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근대정치독립 협회와 대한제국

독립 협회의 시대 인식 - 민중관, 민권론, 이권 침탈 옹호론

(1) 1896년 8월 6일자 논설

국중에 비도(匪徒)가 나타난 지 7, 8개월이 지났으나 지금까지 진압되지 않았다.

……(중략)……

만일 큰 비도들이 오는 것을 알면 급히 근처에 있는 관군에게 알려서 협력하여 달아날 길을 막고 공격하여 일망타진하면 비도들은 스스로 귀화할 것이다.

……(중략)……

정부와 백성이 힘을 합쳐 서로 돕고 서로 의논하여 진정 애국하는 민병(民兵)을 일으켜 정부에 돈 한 푼 받지 않고 다만 관군과 서로 호응하기만 하여 이 비도들을 쳐부수고 나라를 다시 평안하게 만든다면, 이 사람들은 국가에 큰 공신이다.

……(중략)……

일본이 세계에 칭찬 듣는 일은 청국과 싸울 때에 자원하여 전쟁터에 나가 나라를 위하여 죽겠다는 사람이 매일 몇 천 명이었으며, 전국의 국민이 자기 형편대로 자원하여 정부에 돈을 얼마씩 바치면서

……(중략)……

이런 것을 보면 조선 사람들도 감동하여 이때를 당해 나라를 위해 일을 벌일 사람들이 더러 있을 듯하다.

독립신문〉, 1896년 8월 6일

(2) 1897년 8월 12일자 논설

만일 어느 고을이든지 그 고을의 수령이 그 고을 안에 사는 백성 하나를 무리하게 체포하여 형벌을 하던지 돈을 뺏으려 하면

……(중략)……

한마음으로 수령에게 가서 수령이 불법적으로 한 말을 공손하고 경우에 맞으며 도리에 떳떳하게 반박한다면, 그 수령이 아무리 못된 사람이라도 감히 다시는 불법적인 일을 그 고을 안에서는 겁이 나서 못할 것이다. (그런데) 조선 백성은 언제든지 원통한 일을 당하여 마음에 맺힌 일이 있으면 기껏 한다는 것이 민란을 일으킨다든지 다른 무뢰배의 일을 행하여 동학당이나 의병을 일삼으니

……(후략)……

독립신문〉, 1897년 8월 12일

(3) 1898년 8월 31일 논설 - 몰나요 씨의 의견

몰나요라고 하는 사람이 본사에 편지를 하여 의견을 보내 왔기에

……(중략)……

아프리카는 (자원의) 풍부함으로 유명한 지방이다. 울창한 숲과 찬란한 금강석 및 다른 보석과 상아, 금, 은이 무수히 들어 있건만 아프리카 토인들이 이 좋은 지방을 몇 천 년을 가지고 있으면서 보배를 보배로 쓸 줄 모르고

……(중략)……

하늘이 그 토인들의 완악함을 미워하여 서구 각국 사람들이 근래 아프리카를 나눠 가져서 몇 만 년 억울히 묻혀 있던 보배를 파내 세계에 유용한 물건을 만드니

……(중략)……

북아메리카는 땅이 비옥하고 자원이 풍부하며 강산이 웅장하고 수려함이 세계에서도 수위를 다투지만 인디언이라 하는 토인들이 몇 천 년을 맡아 가지고 있어도 이 좋은 강산을 무용지물로 만들고 야만스런 풍습을 끝내 고치지 않더니, 영국인종의 땅이 된 후에 세계에서 제일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 인디언이 만물을 아낄 줄 모르던 죄악을 하늘이 벌주신 일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과연 어리석도다

……(후략)……

독립신문〉, 1898년 8월 31일

(4) 1898년 9월 15일 논설 - 몰나요 씨의 의견

몰나요 씨가 또 편지를 하고 의견을 적어 보냈기에

……(중략)……

내가 평안도를 다니면서 들어 보니 탐관오리를 견디지 못하고 재차 타국의 난리나 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고

