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근대정치다양하게 전개된 민족 운동

조선 물산 장려회 취지서

조선 물산 장려회 취지서

우리에게 먹을 것이 없고 입을 것이 없고 의지해 살 것이 없으면 우리 생활은 파괴될 것이다. 우리가 무슨 권리와 자유, 행복을 기대할 수 있으며 또 사람다운 발전을 희망할 수 있겠는가. 우리 생활의 제1조건은 곧 의식주의 문제이며 이는 산업의 기초다. 산업의 기초가 파괴되어 우리에게 남은 것이 없으면, 우리가 사람다운 생활을 하지 못하고 사람다운 발전을 하지 못할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긴급한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의식주의 문제, 즉 산업 문제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 조선 사람은 이 문제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여러 가지 통계를 굳이 들지 않아도 우리가 입은 옷, 우리가 먹는 음식,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물건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중 어느 것이 우리 손으로 지은 것이며 우리의 힘으로 만들어낸 것인가. 그 전부가 남이 만들어 놓은 것을 우리가 우리 몸뚱이를 팔아서 사놓은 것이 아니며, 사다 쓰는 것이 아닌가. 이처럼 우리가 우리의 쓰는 모든 물건을 집과 땅과 몸뚱이까지 팔아서 타인으로부터 공급받으면서도, 우리가 여전히 우리 강산에 몸을 붙이고 집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을까. 산업의 기초가 파괴되면 그 생활, 생명, 인격이 따라서 파괴되는 것은 필연적인 사실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조선 사람의 경제적 상태는 곧 우리 모든 조선 사람을 몰아 멸망의 구렁텅이로 넣는 것이라 하겠다.

혹 부유한 자는 ‘나는 돈 있는 사람이며 땅 있는 사람이기에 (이러한 문제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 땅과 돈이 점점 없어지고 그 반대로 빚과 빈곤이 늘어남을 어찌 하겠는가. 또 혹 가난한 자는 ‘나는 원래 돈과 땅이 없으며 조선 사람이 망하고 다른 사람이 부유하건, 다른 사람이 망하고 조선 사람이 부유하건 우리에게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하지만, 실제로는 … (원문에서 21자 삭제됨) … 생명을 유지할 것 없이 도로에서 방황하게 되는 슬픈 운명을 어찌하겠는가.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모두, 우리가 우리의 손에 산업의 권리, 생활의 제1조건을 장악하지 않으면 우리는 도저히 우리의 생명, 인격, 사회의 발전을 기대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견지에서 우리 조선 사람의 물산을 장려하기 위해 조선 사람은 조선 사람 지은 것을 사 쓰도록 하고, 조선 사람은 단결하여 그 쓰는 물건을 스스로 제작하여 공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와 같은 각오와 노력이 없이 어찌 조선 사람이 그 생활을 유지하고 그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겠는가.

제1기의 실행 조건

의복은 우선 남자는 두루마기, 여자는 치마를 음력 계해년(1924) 1월 1일부터 조선인 생산품 또는 가공품을 염색하여 착용할 것.

음식물에 대해서는 소금⋅설탕⋅과일⋅청량음료 등을 제외하고는 전부 조선인 생산물을 사용할 것.

일용품은 조선인 제품으로 대용할 수 있는 것은 이를 사용할 것.

