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근대정치흥선대원군의 통치

호포제 실시

군역에 뽑힌 장정들에게 군포를 받아들였으므로 그 폐단이 많아 백성들이 뼈를 깎는 원한을 갖고 있었다. 사족들은 한평생 한가하게 놀며 신역(身役)이 없었으므로 과거의 명신들도 이에 대한 여론이 있었다. 그러나 유속(流俗)에 끌려 결국 이행되지 못하다가 갑자년(1864) 초에 대원군이 강력히 중원(衆怨)을 책임지고, 귀천이 동일하게 장정 한 사람마다 세납전(歲納錢) 2꾸러미를 바치게 하여, 이를 동포전(洞布錢)이라고 칭하였다.

『매천야록』권1, 갑오이전 상

軍役簽丁收布, 流獘萬端, 爲小民切骨之寃. 而士族游閒終世, 無身役, 前輩名臣, 亦多有議及者. 而牽於流俗, 終莫之行, 甲子初, 雲峴力任衆怨, 移而均諸貴賤, 一丁歲納錢二緡, 謂之洞布錢.

『梅泉野錄』卷1, 甲午以前 上

이 사료는 『매천야록(梅泉野錄)』에 기술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호포법과 관련한 내용이다. 『매천야록』은 구한말의 학자 황현(黃玹, 1855~1910)이 1864년(고종 1년)부터 1910년(대한제국 융희 4년)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서술한 역사책이다. 1894년 이전에 관한 기록은 주로 대원군의 집정과 안동 김씨의 몰락, 대원군 10년 간의 독재정치,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와 대원군의 알력, 명성황후와 그 일족의 난정, 일본 세력의 침투, 열강과의 관계, 임오군란과 청나라의 간섭, 갑신정변, 청국과 일본의 각축 등 고종(高宗, 재위 1863~1907) 즉위 이후 30년 간의 국내외 관계를 간단하게 기술하였다. 황현은 대원군의 정치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나, 명성황후의 척족들이 득세하면서 주구(誅求)를 일삼아 대원군 시절만도 못하자 백성들은 오히려 대원군의 집정 시대를 그리워한다고 하였다.

흥선대원군은 1862년(철종 13년)에 발생한 임술 농민 항쟁의 원인이 삼정(三政), 즉 전정(田政)⋅군정(軍政)⋅환정(還政)의 문란에 있다고 보고 이를 개혁하여 농민들의 불만을 수습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우선 전정에서는 조세지 확보를 위해 진전(陳田)이나 은결(隱結)을 색출했으며, 문제가 많은 일부 지역에서는 양전을 시행하여 새로운 양안을 만들고 수세결도 늘렸다.

이 사료와 관련한 군정의 문제는 호포제를 실시하여 해결하고자 하였다. 임술 농민 항쟁 이후 정부는 동포제(洞布制)의 실시 등을 통해 모순을 시정하려고 했지만, 흥선대원군 집권 이후에도 여전히 군역 문제가 논란이 되었다. 이에 흥선대원군군정의 문란을 제거하고 세원(稅源)을 확보하기 위해 1871년(고종 8년) 3월 25일 전국에 교서를 내려 호포법 시행을 알리고, 호포절목(戶布節目)을 작성하여 양반 사대부에서 천민에 이르기까지 호포를 부담하게 하였다.

호포제양반평민과 마찬가지로 군포를 부담한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조치였으나, 양반호와 평민호의 신분을 구별하기 위해 그 세액에 차등을 두는 등 완전한 균부(均賦)의 원칙을 적용한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호포법 시행으로 상민층은 경제적 부담이 감소되었고, 양반층도 군역을 지게 됨으로써 일반 백성은 호포제를 환영하였다. 호포제양반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으나 흥선대원군을 이를 시행함으로써 신분적 평등 의식도 고취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19세기 환곡운영의 변화와 환모의 부세화」,『외대사학』4,송찬섭,한국외국어대학교 사학연구소,1992.
「조선후기 호포제 논의」,『한국사론』19,지두환,서울대학교 국사학과,1988.
저서
『조선후기 경제사연구』, 김덕진, 선인, 2002.
『조선후기 통제영의 재정운영에 관한 연구』, 김현구,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4.
『1862년 농민항쟁; 중세말기 전국 농민들의 반봉건투쟁』, 망원한국사연구실, 동녘, 1988.
『19세기 지방재정운영의 실태에 관한 연구』, 장동표,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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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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