……(중략)……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외국 사람 때문에 나라가 결단이 난다 하니

……(중략)……

일본은 어찌 그리 잘되었는지 내 어리석은 마음에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중략)……

외국 사람의 학문과 지식과 기예와 기계와 법률과 규모와 부강한 것을 하루 바삐 배워야 하는데, 좋은 것은 한 가지도 배우지 못하고 외국 사람하고 교제한 지가 근 20년이 넘었음에도 남녀노소가 겨우 배운 것은 종이로 만 담배 피우는 것 하나밖에 없다. 어찌 한심하고 부끄럽지 않은가. 선생을 미워하면 배울 수가 없으니 함부로 외국 사람들을 미워하고 격노케 하지 말기를 바란다.

독립신문〉, 1898년 9월 15일

(5) 1898년 12월 15일자 논설

상목재의 편지를 다음에 기록한다.

……(중략)……

동양이 전제 정치를 쓰기에 백성이 매양 고단하고 정부는 강악(强惡)하여 나라의 일을 정부가 혼자 맡는 고로

……(중략)……

백성은 권리가 없어서 나라의 흥망을 모두 정부에 미루고 수수방관만 하고 있으며, 정부는 나중의 몇몇 사람이 순절만 일삼기 때문에 나라 힘이 미약하여 망하는 폐단이 자주 날뿐더러

……(중략)……

이렇게 되어 사람은 권리가 없어지고 토지는 이익이 없어지면 정부와 백성이 무엇을 가지고 나라 노릇을 하며 무엇을 하여 생명을 보존하겠는가. 이 말이 나만의 생각이 아니며, 인도⋅베트남⋅이집트⋅페르시아를 보면 내 말이 맞음을 알 수 있다. 지금 폐단을 개혁할 방안은 당장 백성에게 권리를 모아 줘서 나라의 일을 하라는 것은 아니며, 관민이 합심하여 정부와 백성의 권리가 비슷해진 후라면 대한이 영원히 평화로울 것이다.

독립신문〉, 1898년 12월 15일

(1) 1896년 8월 6일자 논설

국즁에 비도가 긴지가 칠팔샥이 되얏스되 오날 지 졍돈이 아니 되고,

……(中略)……

만일 큰 비도 오 거슬 알거든 급히 그 근쳐에 잇 경군의게 긔별 야 동심 합력야 다라날 구멍을 다 막고 쳐셔 부슈어 아죠여디가 업시 멸면 비도들은 스로 귀화 터이요

……(中略)……

뎡부당과 셩의 당이 합야 서로 돕고 서로 의론야  국 민병을 닐히켜 덩부에 돈 푼도 달날 묘리 업시 다만 경군과 서로 응기만 야 이 비도들을 쳐 부슈어 나라히 다시 평안케 되면 이런 사들은 국가에 큰 공신이요

……(中略)……

일본이 셰계에 칭찬 듯 일이 쳥국과 싸홀 에 원 야 젼쟝에 나가 나라를 위야 쥭겟노라 사이 일 몃쳔명식이요 젼국 대쇼인민이 긔 형셰로 원야 뎡부에 돈을 얼마식 밧치면셔

……(中略)……

이런 거슬 보거드면 죠션 사들도 감동야 이 를 당야 나라를 위야 업  사들이 더러 잇슬듯 더라

〈獨立新聞〉, 1896年 8月 6日

(2) 1897년 8월 12일자 논설

……(前略)……

만일 어느 고을이던지 그 고을원이 그 고을 안에 사 셩 나를 무리게 얼거 형벌을 던지 돈을 스려 거던

……(中略)……

일심으로 원의게 가셔 원이 무법게  말을 공손게 경계에 당게 도리에 게 말 거드면 그 원이 암 못된 사람이라도 감히 다시 무법 일을 그 고을 안에셔 겁이나 못 지라 죠션 셩은 언졔던지 원통 일을 당야 에 졍 미흡 일이 잇시면 깃것 다 것이 민란을 일읏킨다던지 다른 무뢰지 의 일을 야 동학당의병의 를 니

