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근대정치일제의 국권 침탈과 국권 회복 운동

한⋅일 의정서

의정서

대한제국 황제 폐하의 외부대신 임시서리 육군참장(外部大臣臨時署理陸軍參將) 이지용(李址鎔)과 대일본제국 황제 폐하의 특명전권공사(特命全權公使) 하야시 곤스케(林權助)는 각각 상당한 위임을 받고 아래의 조목을 협정한다.

제1조 한일 양국 사이에 항구적이고 변함없는 친교를 유지하고 동양 평화를 확립하기 위하여 대한제국 정부는 대일본제국 정부를 확고하게 믿고 시정 개선(施政改善)에 관한 충고를 받아들인다.

제2조 대일본제국 정부는 대한제국 황실을 확실한 친선과 우의로 안전하고 편하게 한다.

제3조 대일본제국 정부는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확실히 보증한다.

제4조 제3국의 침해나 혹은 내란으로 인하여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영토의 보전에 위험이 있을 경우 대일본제국 정부는 신속히 임기응변의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 그러나 대한제국 정부는 위 대일본제국의 행동을 용이하도록 충분한 편의를 제공한다. 대일본제국 정부는 전항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군사 전략상 필요한 지점을 상황에 따라 차지하여 이용할 수 있다.

제5조 대한제국 정부와 대일본제국 정부는 상호간에 승인을 거치지 않고 후일 본 협정의 취지에 반하는 협약을 제3국과 체결할 수 없다.

제6조 본 협약과 관련한 미비한 세부 조항은 대일본제국 대표자와 대한제국 외부대신 간에 상황에 따라 협정한다.

광무 8년 2월 23일

외부대신 임시서리 육군참장 이지용

메이지 37년 2월 23일

특명전권공사 하야시 곤스케

고종실록』권44, 41년(광무 8년) 2월 23일

議定書

大韓帝國皇帝陛下의 外部大臣臨時署理陸軍參將李址鎔及大日本帝國皇帝陛下의 特命全權公使林權助 各相當의 委任을 受야 左開條件을 協定

第一條 韓日兩帝國間에 恒久不易에 親交 保持고 東洋和平을 確立을 爲야 大韓帝國政府 大日本帝國政府 確信야 施政改善에 關야 其忠告을 容 事

第二條 大日本帝國政府 大韓帝國皇室을 確實 親誼로 安全康寧케 事

第三條 大日本帝國政府 大韓帝國의 獨立及領土保全을 確實히 保証 事

第四條 第三國의 侵害에 由며 或은 內亂을 爲야 大韓帝國皇室에 安寧과 領土의 保全에 危險이 有 境遇에 大日本帝國政府 速히 臨機必要 措置 行이 可. 然이 大韓帝國政府 右大日本帝國에 行動을 容易을 爲야 十分便宜 與 事. 大日本帝國政府 前項目的을 成就을 爲야 軍略上必要 地點을 隨機收用을 得 事

第五條 大韓帝國政府와 大日本帝國政府 相互間에 承認을 不經야 後來에 本協定趣意에 違反 協約을 第三國間에 訂立을 得치못 事

第六條 本協約에 關聯 未悉細條 大日本帝國代表者와 大韓帝國外部大臣間에 臨機協定 事

光武八年二月二十三日

外部大臣臨時署理陸軍參將 李址鎔 印

明治三十七年二月二十三日

特命全權公使 林權助 印

『高宗實錄』卷44, 41年(光武 8年) 2月 23日

이 사료는 1904년(대한제국 광무 8년) 3월 8일자 〈관보〉에 실린 「한일의정서」이다. 「한일의정서」는 러일 전쟁을 일으킨 직후 일본이 한국을 자신들의 세력권으로 삼으려고 2월 23일 공수동맹(攻守同盟)을 전제로 하여 체결한 외교문서이다.

일본은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전쟁이 임박하자 대한제국과 군사동맹 성격의 밀약을 체결하고자 공작하였다. 주한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는 친일파 이지용(李址鎔)⋅민영철(閔泳喆)⋅이근택(李根澤)을 거액의 돈으로 매수하거나 위협을 가하였고, 이들은 여기에 굴복하여 조약 체결에 적극 나섰다. 고종(高宗, 재위 1863~1907)이용익(李容翊)을 비롯한 황실 측근 세력은 1904년 1월 국외 중립 선언을 비밀리에 추진함으로써 이를 피하려 했다. 그러나 2월 8일 러일 전쟁이 일본의 선전 포고 없이 시작되면서 일본군이 서울에 주둔하자 일본은 대한제국에 조약 체결을 강요하였다. 중립 노선을 견지하던 황제 측근 이용익을 일본으로 납치하고, 기타 친러파 인사들을 감시하며 정부를 압박하였다. 대한제국은 결국 2월 23일 외부대신 이지용(李址容)을 내세워 일본공사 하야시와 양국 간 전문 6조의 「한일 의정서」를 체결하였다.

「한일 의정서」는 대한제국의 안전을 지킨다는 대전제를 내세우고, 이를 빙자하여 일본이 한국의 영토를 전략적으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하여 러일 전쟁에 대비하였고, 국가 통치(시정)에 있어 일본의 충고를 받도록 한 것이다. 「한일 의정서」 제1조에서 이른바 ‘충고’라는 것은 대한제국이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가 사실상 ‘보호국’이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국은 일본의 ‘보호국’이 되는 동시에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병참기지 역할을 해야만 했다. 「한일의정서」 체결 결과 한국과 러시아의 모든 관계는 철폐되었으며, 일본은 이후 러일 전쟁 수행을 명목으로 한국에 일본군 주둔과 군용지 점거, 철도와 통신 시설 등을 접수하였다. 경부⋅경의선 철도 부설권마저 일본군용으로 넘겨받았다. 이러한 내용이 위의 사료에서처럼 〈관보〉를 통해 국민에게 알려지자 언론을 중심으로 이를 비난하거나 의정서 폐지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자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대한제국에 친선대사로 파견해 한일 간 친선을 강조하면서도 무력으로 민중의 저항을 무마하였다.

강압적으로 체결한 「한일 의정서」를 통해 일본은 한국에서의 군사 행정 뿐 아니라, 6월 4일의 ‘한일 양국 인민 어로 구역에 관한 조약’ 체결을 통하여 평안도, 황해도, 충청도의 서해안 어업권마저 획득하며 한국 침략을 본격화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대한제국의 중립정책과 중립파의 활동」,『한국독립운동사연구』14,현광호,한국독립운동사연구회,2000.
저서
『대한제국 정치사 연구』, 서영희,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3.
편저
『구한말조약휘찬』상, 국회도서관입법조사국, 국회도서관, 1964.
『한국병합의 불법성 연구』, 이태진 외,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3.
『조약으로 본 한국근대사』, 최덕수 외, 열린책들, 1989.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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