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년(1882) 6월 9일, 서울 군영의 군사들이 큰 소란을 피웠다. 갑술년(1874) 이후 대궐에서 쓰이는 경비가 끝이 없었다. 호조와 선혜청
의 창고도 고갈되어 서울의 관리들은 봉급이 지급되지 않았으며, 5군영
의 병사도 종종 급식을 받지 못하여 급기야 5군영
을 2군영으로 줄이고 노약자는 내쫓았다. 도태되어 기댈 곳이 없던 이들은 완력으로 난을 일으키려고 하였다.
'선혜청' 관련자료
'5군영' 관련자료
'5군영' 관련자료
이때 군량이 지급되지 않은 지 이미 반년이 지났는데 마침 호남의 세금 거둔 배 수 척이 도착하자, 서울 창고를 열어 군량을 먼저 지급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선혜청
당상관
민겸호(閔謙鎬, 1838~1882)의 하인이 선혜청
고직(庫直, 창고지기)이 되어 그 군량을 지급하였다. 그가 쌀에 겨를 섞어서 지급하고 남은 이익을 챙기자 많은 백성이 크게 노하여 그를 구타하였다. 민겸호가 그 주동자를 잡아 포도청에 가두고 그를 곧 죽일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수많은 군중은 더욱 분함을 참지 못하고 칼을 빼어 땅을 치며, “굶어 죽으나 처형당하나 죽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차라리 죽일 사람이나 죽여서 억울함을 풀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드디어 들고 일어날 것을 결정하고 서로 고함 소리로 호응하여 많은 사람이 모였다. 그 고함 소리로 인하여 땅이 꺼질 것 같았다. 그들은 곧바로 민겸호의 집으로 쳐들어가서 순식간에 집을 부수고 점령하였다.
'선혜청' 관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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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에는 진귀한 물건들이 가득 차 있었다. 여러 사람이 악을 쓰되 “돈 한 푼이라도 훔치는 자는 모두 죽인다”라고 하고 그 물건들 뜰에 모아 놓고 불을 질렀다. 비단과 구슬이 타서 그 불빛은 오색을 띠고 인삼·녹용·사향 등이 타는 냄새가 몇 리 밖까지 풍겼다. 이때 민겸호는 담을 넘어 대궐로 도주하였다.
……(중략)……
이 해 봄 장정들을 모집하여 일본식 군사훈련을 시켰으니 이를 별기대(別技隊)라고 불렀다. 일본인 호리모토 레이조(堀本禮助)가 훈련을 가르쳤으며, 남산 밑에다 훈련장을 마련하였다. 그곳에서 총을 메고 훈련하였으므로 먼지가 허공을 가리어, 이 광경을 처음 본 장안 사람들은 놀라지 않은 자가 없었다. 그리고 개화가 된 이후, 이해를 분별하지 않고 일본이라는 말만 들으면 이를 갈며 그들을 죽이려고 하였으니 서민층에서 더욱 심하게 나타났다. 이때에 이르러 난병으로 인하여 군중이 들고 일어나 그들을 추격하였다. 호리모토는 훈련장에서 구리개[銅峴] 입구로 도주하다가 빗발치는 돌 세례를 받아 사망하였고 성 안에서 죽은 일본인이 7명이나 되었다. 난민은 천연정(天然亭)을 포위하고 손에 몽둥이를 들고 함성을 질렀다.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는 호위병과 함께 대오를 이루어 도망쳤으나 총을 쏘고 칼을 휘둘러 가까이 따라붙지 못했다. 그는 밤새 도주하여 인천으로 갔다.
……(중략)……
난병들은 민겸호의 집에서 물러나와 하도감(下都監)에 주둔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용서받지 못할 줄 잘 알고 있는 데다가 소속된 곳도 없으므로 운현궁
으로 몰려가 처형해 주기를 간청하였다. 그러자 대원군이 손을 저으며, “나도 늙었는데 국가 일을 어찌 알겠습니까만 성상께서 인자하시어 다른 일은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난병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소란을 피우자 대원군은 고함을 지르며 그들이 물러가기를 꾸짖고, 그 우두머리 몇 명을 남게 하여 그들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그 내용은 전해지지 않았다. 그 후 난병들은 모두 물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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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난병들이 대궐을 침범하니 명성황후
는 밖으로 피신하고 이최응(李最應), 민겸호, 김보현(金輔鉉) 등이 모두 피살되었고, 대원군 이하응(李昰應)
이 정사를 돌보았다. 이날 날이 밝자 난병들은 흥인군 이최응의 집을 포위하였다. 이최응은 담을 기어 넘다가 땅에 떨어져 불알이 터져서 사망하였다. 어떤 사람은 그가 창에 찔려 죽었다고 한다. 그 후 난군들은 돈화문으로 향하였다. 돈화문이 닫혀 있자 그들은 총으로 대문짝을 쏘았다. 그 소리가 콩이 튀듯 멀리까지 들렸다. 문이 열리자 그들은 벌떼처럼 달려 들어갔다.
'명성황후' 관련자료
'대원군 이하응(李昰應)' 관련자료
임금이 그 소문을 듣고 급히 대원군을 부르자 대원군은 난병들을 따라 입궐하였다. 이때 난병들은 궁전에 올라가다 민겸호와 만나자 그의 머리를 잡아끌었다. 민겸호는 황급한 나머지 대원군을 끌어안았다. 그의 머리는 대원군 도포 속으로 들어갔다. 그가 급히 “대감, 나를 좀 살려 주십시오”라고 외치자 대원군이 쓴웃음을 지으며 “내가 어찌 대감을 살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난병들이 계단 밑으로 잡아끌어 총과 칼로 내리쳐 그의 몸은 한 덩어리의 고기가 되고 말았다.
그 후 난병들은 고함을 지르며 명성황후
가 어디에 있느냐고 외쳤다. 그들의 말은 매우 불손하고 흉측하여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사방을 다니며 수색하니, 첩첩으로 설치된 장막과 벽 사이는 창이 삼엄하게 뻗쳐 있었다. 이때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閔氏)도 대궐에 들어가서 몰래 호위를 하였다. 명성황후
는 사인교(四人轎)에 들어가 숨고 뒤쪽에 앉아 포장을 두르고 대궐 밖으로 나왔다. 어느 궁인(宮人) 한 사람이 입으로 그를 가리켰다. 난병들은 사인교의 포장을 찢고 그 머리를 잡아 땅에 내동댕이쳤다. 이를 본 무감(武監) 홍재희(洪在曦)
【후에 계훈(啓薰)으로 개명하였음】
가 고함을 지르며 “이 사람은 내 여동생 상궁이니 오인하지 마라” 하고 황급히 그를 업고 도망치자 많은 난병은 의심을 하였으나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명성황후' 관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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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에게 군국사무(軍國事務)를 처리하라는 명이 내려지자 대원군은 궐내에서 거처하며, 통리기무아문
과 무위(武衛), 장어(壯禦) 2군영을 폐지하고 5군영
의 군사 제도를 복구하라는 명령을 내려 군량을 지급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난군(亂軍)은 물러가라는 명을 내리고 대사면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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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천야록』권1, 갑오이전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