……(後略)……

〈獨立新聞〉, 1897年 8月 12日

(3) 1898년 8월 31일자 논설 - 몰나요씨의 의견

몰나요라  사이 본샤에 편지고 의견을 여러 마 지여 보엿기에

……(中略)……

아비리가 유명히 부 디방이라 보로은 수림과 찬란 금강셕과 그 외 다른 보셕과 샹아와 금 은이 부지기슈로 들어 이엇 것만은 아비리가 토죵들이 이 죠흔 디방을 몃 쳔년을 가지고 잇스면셔 보를 보로 쓸 줄 몰으고 금 뎡이를 손에다 쥐고 굴머 쥭 쟈가 만앗스니 차쇼위 포진 텬물이라 맛 하이 그 툐죵의 완악 을 미워샤 구쥬 각국 사들이 근년에 아비리가쥬를 난호아 가지고 몃 만년 억울히 뭇쳐 잇던 보를 파 여 셰계에 유용 물건을 드니 텬노가 무심치 아니 을 가지로다 북 아미리가 토옥고 각 텬죠물의 부요 과 강산의 웅쟝고 수려이 셰계에 둘 아니 가거 인민이라  토죵들이 몃 쳔년을 맛 가지고 잇서셔 이 죠흔 강산을 무용지디를 들고 야만의 풍쇽을 죵시 곳치지 아니 더니 맛 영국 인죵의 이 된 후 셰계에 뎨일 부강 나라이 되니 인뎐의 포진 텬울던 죄악을 하이 벌 주신 일을 닷지 못  사들은 과연 어리셕도다

……(後略)……

〈獨立新聞〉, 1898年 8月 31日

(4) 1898년 9월 15일 논설 - 몰나요씨의 의견

몰나요씨가  편지를 고 의견을 젹어 보내엿기에

……(中略)……

내가 평안도를 류람여 들어 본 즉 탐관 오리의게 견지 못 야 도로혀 타국 란리나 나기를 기다리 사들이 만코

……(中略)……

엇던 사은 말 기를 외국 사으로 야 나라가 결단이 난다 니

……(中略)……

일본은 엇지 그리 잘 되엿지 내 어리셕은 에 알슈업 일이로라

……(中略)……

외국 사의 학문과 지식과 기예와 긔계와 법률과 규모와 부강 것을 로 밧비 흘 것이 어 죠흔 것은  가지도 호지 못고 외국 사고 교졔 지가 근 이십년에 샹하 남녀 로쇼가 겨오 흔 것은 지권연 먹 것  가지라 엇지 심고 붓그럽지 아니 리요 션을 미워면 홀 슈가 업스니 무단히 외국 사들을 미워고 격노케 지 말앗스면 죠홀 줄노 아노라

〈獨立新聞〉, 1898年 9月 15日

(5) 1898년 12월 15일자 논설

샹목의 편지를 좌에 긔 노라

……(中略)……

동양이 젼졔 졍치를 쓰 고로 셩이 양 고단고 졍부 강악여 나라 득실을 졍부가 혼자 하 지 고로

……(中略)……

셩은 권리가 업슴으로 나라 흥망을 젼혀 졍부에다가 미루고 슈슈 방관 고 졍부 나죵의 몃몃 사이 슌졀  줄노 셩를 삼 고로 나라 힘이 미약여 망 폐단이 자쥬 날 더러

……(中略)……

이러 고 보량이면 사은 권리가 업셔지고 토디 리츌이 업셔지면 졍부와 셩이 무엇을 가지고 나라 노릇을 며 무엇을 여 명을 보존 리요 이 말이 나의 역견이 아니라 인도 월남(印度越南)과 급파샤(埃及波斯)를 보면 알지니 엇지 경계치 아니리요 연즉 지금 구폐 방략은 다름 아니라 챵졸에 셩의 권리를 모다 주어 나라 일을 라 것도 아니요 관민이 합심야 졍부와 셩의 권리가 샹반된 후에야 대한이 万億년 무강 줄노 나 아노라

