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근대정치다양하게 전개된 민족 운동

6⋅10 만세 운동 격문

대한 독립운동자여 단결하라!

일체 납세를 거부하자!

일본 물자를 배척하자!

조선인 관리는 일체 퇴직하라!

일본인 공장의 직공은 총파업하라!

일본인 지주에게 소작료를 바치지 말라!

일본인 교원에게는 배우지 말자!

일본 상인과의 관계를 단절하자!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를!

군대와 헌병을 철거하라!

투옥 혁명수를 석방하라!

보통교육은 의무교육으로!

교육 용어는 조선어로!

동양 척식 주식회사는 철폐하라!

일본 이민제를 철폐하라!

이석태, 『사회과학사전』, 1946

大韓獨立運動者여 團結하라!

一切 納稅를 拒否하자!

日本物資를 排斥하자!

朝鮮人 官吏는 一切 退職하라!

日本人 工場의 職工은 總罷業하라!

日本人 地主에게 小作料를 밧치지 말라!

日本人 敎員에게는 배우지 말자!

日本 商人과의 關係를 斷絶하자!

言論 出版 集會의 自由를!

軍隊와 憲兵을 撤去하라!

在獄 革命囚를 釋放하라!

普通敎育은 義務敎育으로!

敎育用語는 朝鮮語로!

東洋拓植株式會社는 撤廢하라!

日本 移民制를 撤廢하라!

李錫台, 『社會科學辭典』, 1946

이 사료는 1926년 6월 10일 순종(純宗, 재위 1907~1910)의 인산일(因山日)을 기해 일어난 6⋅10 만세 운동 당시 뿌려진 격문의 하나이다. 6⋅10 만세 운동은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민족 운동이자 독립운동이었다. 1919년 3⋅1 운동은 실패로 끝났으나 그 역동성을 이어받아 임시 정부가 수립되고 만주 지역에서 항일 무력 투쟁이 일어나는 등 다양한 형태의 독립 투쟁이 나타났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에 들어서며 임시 정부는 분열되고 만주 지역의 항일 무장 투쟁 세력은 일제의 대규모 토벌로 고전을 면하지 못하는 등, 전반적으로 운동의 활력을 이어 나가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생 운동은 독립운동 세력에게는 대안적인 역동성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이전의 분산적이고 비조직적인 동맹 휴학의 성격에서 벗어나 학생층 전체를 망라한 계획적이며 조직적인 운동으로 발현된 것이 6⋅10 만세 운동이다.

1926년 4월 26일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사망하자 조선 총독부에서는 3⋅1 운동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유언비어와 불온한 행동을 감시하는 등 철저한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또한 육해군 7,000여 명을 경성에 집결시키고 부산과 인천에 함대를 정박시켜 놓기까지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6⋅10 만세 운동은 세 갈래로 추진되었다.

첫 번째 계열은 노총계(勞總系)로, 사회주의자 권오설(權五卨)을 중심으로 추진되다가 ‘중국 지폐 위조 사건’과 ‘개벽지 압수 사건’ 등으로 사전에 발각되어 연류자가 붙잡히면서 실패하고 말았다.

두 번째 계열은 전문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된 사직동계(社稷洞系)이다. 1926년 4월 26일 세검정으로 춘계 야유회를 가던 조선 학생 과학 연구회 회원 80여 명은 순종이 승하했다는 비보를 듣고는, 이 기회를 이용해 어떤 형태로든지 민족 운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뜻을 모았다. 그리하여 같은 해 5월 20일 40여 명 학생이 연희 전문학교 문과 2학년생인 박하균(朴河鈞, ?~?)의 하숙집에 모여 순종 인산일인 6월 10일 독립 만세와 가두시위를 일으켜 민족의 독립을 성취하자는 결의를 하였다. 이들의 거사 계획은 일제의 감시가 기성 독립운동가들에 쏠리는 틈을 타 이뤄졌기 때문에 순조롭게 진행되어 갔다. 6월 8일 이선호(李先鎬, 1902~?) 등은 서대문 솔밭에서 태극기와 격문 30매를 만들고, 다음 날 김종찬(金鍾讚, ?~?)의 하숙방에서 격문을 기초했다. 격문은 〈시대일보〉 배달부 김낙환(金洛煥, ?~?)을 통해 빌린 인쇄 기계로 사직동 이석훈(李錫薰, ?~?)의 하숙집에서 1만여 매를 인쇄한 뒤 각 학교 학생 및 관련 학생들에게 배포되었다.

세 번째 계열은 중등학교 학생 중심의 통동계(通洞系)이다. 중앙 고등보통학교와 중동 학교 학생인 박용규(朴龍圭, ?~?)⋅곽대형(郭戴炯, ?~?)⋅김재문(金載文, 1907~1949)⋅황정환(黃廷煥, 1905~1948)⋅이동환(李東煥, ?~?) 등이 순종의 승하 소식을 듣고 시내 사립 고등보통학생 중심의 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에 5월 29일 통동의 김재문 하숙방에서 격문을 기초하고 5,000매를 등사하여 각기 1,000매씩 나누어 가진 뒤, 다시 이를 각 학생에게 분배하여 거사일인 6월 10일을 기다렸다.

