거나 한 따위를 역시 반드시 공경히 펴야 할 정교 가운데 들어 있을 것이 분명하다. 이 다섯 가지는 비록 말하지 않았지만 말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한나라에서는 세 가지 법만으로 요약했지만 이 다섯 가지를 일찍이 버린 적이 없었으니, 기자의 가르침인들 어찌 이와 다르겠는가. 이것이 이른바 ‘팔교’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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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
기자의 시대에는 요하의 동쪽에서부터 임진강의 서쪽까지가 동방의 한가운데가 되었으며, 삼한의 경계는 남쪽의 멀고 궁벽한 지역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기준이 침략을 피하여 남쪽으로 옮긴 다음 마침내 마한이라 칭하였다. 역사 기록에 보면 기준이 즉위한 지 20여 년 만에 중국에서는 진승과 항우가 일어났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마한이 창건된 것은 또 한나라가 일어날 시대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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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현(仁賢)의 교화는 실로 기자에서 시작되었으며 후손들이 기업을 이어받아 침체하지 않았는데, 위만
이 사기술을 써서 기준을 쫓아내었다. 기준은 오히려 그 사람들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피해 와서 국토를 개척하여 그 당시 속국이 50여 나라였으니, 이는 동방의 정통이 아직 끊어지지 않은 것으로서, 위씨는 주나라의 오랑캐인과 한나라의 조만(曹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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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의 아명(兒名)
에 불과할 뿐이다. 사필을 잡은 자는 마땅히 이들을 정통에 넣지 말아야 한다. 애석하게도 문헌에 빠진 부분이 많아 대수가 분명하지 못해서, ‘왕정이라고 특서한 예’처럼 하여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높이고 배척할 바를 알게 할 수는 없지만 강약은 세이고 대의는 천리이다. 익주가 비록 피폐했지만 한나라 정통을 밝게 표시했으니 이것이 춘추의 유의이다.
신라와 백제가 흥망할 때를 당해서 드러낼 만한 것이 또한 많은데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식견이 이에 미치지 못하여 수천 년 동안 잠잠하게 인멸되어 밝혀지지 못했으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신라가 빙문 오자 사대
의 예절과 진한⋅변한의 직공
을 바칠 것을 책했으며, 백제가 웅진에 성책을 세우자 다시 땅을 떼어 준 은혜를 갚지 않는다고 책하니, 백제도 부끄러움을 알아 성책을 헐어 버렸다. 그리하여 도읍을 옮기면 마한에 알렸고 포로를 잡아 오면 마한에 바쳐, 비록 마한이 쇠약해진 뒤에도 그 기강과 유풍이 오히려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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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준이 남쪽으로 피해 가자 위씨가 비록 조선의 옛 땅을 차지하였지만 겨우 80여 년 만에 멸망하였다. 위씨가 멸망한 뒤에도 마한은 117년이란 오랜 세월을 더 유지하였으며, 서북 지방의 일부분을 한나라의 사군 이부에 넘겨주긴 했지만 우리나라의 전통 있는 국가는 역시 마한뿐이었다. 국호를 고쳐 부른 것 역시 주나라가 처음 욱 땅에 봉해졌다가 유 땅으로 옮기자 유라 칭하고 주나라로 옮기자 주라고 칭한 것과 같으니, 어찌 이상할 것이 있겠는가.
마한이 망한 것은 백제에게 땅을 빌려 줬다가 백제에서 삼켜 버린 것이니, 백제의 간사하고 교활한 것은 바로 옛날 위씨의 약삭빠른 행위인 바, 마한이 전후에 걸쳐 나라를 잃은 것은 실로 인자의 과실이었다. 하늘의 뜻으로 보나 사람의 일로 보나 창연히 마음을 서글프게 할 만하다.
백제가 마한을 멸망시킨 것은 또 신나라 왕망이 한나라를 찬탈한 원년이었으니, 나라의 크고 작은 것은 비록 다르지만 기수가 공교롭게 이처럼 부합되는 그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 동방은 예의바르고 인현한 나라라고 일컬어 온 지가 오래이다. 그리하여 말하는 자들은 반드시 소중화
라 한다. 이는 딴 열국들로서는 우리나라와 대항할 수 없는 것으로서, 길하고 흉하고 성하고 쇠하는 것이 중국과 비슷하게 돌아가니, 이는 어쩌면 그럴 이치가 있을 듯하다. 나는 이 때문에 마한이 바로 동국의 정통이라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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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가 비밀리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습격한 것은 마땅히 백제가 들어와 침략했다고 써야 하며, 원산과 금현이 항복한 것은 마땅히 두 성이 함락되었다고 써야 하며, 마한이 망하고 주근(周勤)이 죽은 것은 마땅히 마한의 옛 장수 주근이 군사를 일으켜 우곡성을 점령했다가 이기지 못하여 죽었다고 써야 한다.
이렇게 기록한 다음에야 대경이 어둡지 않아 선을 권하고 악을 징계할 수 있을 것이다.
저 고구려⋅신라⋅백제의 삼국은 다만 동⋅서로 땅을 쪼개어 점령해 있었을 뿐, 일정한 전통이 없었으니 마땅히 『자치통감강목』의 남북조 예를 따라야 한다.
또 진한⋅변한은 바로 마한의 속국이었다. 그리하여 진한은 언제나 마한 사람을 임금으로 삼아 비록 대대로 내려왔지만 자립하지 못하고 항상 마한의 통제를 받았다. 변한은 또 진한에 소속되어 있었다.
진한은 비록 진(秦)나라 사람에 의해서 시작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뒤의 군장이나 정교는 마한의 통치권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기자가 평양에 정전을 만들었는데, 이는 성인이 아니면 이런 역량이 나올 수 없다. 현재 경주는 곧 진한의 옛 터인데, 방정했던 토지 구획의 자취가 아직까지도 완전히 없어지지 않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멀고 궁벽한 오랑캐 풍속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겠는가. 나는 이 때문에 이는 반드시 기자의 유화로 이룩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공자는 문헌이 충분하면 내가 능히 증거하겠노라 하였는데, 역사 기록에 나타나지 않은 것은 또한 짐작으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이다.
『성호집』권17, 잡저, 삼한정통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