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근대정치일제의 국권 침탈과 국권 회복 운동

민영환의 유서

경고 한국 인민 유서

오호라, 나라의 수치와 백성의 욕됨이 바로 여기에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경쟁 가운데에 모두 멸망하리다. 대저 살기를 바라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기를 기약하는 자는 삶을 얻나니, 제공(諸公)들은 어찌 헤아리지 못하는가? 영환은 다만 한 번 죽음으로써 황은(皇恩)에 보답하고 그리하여 우리 2000만 동포 형제에게 사죄하려 하노라. 영환은 죽되 죽지 아니하고 저승에서라도 제군(諸君)들을 돕기를 기약하니, 바라건대 우리 동포 형제들은 더욱더 분발하고 힘을 써서 그대들의 뜻과 기개를 굳건히 하여 학문에 힘쓰고, 마음으로 단결하고 힘을 합쳐서 우리의 자유 독립을 회복한다면, 죽은 자는 마땅히 저 어두운 저 세상에서 기뻐 웃을 것이다. 오호라, 조금도 실망하지 말지어다. 우리 대한제국의 2000만 동포에게 이별을 고하노라.

〈대한매일신보〉, 1905년 12월 1일

警告韓國人民遺書

嗚呼 國恥民辱 乃至於此 我人民行將殄滅生存競爭之中矣. 夫要生者必死 期死者得生

諸公豈不諒. 只泳煥結以一死 仰報皇恩 以謝我二千萬同胞兄弟. 泳煥死而不死 期助諸君於九泉之下 幸我同胞兄弟 千萬倍加於奮勵 堅乃志氣 勉其學問 決心戮力 復我自主獨 則死者當喜笑於冥冥之中矣. 嗚呼 勿小失望 訣告我大韓帝國二千萬同胞

〈大韓每日申報〉, 1905年 12月 1日

이 사료는 1905년(대한제국 광무 9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를 개탄한 민영환(閔泳煥, 1861~1905)이 11월 30일 오전 6시경 자결하기 직전 자신의 명함에 남긴 유서이다.

을사조약 체결 소식이 알려지자 한국 내에서는 많은 저항운동이 일어났고 전국 각지에서는 매국노 을사오적을 규탄하였다. 당시 육군부장 시종무관장(陸軍副將侍從武官長)이던 민영환은 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었다는 소식에 비분강개하여 원임 의정대신(原任議政大臣) 조병세(趙秉世, 1827~1905) 등과 대궐로 나아가 5적의 처단과 조약의 폐기를 청원하였다. 그리고 11월 28일 조병세가 일본 헌병대에 끌려가자 그는 궁중으로 들어가 상소의 대표자가 되어 연일 상소하며 참정대신의 인준이 없는 5조약은 무효라고 주장하며, 5적의 처단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민영환은 두 차례에 걸친 상소문이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마지막으로 죽음으로써 스스로의 소신을 관철시키기로 결심하였다. 11월 30일, 전동(典洞) 이완식(李完植)의 집에서 고종과 2000만 동포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을 결행하였다.

민영환의 죽음은 곧바로 언론을 통해 전국적으로 전해졌으며, 또한 삽시간에 온 장안의 시민이 민영환의 집에 몰려들어 통곡하였다. 그가 자결하기 전에 자신의 명함 앞⋅뒷면에 남긴 유서는 〈대한매일신보〉에 실려 전국민에게 읽혀졌고, 국민의 항일 민족의식을 북돋우는 데 큰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대한매일신보〉는 12월 3일자에 논설을 실어 민영환의 순국을 찬양하고, 온 국민이 자유 독립을 위하여 힘써 나아갈 것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민영환의 자결 이후 전 좌의정 조병세, 전 대사헌 송병선(宋秉璿, 1836~1905), 전 참판 홍영식, 학부 주사 이상철 등도 자결 순국함으로써 일제 침략에 대한 강력한 투쟁 방략의 하나로 의열 투쟁이 자리 잡게 되었다. 민영환의 죽음은 국권 회복을 위한 의병 운동과 구국 계몽 운동이 발흥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계정 민영환 연구」,『관동사학』2,강성조,관동대학 사학회,1984.
저서
『한말 순국⋅의열투쟁』, 오영섭,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2009.
『애국자민충정공』, 조용만, 국제문화협회,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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