朝鮮物産獎勵會趣旨書

우리에게먹을것이업고입을것이업고依支하야살것이업스면우리의生活은破壞가될것이다우리가무슨權利와自由와幸福을期待할수가잇스며참으로사람다운發展을希望할수가잇스리오우리生活에第一條件은곳이衣食住의問題即産業的基礎라이産業的基礎가破滅을當하야우리에게남은것이업스면그아모것도업는우리가사람으로사람다운生活을하지못하고사람다운發展을하지못할것은當然하지아니한가이럼으로우리에게가장緊急한問題가되는것은곳이衣食住의問題即産業問題이니그러면오늘날우리朝鮮사람의이問題에對한關係가어한가여러가지로統計를들지아니하거니와우리의입은옷을스스로도라보고우리의먹는飮食을스스로살펴보고우리의使用하는모든物件을도라보라其中에어느것이우리의손으로지은것이며우리의힘으로産出한것인가그모든것은全部남이지어노흔것을우리가우리의몸이를팔어서사다노흔것이아니며사다쓰는것이아닌가이와가치우리가우리의쓰는모든物件을집과과몸이지팔어서남의손의供給을바드면서도그래도우리가如前히우리江山에몸을부치고집을지키어살아갈수가잇슬가産業的基礎가破壞를當하면그生活그生命그人格이라破壞를當하는것이必然한事實이라하면우리는이와가튼朝鮮사람의經濟的狀態는곳우리모든朝鮮사람을몰아滅亡의굴헝텅이로넛는것이라하노라或富한者는말하기를나는돈잇는사람이오잇는사람이라아모關係가업다하나그러나그과그돈이次次로업서지고그反對로負債와困難이더하여감을엇지하며或貧한者는말하되나는原來에돈이업는사람이오이업는삼람이라朝鮮사람이亡하고다른사람이富하거나다른사람이亡하고우리朝鮮사람이富하거나우리에게무슨關係가잇스리오하나그러나實地에(…二十一字削除…)生命維持할길이업시道路에彷徨하게되는悲運을엇지할고富者와貧者를勿論하고우리가우리의손에産業의權利生活의第一條件을掌握하지아니하면우리는到底히우리의生命人格社會의發展을期待하지못할지니우리는이와갓흔見地에서서우리朝鮮사람의物産을獎勵하기爲하야朝鮮사람은朝鮮사람지은것을사쓰고둘재朝鮮사람은團結하야그쓰는物件을스스로製作하야供給하기를目的하노라이와가튼覺悟와가튼努力이업시엇지朝鮮사람이그生活을維持하고그社會를發展할수가잇스리오

第一期의實行條件

一. 衣服은爲先男子는周衣女子는裳(치마)을陰曆癸亥正月一日로부터朝鮮人産品又난加工品을染色하야着用할일

一. 飮資物에對하야는食鹽, 砂糖, 果物淸凉飮料等을除한外는全혀朝鮮人産物을使用할일

一. 日用品은朝鮮人製品으로代用키可能한것은此를使用할일

이 사료는 1923년 1월 서울 낙원동 협성학교(協成學校) 강당에서 탄생한 조선 물산 장려회의 설립 취지서인 「조선 물산 장려회 취지서(朝鮮物産獎勵會趣旨書)」이다. 이 취지서는 민족의 산업적 기초를 상실하면 부유층과 빈곤층을 막론하고 멸망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는 계몽적 취지를 담고 있다. 또 제1기 실행 조건을 공포하여 대중 계몽운동에 나섰다. 우선 의복은 남자는 두루마기, 여자는 치마를, 1924년 1월 1일부터 조선인 산품 또는 가공품을 염색해 착용할 것, 음식물에 대해서는 소금⋅설탕⋅과일⋅청량음료 등을 제외하고는 전부 조선 물산을 사용할 것, 일용품은 조선인 제품으로 대용 가능한 것은 이를 사용할 것으로 정했다.

1910년 국권 상실 후 조선은 일본 경제에 종속되었으며, 개화기부터 조선 시장에 대거 진출했던 일본 자본과 상품은 단시간에 한국의 경제권을 장악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족의 산업을 발전시켜 자립을 도모하자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3⋅1 운동 직후이며, 1920년대 초부터 전국적인 규모로 전개되었다. 1920년 봄 평양 기독교계의 민족 지도자들은 민족 기업 건설과 육성을 촉구하는 조직체 결성을 논의하였다. 그 결과 이 해 8월 평양야소교서원에서 조선 물산 장려회를 발족하였다.