〈獨立新聞〉, 1898年 12月 15日

이 사료는 〈독립신문〉의 논설 중 일부를 옮겨다 놓은 것이다. 〈독립신문〉은 1896년(고종 33년) 서재필(徐載弼, 1864~1951)이 창간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일간지다. 서재필은 1884년(고종 21년) 갑신정변이 실패한 후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해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시민권과 의사 면허를 취득하는 등 서구 문화를 체득해 나갔다. 그러던 중 1895년(고종 32년) 미국을 방문한 박영효(朴泳孝, 1861~1939)로부터 갑신정변의 실패로 지게 된 대역부도죄(大逆不道罪)가 1895년 3월 1일자로 사면되었다는 사실과, 정권을 장악한 개화파 동지들이 자신의 귀국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그 해 12월 26일 귀국하였다.

당시 김홍집(金弘集, 1842~1896) 내각은 서재필을 외부협판으로 내정하고 입각을 교섭하였다. 그러나 서재필은 정부 외곽에서 개화 정책을 국민에게 계몽하는 사업이 시급함을 강조하고 입각을 거절하였다. 서재필갑신정변 실패의 주요 원인이 민중의 지지가 결여된 때문으로 보고 당시 추진하던 개혁 정책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신문을 만들고자 한 것이다. 마침 그때 내부대신이던 유길준(兪吉濬, 1856~1914)박영효와 같이 〈한성순보〉를 창간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서재필유길준은 새로운 신문사를 설립할 것을 합의하였다. 이후 아관파천으로 인해 김홍집 내각이 박정양(朴定陽, 1841~1904) 내각으로 교체된 뒤에도 개화 신문의 필요성이 계속 제기되었기에, 서재필은 정부 및 주요 정치인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을 창간할 수 있었다.

독립신문〉은 논설, 광고, 관보, 외국 통신 및 잡보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이 중 그 논조를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은 당연히 논설이었다. 〈독립신문〉은 논설을 통해 개화 사상을 전파하고 서구 문물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조선의 전통적인 인습을 몰아내고 새롭고 선진적인 국민을 만들어 낼 것을 목표로 하였다. 또한 조선은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야 하며, 이를 위해 민권을 발전시키고 민지(民智)를 계발하여 건전 부강한 국가를 이뤄 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에 대한 이권 양여, 중추원의 운영 방침 등을 놓고 대한제국 정부 및 황실과 대립한 적도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전제군주 국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독립신문〉의 개화론이 갖고 있는 한계에 대한 지적도 다양하게 제기되고 있다. 서재필, 윤치호(尹致昊, 1865~1945) 등 〈독립신문〉 주필 및 편집을 담당했던 개화파들은 모두 노론 관료 및 명문가의 자제들로 아직 충분한 사회적 경험을 쌓기 전에 갑신정변이 실패하며 해외에서 망명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미국에서 유학하면서 서구 문물을 본격적으로 배웠기 때문에 당시 조선인 중 가장 서구 문물에 정통한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그만큼 조선의 내부적인 상황, 특히 조선의 대다수 농민들의 상황이나 그들이 겪어야 했던 고충에 대해서는 제대로 이해할 만한 입장이 아니었다.