1926년 6월 10일 순종 인산일에 참가한 24,000여 명 학생들은 돈화문에서 홍릉까지 도열했다. 그리고 오전 8시 30분경 순종의 상여가 종로3가 단성사 앞을 지날 때, 중앙 고등보통학교 300여 명이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고는 격문을 뿌리며 시위를 감행하였다. 이를 시작으로 오전 8시 45분경 관수교 부근에서 연희전문 학생 50여 명이, 오전 9시 30분경 을지로 경성 사범 학교 부근에서 조선 기독교 청년회 연합회 학생 2명이, 오후 1시경 훈련원 부근에서 학생 1명이, 오후 1시 30분경 동대문 근처에서 〈시대일보〉 배달부 김낙환과 청년 2명이, 오후 2시 신설동 부근에서 학생 1명이, 오후 2시 20분경 동묘 부근에서 중앙 고등보통학교 학생인 박용철⋅이동환, 중동 학교 학생 곽대형⋅황정환 등이 독립 만세를 부르며 격문을 살포하는 등 학생들의 독립 만세 시위가 계속 이어졌다.

이에 군중도 합세하여 제2의 3⋅1 운동과 같은 상황이 전개되었으나, 군대까지 동원한 일제의 감시망은 피할 수 없었다. 6⋅10 만세 운동으로 일본 경찰에게 붙잡힌 학생 수는 서울에서만 210여 명이었고, 전국적으로는 1,000여 명이나 되었다. 이들 학생 중 취조 받은 자가 106명, 수감된 자가 53명이었으나, 어느 정도 시위가 가라앉자 이들 대부분은 석방되었다. 그러나 그 중 11명은 6월 25일 「제령(制令) 제7호」와 「출판법」위반 등의 죄목으로 기소되어, 그해 11월 2일 경성 지방 법원에서 공판이 열렸다.

이때 재판장 에토 이츠오(江藤逸夫)의 심문에 주동 학생들은 거침없이 거사의 동기와 목적을 진술하였다. 이병림은 “거사의 목적과 동기는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 새삼 물어 볼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대답했고, 박하균은 “우리나라의 형편은 현명한 너희들이 더 잘 알 텐데 무엇을 알려고 하느냐?”라고 대답했다. 또한 이천진은 “호각으로 군호를 삼아 일제히 거사하였다. 그런데 뜻대로 되지 않아 애석하다”라고 말했다. 이 외에도 이선호는 “자유를 절규하면 자유가 생긴다는 결심으로 거사에 임하였다”라고 했고, 유면희는 “오로지 기미년 경험으로 재기하려 하였다”, 박용규는 “4,000여 매의 격문을 각 남녀 고등보통학교에 배부했고 가회동 취운정에서도 계획했다”, 곽대형은 “격문 500매는 만세 당일 돈화문 앞에서 살배포한 뒤 통동계 학우들과 같이 숭인동 방면으로 달려가 기회를 포착하여 만세를 고창하였다”라고 진술하였다.

검사는 이들에게 각각 1~3년의 실형을 구형했으나, 그해 11월 17일 언도공판에서 재판장은 10명에게는 각각 2~3년, 1명에게는 1년 징역형에 5년간 집행 유예를 언도하였다. 이에 검사가 상소를 제기하여, 1927년 3월 25일 고등 법원에서 다시 재판이 열렸다. 그 결과 10여 명은 징역 1년, 1명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의 언도를 받아 결국 10명이 구금되었다.

이 소식이 전국으로 알려지면서 학생들은 동맹 휴학을 통해 일제에 항거했는데, 고창⋅순창⋅정주⋅울산⋅군산⋅평양⋅홍성⋅공주뿐만 아니라 당진⋅강경⋅전주⋅하동⋅이원까지 파급되어 갔다. 이처럼 6⋅10 만세 운동은 학생들이 독자적으로 계획, 추진한 운동으로, 3⋅1 운동 이후 꾸준히 다져 온 결사⋅동맹 휴학⋅계몽 활동 등 학생운동이 결집한 소산으로 나타난 항일운동이었다.

앞서 얘기한 대로 6⋅10 만세 운동 당시 다양한 집단들이 자발적으로 격문을 만들어 시위에 참석하였다. 이 때문에 격문의 종류도 매우 다양해서, 본 사료가 그 중 어떤 그룹이 작성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내용을 보면 납세 거부, 일본 물자 배척, 공장 노동자의 총파업, 일본인 지주에 대한 소작료 상납 거부, 일본인 교원으로부터의 교육 거부, 언론⋅출판⋅집회의 자유, 구금된 혁명수들의 석방 등 민족 문제와 관련된 총체적인 사안들이 거론되고 있다. 이를 통해 당시 전문학교 및 중등학교 학생들의 정세 분석 및 운동 노선을 확인할 수 있으며, 또한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만세 운동을 시작하긴 했지만, 그 배경에는 당시의 다양한 독립운동 세력의 영향이 존재했음도 알 수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1920년대 후반 사회주의계열 학생운동 연구」, 양지수, 연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6.
「6⋅10 독립만세운동의 전개와 그에 나타난 민족주의 정신연구」, 『한국민족운동사연구』9, 황묘희,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 1994.
저서
『6⋅10 만세운동 연구』, 장석흥, 국민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5.

관련 이미지

6·10 만세 운동

관련 사이트

『第二次朝鮮共産黨事件檢擧ニ關スル報告綴』(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소장), 국사편찬위원회 전자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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