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근대정치독립 협회와 대한제국

관민 공동회와 백정 박성춘의 연설

이에 관민 공동회에 참석한 회원 일동은 만세를 부른 뒤에 관리와 백성들에게 먼저 의견을 개진할 것을 요청하였다. 백정 박성춘이 말하였다. “이 사람은 바로 대한에서 가장 천한 사람이고 매우 무식합니다. 그러나 임금께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뜻은 대강 알고 있습니다. 이제 나라를 이롭게 하고 백성을 편리하게 하는 방도는 관리와 백성이 마음을 합한 뒤에야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저 차일【즉 천막이다】에 비유하면, 한 개의 장대로 받치자면 힘이 부족하지만 만일 많은 장대로 힘을 합친다면 그 힘은 매우 튼튼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관리와 백성이 마음을 합하여 우리 대황제의 훌륭한 덕에 보답하고 국운이 영원토록 무궁하게 합시다.” 회중이 박수를 보냈다.

……(중략)……

1. 외국인에게 의지하지 않고 관민이 한마음으로 협력하여 전제 황권을 견고케 할 것.

2. 광산, 철도, 석탄, 삼림 및 차관, 차병(借兵)과 정부와 외국인이 조약을 맺는 일은, 만약 각부(各部)의 대신과 중추원 의장이 같이 서명하고 날인하지 않으면 시행하지 말 것.

3. 전국의 재정은 어떤 세금이든지 모두 탁지부에서 관리하되, 다른 부서 및 개인 회사는 간섭하지 않도록 하고 예산과 결산을 인민에게 공포할 것.

4. 지금부터 중대한 범죄에 대해서는 따로 공판을 시행하되 피고가 자세히 설명하여 마침내 죄를 자복한 뒤에 형을 시행할 것.

5. 칙임관은 황제 폐하께서 의정부에 자문을 구하여 과반수가 넘으면 임명할 것.

6. 장정(章程)을 실천할 것.

대한계년사』권3, 고종 광무 2년 무술(지11월)

於是會中呼萬歲後請官民之先陳意見, 宰設軍朴成春曰, 此漢乃 大韓至賤之人, 而無知沒覺, 然略知忠君愛國之意, 今利國便民之道, 則官民合心然後可也. 比如彼遮日【即天幕也】以一竹撐支則力不足, 若以衆竹合之則其力甚固也. 伏願官民合心報答我 大皇帝之聖德, 而使國祚享萬萬歲, 會中拍手

……(中略)……

一 外國人에게倚附안이고官民이同心合力야專制皇權을堅固케할事

一 鑛山鐵道煤炭森林及借款借兵과凡政府與外國人約條事若非各部大臣과中樞院議長이合同着銜捺印則不得施行事

一 全國財政은毋論某稅고竝自度支部로句管되他府部와私會社毋得干涉고豫算決算을人民에게公佈事

一 自今爲始야凡干重大罪犯을另行公辦되被告가到底說明야究竟自服後施行事

一 勅任官은 大皇帝陛下게옵셔咨詢政府사從其過半數야任命事

一 實踐章程事

『大韓季年史』卷3, 高宗 光武 2年 戊戌(至11月)

이 사료는 1898년(고종 35년)에 열린 만민 공동회 중에서 특별히 ‘관민 공동회’라고 불리는, 10월 28일에서 11월 2일까지 개최된 집회 중에 백정 박성춘(朴成春)이 한 연설 내용과 만민 공동회에서 의결한 「헌의 6조」 내용이다.

1894년(고종 31년) 청일 전쟁과 1896년(고종 33년)의 아관파천은 각각 일본과 러시아가 조선에 대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만들었던 사건이었다. 이때 조선에 들어온 열강들은 조선의 광산⋅철도⋅전선⋅삼림⋅어장 등의 이권을 획득해 갔으며, 극심한 정치적 격변 속에서 조선 정부는 이에 대해 적절하게 대응할 수 없었다.

특히 아관파천으로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는 동안에는 여러 가지 폐해가 나타났다. 러시아는 조선에서 각종 이권을 얻어 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극동에서 남하 정책을 추진하여 부동항과 군사 기지까지 설치하려 들었다. 이러한 상황에 경계심을 느끼던 사람들은 우선 고종(高宗, 재위 1863~1907)이 하루 속히 러시아 공사관에서 환궁하여 자위력을 갖추고 자주독립권을 확고히 세우며, 적극적인 개혁 정책을 펼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1897년(대한제국 광무 1년) 2월 20일 밤 1년 만에 고종은 경운궁(慶雲宮)으로 환궁하였다. 그해 8월 조선 정부는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치고, 10월 고종을 대군주에서 황제로 승격,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바꾸며 대외적으로 완전 자주독립을 재선언하였다.

