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근대정치서양 세력의 접근과 대응

이양선 출몰 보고서

이 해 여름과 가을 이래 이양선이 경상⋅전라⋅황해⋅강원⋅함경 다섯 도의 넓은 바다에 보일 듯 말 듯 출몰하였다. 혹 아득하게 멀리 있어서 추적할 수 없었고, 혹은 뭍에 상륙하여 물을 긷기도 하고 고래를 잡아 양식으로 삼기도 했는데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헌종실록』권15, 14년 12월 29일(기사)

是歲夏秋以來, 異樣船出沒, 隱現於慶尙⋅全羅⋅黃海⋅江原⋅咸鏡五道大洋中, 或漫瀾無以蹤跡之, 或下陸汲水, 或叉鯨爲糧, 殆無以計其數也.

『憲宗實錄』卷15, 14年 12月 29日(己巳)

이 사료는 19세기 이후 조선 연안에 자주 출몰했던 이양선과 관련한 내용이다. 이를 통해 이양선은 물이나 양식을 구하기 위해 육지에 올라와 조선인과 접촉하거나, 혹은 동해안을 중심으로 고래잡이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양선은 조선과 접촉을 하기 위해 온 배가 아니라 조선 연안을 지나가던 서양의 선박으로 생각되며, 이와 관련한 보고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양선은 선체가 표산과 같고 돛은 하늘 높이 치솟았고, 또 빠르기가 나는 새와 같아서 조선 선박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었다. 이양선을 타고 온 서양인은 모두 괴상한 복장과 헝클어진 머리, 푸른 눈, 독특한 모자가 눈에 띄었다. 말도 새들이 지저귀는 것 같아서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 글씨는 종횡으로 구부러져 구름이나 그림과 같아서 읽을 수 없었다고 하였다. 이처럼 이양선을 타고 온 사람들의 모습은 한결같이 ‘고괴(古怪)’하여 중국인이나 일본인과 구별되었다. 그래서 조선에서는 이들을 ‘외이(外夷)’⋅‘양적(洋賊)’⋅‘비류(匪類)’⋅‘양괴자(洋魁者)’ 등으로 불렀다.

초기에 조선 정부는 이양선을 타고 온 서양인들에게 관대하였다. 우선 관원을 보내 물어 본 뒤, 식량(곡식⋅채소⋅육류 등)을 넉넉하게 무료로 제공했고, 또 선박이 난파되었을 때에는 희망자에 따라 관리를 붙여서 육로로 의주를 거쳐 중국 베이징으로 송환하거나 선박을 제공하여 해로로 귀환시키기도 하였다. 반면 이양선을 타고 온 서양인들은 가축을 약탈하거나 주민들에게 총검을 휘둘러 살상하는 등 종종 난폭한 행위를 저질렀다.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양인들은 조선과의 통상을 요구하여 조선 정부를 긴장시켰다. 1832년(순조 32년) 충청도에 나타난 영국 상선 암허스트호는 조선 문정관(問情官)들에게 조약을 체결하여 교역할 것을 요청하였다. 문정관들은 조선은 물산이 풍부하지 못하고, 중국의 속방(屬邦)이기 때문에 함부로 교역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이를 거절하였다. 동시에 청국에 그 경과를 알리는 자문(咨文)을 보내기도 하였다. 특히 조선 정부는 이양선 가운데 프랑스 함선의 출몰을 예의 주시하였다. 프랑스가 보낸 천주교 탄압 관련 항의 서한이 국내 천주교도와 긴밀한 연락 아래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항의 서한에 대해 조선 측은 프랑스 신부들이 불법적으로 국내에 잠입하여 천주교도들과 ‘불궤(不軌, 반역)’를 도모했기 때문이며, 표류한 선원들과는 구분된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양선의 출몰과 그들의 불법 행위 및 통상 요구가 계속되자 조선에서는 강경한 위정척사(衛正斥邪) 논의가 대두하였다. 특히 천주교도와의 ‘내통’설이 제기되어 조선 내 천주교도 박해와 강경한 대외 정책 수립의 배경이 되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조선의 대응책으로 민간과 정부 차원에서 ‘해방론(海防論)’이 강하게 전개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병인양요와 이항로의 척사 상소」,『한국독립운동사연구』19,박성순,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2002.
「구미열강의 조선 진출과 대응」,『동양학』28,송병기,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1998.
저서
『악령이 출몰하던 조선의 바다-서양과 조선의 만남』, 박천홍, 현실문화, 2008.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링크연결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