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근대정치흥선대원군의 통치

경복궁 타령

남문을 열고 파루 1)를 치니계명산천(鷄鳴山川)이 밝아 온다.

에 에헤이에이야 얼럴럴거리고 방아로다.

을축(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기 시작한 해인 1865년) 4월 갑자일에 경북궁을 이룩하세.

에 에헤이에이야 얼럴럴거리고 방아로다.

도편수(都邊手)의 거동을 봐라 먹통2)을 들고서 갈팡질팡한다.

에 에헤이에이야 얼럴럴거리고 방아로다.

단산봉황(丹山鳳凰)은 죽실(竹實)을 물고 벽오동 속으로 넘나든다.

에 에헤이에이야 얼럴럴거리고 방아로다.

남산하고 십이 봉에 오작(烏鵲) 한 쌍이 훨훨 날아든다.

에 에헤이에이야 얼럴럴거리고 방아로다.

왜철쭉 진달화 노간죽하니 맨드라미 봉선화가 영산홍이로다.

에 에헤이에이야 얼럴럴거리고 방아로다.

조선 여덟도 유명 탄 돌은 경북궁 짓는 데 주춧돌감이로다

에 에헤이에이야 얼럴럴거리고 방아로다.

근정전을 드높게 짓고 만조백관이 조하(朝賀)를 드리네

에 에헤이에이야 얼럴럴거리고 방아로다.

경복궁 타령」(김희조 채록)

1)파루(罷漏) : 조선 왕조 때 한양 같은 큰 도시에서 새벽 네 시쯤 큰 종을 서른세 번 쳐서 그 앞날 열시쯤부터 닫았던 성문을 열고 통행금지를 풀던 신호.
2)먹통 : 나무를 마름질할 때에 먹통의 실에다 먹물을 먹여 나무에다 선을 치는 연장.

남문을 열고 파루(罷漏)를 치니 계명산천(鷄鳴山川)이 밝아온다.

에 에헤이에이야 얼럴럴거리고 방아로다.

을축사월 갑자일에 경복궁을 이룩하세.

에 에헤이에이야 얼럴럴거리고 방아로다.

도변수(都邊手)의 거동을 봐라 먹통을 들구선 갈팡질팡한다.

에 에헤이에이야 얼럴럴거리고 방아로다.

단산봉황(丹山鳳凰)은 죽실(竹實)을 물고 벽오동 속으로 넘나든다.

에 에헤이에이야 얼럴럴거리고 방아로다.

남산하고 십이봉에 오작(烏鵲) 한 쌍이 훨훨 날아든다.

에 에헤이에이야 얼럴럴거리고 방아로다.

왜철쭉 진달화 노간죽하니 맨드라미 봉선화가 영산홍이로다.

에 에헤이에이야 얼럴럴거리고 방아로다.

조선 여덟도 유명탄 돌은 경북궁 짓는 데 주춧돌감이로다

에 에헤이에이야 얼럴럴거리고 방아로다.

근정전을 드높게 짓고 만조 백관이 조하(朝賀)를 드리네

에 에헤이에이야 얼럴럴거리고 방아로다.

경복궁 타령」(김희조 채록)

이 사료는 작자와 연대가 미상인 경기민요의 하나인 「경복궁타령」이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 시기 경복궁을 중건할 때 불리기 시작한 민요라고 전해지는데, 팔도에서 동원된 장정들이 일의 고달픔을 노래한 것이라고도 하고, 또는 흥선대원군원납전을 거둬들이며 무리하게 공사를 강행하자 그것을 풍자하여 부르기 시작한 노래라고도 한다.

사설은 여러 가지가 있으며, 부르는 사람에 따라 즉흥적으로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가사 내용도 무리한 공사를 풍자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을축사월(乙丑四月) 갑자일(甲子日)에 경복궁을 이룩했네”에서 ‘갑자⋅을축’을 ‘을축⋅갑자’로 거꾸로 엇바꿔 놓은 것은 경복궁 공사가 본말을 어겼다는 것을 암시하여 정치의 본말을 어긴 점을 은근히 풍자하고 있다. “눈만 꿈벅거린다”, “갈팡질팡한다” 등은 일하는 사람들의 불평을 풍자한 것으로 강제 동원된 농민들의 고달픔이 녹아 있다.

경복궁은 조선 왕조의 정궁(正宮)으로 1395년(태조 4년) 390여 칸으로 창건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이후 창덕궁을 정궁으로 사용하였다. 선조(宣祖, 재위 1567~1608)와 광해군(光海君, 재위 1608~1623) 시기에 재건을 시도하였으나 많은 재정을 감당하기 어려워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이후 1867년(고종 4년)에 7225칸의 대규모로 중건되었다.

경복궁 중건세도 정치 시기의 추락한 왕권과 조선 왕조 체제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상징적 사업이었다. 더구나 비변사 혁파와 의정부삼군부를 설치하는 제도 개편과 『대전회통』⋅『육전조례』 등 법전 편찬 등과 함께 흥선대원군의 전반적인 개혁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다. 대규모 공사로 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찬성과 신중론이 엇갈렸으나, 대원군의 강력한 의지로 영건도감을 설치하고 경복궁 중건을 시작하였다.

흥선대원군경복궁 중건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토지 부가세인 결두전(結頭錢)과 강제성이 강한 원납전(願納錢) 등을 왕족으로부터 양민에 이르기까지 납입하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중간 관리들의 농간으로 많은 폐단이 발생하면서 농민들의 원성이 높아 갔다. 또한 도성문 출입세를 징수하고, 특히 악화인 당백전(當百錢)을 발행하여 물가가 폭등하는 경제적 혼란을 자초하였다. 한편 부족한 목재는 양반 사림들의 묘지림에서 벌채하여 양반들의 원성도 높아 갔다.

일제는 1910년 강제 병합 이후 4000여 칸의 건물을 훼손하고 근정전 정면에 조선 총독부를 세우는 등 경복궁을 유린하였다. 최근 경복궁 중건 사업이 진행되어 현재 옛 건물의 3분의 1 정도가 복원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치와 그 한계성」,『동학연구』11,이문수,한국동학학회,2002.
「흥선대원군의 정치개혁」,『한국사학』16,이현희,한국정신문화연구원,1996.
「고종대 경복궁 중건의 정치적 의미」,『서울학연구』29,홍순민,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2007.
저서
『한국민요사』, 임동권, 집문당,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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