본 사료 중 (1), (2)는 위에서 이야기한 〈독립신문〉 간행 주체들의 계층적 한계를 보여 주는 논설들이다. 이 논설들은 ‘비도’들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시기적으로 봤을 때 을미의병인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 후기 빈번하게 나타난 농민 반란은 1894년(고종 31년) 갑오 농민 전쟁 때 가장 왕성하게 일어났으며, 이후 조선의 농촌 사회는 지극히 불안정한 상황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1896년 이후 나타난 을미의병은 기존 농촌 사회의 모순에 더해 명성왕후 시해 및 단발령이라고 하는 또 다른 국가적 이슈들이 발생하면서 복합적으로 나타난 전국적 저항이었다. 이들 을미의병이 국가적 혼란을 일으킨 것은 사실이지만, 지방에서 일어난 구조적인 부패에 대한 농민들의 저항 및 명성왕후 시해 사건에 대한 범국민적 비판은 충분히 수용 가능하며 또 수용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본 사료에서는 ‘비도’들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주목하지 않았다. (2)의 내용처럼, 당시 의병 및 농민군들을 ‘지방 수령에게 불만이 있는 사람들’ 정도로 치부해 버리면서 “공손하고 도리에 맞게, 떳떳하게 얘기한다면 고을 수령이 잘 처리해 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과연 이들이 미국에서 고등 교육을 받았던 사람이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유치한 논리다. 게다가 명성왕후 시해 문제를 거론하지 않은 것은, 본래 개화파와 정치적 적대 관계였던 여흥 민씨 문중과 명성왕후에 대한 견제 의식까지 의심되는 부분이다.

또한 (1)에서 일반 농민에게 의병 진압군에 협력할 것을 요청하면서 “국가의 위기를 위해 팔을 걷고 나서는 일본 국민들”을 본받으라고 제시한 것도 이들의 이념적 특징을 잘 보여 주는 부분이다. 일본 낭인들에 의해 명성왕후가 시해된 사건은 당시 조선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였으며, 조선인은 이로 인해 지극히 격앙된 상황이었다. 따라서 조선 정부와 지식인들은 이에 대한 적절한 대응과 답변을 해야만 하였다. 이런 시점에서 의병 진압에 협력할 것을 권고하기 위해 다른 국가도 아닌 일본의 사례를 들었다는 것은 이들이 당시 조선 사회의 국민적 정서에 대해서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무시했다는 뜻이다. 이들의 개화론에는 조선인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왕후의 시해는 심대한 국권 침해가 분명했다는 점에서 단순히 대중과의 소통 여부에 그치지 않는 문제였다.

사료 (3), (4), (5)는 서구와의 관계에 대한 〈독립신문〉의 인식을 보여 준다. (3), (4)에 등장하는 ‘몰나요’ 씨는 익명의 제보자라는 형식을 취하지만 실제로는 〈독립신문〉 간행 주체들이 직접 집필한 것으로 보인다. (3)에서는 아프리카의 흑인, 북아메리카의 인디언들이 풍부한 자원을 제대로 활용하지 않은 ‘죄’를 비판하면서, 서구인들이 그들을 정복한 것은 하늘이 내린 천벌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는 사회 진화론의 전형적인 논리로, 이에 따르면 약소국 국민들은 강대국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는 것은 마땅한 자연의 원리가 드러난 것일 뿐이다. 또한 (4)에서는 조선이 외국과 교류하면서 혼란을 겪게 된 이유는 조선이 제대로 배우지 못했을 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는 서구 열강이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에 진출하면서 드러낸 노골적인 침략 행동들을 고의로 외면한 것이며 (3)과 연계한다면, 조선이 공공연히 압박하는 외국의 침략 시도를 감수하면서라도 외국과의 교류를 통해 개화되지 않는다면 나라를 빼앗기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뿐이라는 결론으로 귀결된다. (5) 또한 비슷한 한계를 보이고 있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독립신문〉은 한국 최초의 민영 신문으로서 개화 사상 전파를 위해 선구적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비할 바 없는 의의가 있다. 하지만 당시 한국 민족 및 민중의 정서와 지나치게 분리되어 있었던 데다가 서구 문명을 중심으로 한 사회 진화론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제국주의 질서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다는 한계를 갖고 있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독립협회의 대외인식과 자주국권론」,『경주사학』17,김신재,동국대학교 국사학과,1998.
「『독립협회의 대외문제에 대한 인식과 대응」,,주진오,연세대학교 석사학위논문,1984.
「독립협회의 개화론과 민족주의」,『현상과 인식』20,주진오,한국인문사회과학원,1996.
「개화기 독립협회의 활동과 국민-만들기 프로젝트」,,최창석,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2004.
저서
『19세기 후반 개화 개혁론의 구조와 전개 :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주진오, 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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