그러나 대한제국 성립을 전후로 러시아는 1897년(고종 34년) 9월 주한 러시아 공사를 종래의 온건한 베베르(Karl Ivanovich Weber, 1841~1910)에서 적극적 침략 간섭 정책을 주장하던 스페이에르(Speyer, A. ?~?)로 교체하였다. 스페이에르는 조선에 도착해 취임하자마자 세 가지 정책을 실시하려 하였다. 첫째, 군사기지 설치의 제1차 작업으로 부산 절영도(絶影島)의 석탄고 기지 건설을 위한 조차(租借)를 요구하였다. 둘째, 대한제국 군사권을 장악하기 위해 황실 호위를 담당하던 시위대에 러시아 공사관들을 파견하여 러시아 군사 편제에 따라 편성하고 훈련시켜 러시아의 장악하에 두려고 하였다. 또한 스페이에르는 한성에 1000명의 러시아 육군을 상주시키고 러시아 공사관에 300명의 코사크 기병을 주둔시켜 모두 1300명의 러시아군을 대한제국 수도에 주둔시킬 계획을 추진하였다. 셋째, 대한제국의 재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러시아 전 재무대신 서리 알렉세이예프(K. Alexeiev)를 한국 재정 고문으로 임명하였다. 또한 12월에는 재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반관반민의 한러은행(The Russ⋅Korean Bank)을 창설하도록 하였다.

이에 독립 협회는 러시아의 침략 정책을 비판하는 한편, 친러파 관료들의 해임을 요구하며 강경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독립 협회 간부들은 1898년(광무 2년) 2월 7일 기존 방식의 계몽 운동으로부터 민족 독립을 지키기 위한 정치 운동으로 전환할 것을 결정하였다. 독립 협회이상재(李商在, 1850~1927)와 이건호(李建鎬) 등은 1898년 2월 21일 구국 정치 운동을 선언하는 강경한 상소문고종에게 올렸으며, 3월 10일 종로에서 만민 공동회를 개최하여 국민의 힘으로 제정 러시아의 침략 정책을 배제하고 자주독립을 공고히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자리에는 한성 주민 약 17분의 1인 1만여 명의 시민이 자발적으로 모여들어 대한제국 정부와 고종을 놀라게 하였다. 이 자리에서 민중은 러시아의 군사 교관과 재정 고문의 철수를 만민 공동회의 의사로서 결의하였다. 이는 최초의 만민 공동회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정치 집회로서 큰 의의를 가지며, 이러한 압력에 의해 고종은 러시아의 내정 개입 및 이권 탈취를 중지시켰다.

한편, 그 해 10월 김홍륙(金鴻陸)의 독차 사건이 벌어지면서 정부 내 친러파 관료들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아지며 다시 ‘거리의 정치’가 시작되었다. 이를 주도한 독립 협회는 ① 서재필(徐載弼, 1864~1951) 추방 반대 운동 ② 생명과 재산의 자유권 수호 운동 ③ 탐관오리의 규탄 ④ 러시아의 목포⋅진남포 항구 매도 요구 저지 ⑤ 독일 등 외국의 이권 요구 반대 ⑥ 프랑스의 광산 이권 요구 반대 ⑦ 이권 양여의 조사 ⑧ 무관학교 학생 선발 부정 비판 ⑨ 의학교 설립 요구 ⑩ 의병에 피살된 일본인에 대한 일본의 배상 요구 저지와 이권 요구 반대 ⑪ 황실 호위 외인부대 창설 저지 ⑫ 노륙법(孥戮法) 및 연좌법 부활 저지 ⑬ 보수 대신 규탄과 개혁 정부 수립 요구 ⑭ 민족 상권 수호 운동 ⑮ 언론과 집회의 자유권 수호 운동 ⑯ 의회 설립 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특히 의회 설립을 요구하고 친러 수구파 퇴진과 개혁파 정부 수립을 요구한 것은 지금의 입장에서도 강경한 정치투쟁으로, 마침내 10월 12일 정부 내각을 교체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운동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경운궁 앞 광장을 매일 가득 메우면서 철야 집회를 진행했던 만민 공동회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

3월에 열린 제1차 만민 공동회 이후 중요한 정치적 사안이 있을 때마다 수시로 만민 공동회가 개최되었다. 예컨대 4월 30일 숭례문 앞에서 열린 서재필의 재류를 요청하는 만민 공동회, 6월 20일 종로에서 열린 무관학교 학생 선발 부정을 비판하는 만민 공동회, 7월 1일과 2일 종로에서 열린 독일 등 외국의 이권 침탈을 반대하는 만민 공동회, 7월 16일 종로에서 열린, 의병에 피살된 일본인의 배상금 요구를 반대하고 경부철도 부설권 침탈을 반대하는 만민 공동회 등이 있으며, 이러한 집회들은 독립 협회와는 직접 관련 없이 민중이 자발적으로 개최한 민중 대회였다.