창립총회에는 평양의 유지 70여 명과 교육자⋅종교인⋅실업인 및 청년들이 참석하였다. 평양 조선 물산 장려회는 당면 실천 과제로 경제계 진흥, 사회의 발전, 실업자 구제책, 국산품 애용, 근검 풍토, 실천성 양성을 내세웠으며, 몇 차례 강연회를 개최하면서 활동을 시작했다. 평양에서 조선 물산 장려를 위한 조직체가 결성되자, 서울의 조선청년회연합회에서도 이 운동에 호응해 1922년 말부터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일간지를 통해 전국에서 조선 물산 장려 표어를 모집했으며, 국산품 애용을 장려하는 지방 순회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조선 물산 장려회 창립총회에서는 이사 20명을 선출했는데, 독립운동가⋅교육자⋅종교인⋅기업인 등 각계각층 민족 지도자가 망라되었다. 이 회의에서 조선 물산 장려회의 조직과 활동 방향이 정해졌다. 활동 지침으로는, 첫째 조선인의 산업적 지능 계발을 단련해 실업에 입각하게 하는 산업 장려, 둘째 조선인의 산품을 애용, 무육(撫育)하여 조선인의 산업을 융성하게 하는 애용 장려, 셋째 조선인의 생활 및 기타에 관해 경제적으로 건설 또는 개선하기 위해 일반 사항을 조사⋅강구(講究)하고 그 실현을 지도⋅관철하는 경제적 지도 등의 목표를 정하였다.

조선 물산 장려회 창립 후 계몽 활동으로 1924년 2월 3일 서울 천도교당에서 대(對)민중 강연회를 개최했는데, 이 자리에는 청중 2,000여 명이 참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물산 장려회는 이 강연회에 이어 전국적 계몽 활동을 계획했고, 또 설날을 기해 전국적으로 조선 8도의 특산 포(布)로 기를 만들어 앞세우기로 가두 행렬을 실시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 가두 행렬은 조선 총독부의 탄압으로 중단되고 말았으며, 전국을 순회하는 계몽 강연도 일제의 방해로 강연 도중 연사의 발언이 중지되거나 체포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물산 장려 운동은 대체로 활발하게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며, 평양⋅대구⋅부산⋅광주⋅함흥 등 대도시뿐 아니라 지방 소읍에까지도 지방 분회를 설립할 정도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운동은 1930년대 들어 일본이 만주 침략을 감행하고 국내외 정책을 강경 노선으로 재편하면서 큰 위기에 봉착했다. 조선 총독부물산 장려 운동을 일종의 일화(日貨) 배척 운동이자, 항일 민족 독립운동으로 간주하여 탄압했다. 또한 조선인이 만든 상품만 소비하도록 권고한 결과 조선 상품의 가격이 크게 올랐으나 대승적 차원에서 조선 상품의 가격 인하는 제대로 시행되지 않아, 결과적으로 조선인 기업가 및 자본가들만 이익을 얻는 등 운동 자체적인 한계도 지적되었다. 이로 인해 사회주의 계열 및 소비자 조합을 중심으로 ‘물산 장려 운동은 자본가들만 위한 것’이라는 비판이 강하게 제기되기도 했다. 요컨대 물산 장려 운동은 일본의 경제적인 침략에 대응해 민족 자본을 중심으로 자립적 경제권을 이뤄 내자는 부르주아적 운동으로서 유례없는 성과를 낳았으나, 당시 식민지 정세의 악화 및 운동 노선 자체의 한계는 극복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1930년대 물산장려운동과 민족⋅자본주의⋅경제사상」,『동방학지』115,방기중,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2002.
「일제하 물산장려운동의 이념과 그 전개」,,윤해동,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1991.
「민족경제와 물산장려」,『논문집』16,이윤희,경희대학교,1998.
「일제하 물산장려운동의 조직과 기능」,『경희사학』16,이윤희,경희대학교 사학회,1991.
「물산장려논쟁을 통해서 본 민족주의세력의 이념적 편차」,『역사와현실』47,전상숙,한국역사연구회,2003.
저서
『지배와 저항 그리고 협력 : 식민지 조선에서의 일본제국주의와 조선인의 정치운동』, 김동명, 경인문화사, 2006.

관련 이미지

물산 장려 운동 시가행진

관련 사이트

조선물산장려회 취지서,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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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23년 1월 27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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