이 관민 공동회는 당시 중요한 정치적 안건 중에서도 중추원 신관제(中樞院新官制), 즉 의회 설립법 반포를 축하하면서 향후 이를 통해 민권의 신장과 자주독립적인 국가 재건을 결의하기 위해 소집되었으며, 독립 협회에서 추천한 중추원 의관들을 중심으로 한 관료 그룹과 독립 협회 회원, 일반 시민이 함께 모여 개최한 대중 집회다. 이 자리에서는 아무나 발언하고 싶은 사람은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었는데, 박성춘도 자유 발언 형식으로 단상에 나와 발언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박성춘의 발언 자체는 이 관민 공동회의 정치적 의도와는 별 관계가 없으며, 단순히 협력과 일치를 강조하는 데에 그치고 있다. 이는 이 집회의 참가자들이 매우 다양하며 시민 자발적인 성격을 띠었음을 보여 주는 증거라고 하겠다.

또한 「헌의 6조」를 살펴보면, 1조의 경우 전제 황권을 강화한다는 명목을 제시하고 있지만 ‘외국인에게 의지하지 않고’라는 조항 자체가 아관파천을 통해 정치력을 회복했던 고종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2조에서는 아예 외국과 맺는 조약에 대해서 각부 대신과 중추원 의장의 동의를 필수적으로 얻어 내야 함을 명시하여 황제권에 대한 실질적인 제약을 주장하고 있다. 3조에 나온 ‘탁지부로 재정 일원화’ 역시 궁내부 내장사를 통해 황실 재정을 극단적으로 강화시키려 했던 고종에 대한 반박이다. 4조의 공판 중심주의는 실질적으로 연좌법 및 노륙법(孥戮法)을 겨냥하고 제시한 것이다. 이 법은 주로 반역 죄인들에게 적용되었으며, 당시 서재필박영효(朴泳孝, 1861~1939)갑신정변 주모자들이 여전히 반역 죄인으로 공격당하고 있었음을 감안한다면 사실상 급진 개화파에 대한 고종의 공안 정치를 비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5조는 아예 고위 관료인 칙임관에 대한 고종의 임면권에 직접적인 제약을 가하는 것이다. 6조에서 말하는 장정(章程)이란 ‘규정’을 의미하는 일반명사지만, 당시에는 주로 갑오개혁을 전후해서 『대명률(大明律)』과 『대전회통(大典會通)』을 대신해 제정된 신식 법률을 의미했으며, 대개 고종의 황제권 강화에 긍정적인 조항들은 아니었다.

이러한 점을 놓고 봤을 때, 관민 공동회에 참석했던 시민들의 의도가 어떠했건 간에 이 「헌의 6조」를 제의한 입안자의 의도는 노골적으로 황제권을 견제하는 것이었으리라 보인다. 최소한 고종은 이 제안에 대해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꼈던 것 같다. 보수 관료들이 “독립 협회가 의회를 설립하여 전제 군주제를 입헌 대의 군주제(立憲代議君主制)로 개혁하려는 것이 아니라 박정양(朴定陽)을 대통령, 윤치호(尹致昊)를 부통령, 이상재를 내무대신 등으로 한 공화정으로 국체(國體)를 바꾸려는 것이다. ”라는 내용의 익명서를 배포했을 때, 즉각적으로 독립 협회를 해산시키고 중추원에 관련한 법령을 폐지시킨 것이 그 증거라고 하겠다.

결국 관민 공동회가 끝난 지 이틀 뒤인 11월 4일 밤 개혁 내각은 붕괴되었다. 다시 조병식(趙秉式, 1823~1907)을 내각 수반으로 하는 보수 정부가 조직되었으며, 의회 설립령은 취소되었다. 이로써 1898년 갑자기 나타난 ‘거리의 정치’는 종결되었으나 이 경험은 향후 1900년대에 폭발적으로 나타난 각종 협회 및 단체, 학회 등의 설립에 큰 역할을 했으며, 이후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 대중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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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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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 개화 개혁론의 구조와 전개 :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주진오, 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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