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근대정치다양하게 전개된 민족 운동

신간회 강령

민족주의로 발기된

신간회 강령 발표

창립총회는 2월 15일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

조선 민족의 정치적 의식이 발달함에 따라 민족적인 단결이 필요한 시기를 맞아, 순민족주의를 표방한 신간회 발기인 28인의 연명으로 다음과 같은 3개 조의 강령을 발표했다. 책임자의 말에 따르면 신간회의 목표는 모든 우경적인 사상을 배척하고 민족주의 중 좌익 전선을 형성하려는 것이라고 한다. 실제 정책과 사업을 2월 15일에 열릴 창립총회에서 결정하겠다고 한다.

강령

우리는 정치적⋅경제적 각성을 촉진한다.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한다.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한다.

〈동아일보〉, 1927년 1월 20일

民族主義로發起된

新幹會綱領發表

창립총회는이월십오일

機會主義를一切로否認

조선민족의 정치뎍의식이 발달됨을 라민죽뎍 중심단결을요구하는시긔를 타서순 민족주의를 표방한신간회(新幹會)발긔인이십팔씨 련명으로작일 좌긔와 가튼삼개조의 강령을 발표하엿는데 책임자의말을 듯건댄신간회의목표는모든우경뎍(右傾的)사상을배척하고 민족 주의중좌익전선(左翼戰線)을형성하랴는것이라하며 실지정책과 사업은이월십오일에열릴창립총회에서결뎡할터이라더라

綱領

一. 우리는政治的經濟的覺醒을促進함

一. 우리는團結을鞏固히함

一. 우리는機會主義를一切否認함

〈東亞日報〉, 1927年 1月 20日

이 사료는 1927년 2월 설립된 항일단체인 신간회(新幹會)의 강령 초안과 발기 총회를 사전에 보도한 〈동아일보〉의 기사이다. 1920년대부터 독립운동 혹은 민족해방운동은 기존의 ‘민족주의 계열’ 외에 사회주의 운동이 본격적으로 조직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20년대 중반을 즈음하여 민족운동의 이념⋅방법⋅주도 세력 등을 놓고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로 분화되었고, 각 분파 내에서도 여러 갈래로 다양한 노선이 존재했다.

그러던 중 1926년 6월 10일 순종(純宗, 재위 1907~1910)의 장례를 계기로 6⋅10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과거 3⋅1 운동을 잇는 전국적인 항일운동으로 기획되었지만, 일제의 철저한 진압, 계열 사이의 협력 부족, 민족진영의 조직 약화, 노총계 사회주의 계열의 사전 체포 등의 이유 때문에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6월 10일 당일 2만 4000여 명의 학생이 시위에 참가했으며, 이후 전국으로 확산되어 고창⋅원산⋅개성⋅홍성⋅평양⋅강경⋅대구 등에서도 만세 시위가 일어나 ‘일본 제국주의 타도’, ‘토지는 농민에게’, ‘8시간 노동제 채택’, ‘우리의 교육은 우리 손에’ 등 좌우를 망라하여 일제에 저항하는 구호들이 울려 펴졌다.

이러한 협력의 결과에 고무된 민족주의 좌파 진영(비타협적 민족주의자)과 사회주의 진영은 독립을 위한 민족 협동 전선, 민족 유일당을 결성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여기에 6⋅10 만세 운동의 열기가 점차 식어 가는 상황에 대한 조바심도 작용하여, 2월 15일 발기 총회를 열고 신간회를 발기하였다. 발기인은 신석우(申錫雨, 1894~1953)⋅이상재(李商在, 1850~1927)⋅안재홍(安在鴻, 1891~1965) 등 조선일보계 인물들이 중심에 있었다.

이 기사가 보도되었을 때 아직 신간회는 창립조차 되지 않았으며, 조선 총독부에 보고된 바에 따르면 ‘배일선인(排日鮮人) 가운데 저명한 인물은 거의 여기에 가입하였고…’(『고등경찰요사(高等警察要史)』)라고 할 정도로 대규모 인원이 가입했던 단체이기에 이 사료를 통해 그 성격을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서 본 사료를 해석한다면, 기사 본문에 나온 ‘순민족주의’와 ‘우경적인 사상을 배척하고 민족주의 중 좌익 전선을 형성하려는 것’이 주목된다.

이 내용만 가지고 신간회의 성격이 좌파적이었다고 규정할 수는 없으며, 비타협적 민족주의를 천명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순민족주의’라는 단어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 나타난 ‘우경적인 사상’이란 자본주의나 자유주의가 아니라 일본의 한국 통치를 인정하는 타협적 민족주의이며, ‘민족주의 중 좌익 전선’은 장기적으로 한국의 완전 독립을 추구하는 비타협적 민족주의를 지칭한다. 강령에 나타난 ‘기회주의’도 타협적 민족주의를 의미한다. 이는 신간회가 결성되던 초기에 중앙에서 이 조직을 주도한 그룹이 민족주의 계열이었음을 보여 주는 증거라고 하겠다.

민족 협동 전선을 결성할 필요성을 먼저 주장한 것은 사회주의자들이었지만 신간회 결성 후 초기에 신간회 핵심을 장악했던 계열은 민족주의자들이었다. 실제로 창립 당시 중앙 본부 회장단(이상재 회장, 권동진(權東鎭, 1861~1947) 부회장)을 민족주의 계열에서 독점하여 사회주의 계열의 불만이 누적된 바 있었다. 그 결과 1929년 7월 개최된 전국복대표자대회(全國複代表者大會)에서 사회주의 계열이 대거 참여해 중도좌파로 알려졌으며 노동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던 허헌(許憲, 1885~1951)이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고, 좌익계의 중앙집행위원 45명과 중앙검사위원 10여 명이 선출되었다.

이 과정에서 서울지회장에 선출된 조병옥(趙炳玉, 1894~1960)을 중심으로 허헌의 취임에 반대하는 민족주의 계열의 저항이 발생하는 등 좌우 갈등이 벌어졌으며, 이후 광주학생운동을 전후로 지도부의 대거 구속, 민족주의 계열의 온건 노선에 대한 사회주의 계열의 불만, 식민지 부르주아지의 신뢰 가능성을 부인하고 강경 독자 노선을 주장한 코민테른 12월 테제의 영향으로 신간회의 조직력은 현저히 약화되었다. 그 결과 사회주의 계열에서 신간회 해소론(폐지론)이 제기되었으며, 1931년 5월 16일 결국 대의원 77명이 참석한 가운데 해산이 결의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이승복과 신간회 강령의 이념⋅노선」,『한국민족운동사연구』62,김인식,한국독립운동사연구회,2010.
저서
『신간회연구』, 로버트 A. 스칼라피노, 동녘, 1987.
『신간회의 민족운동』, 신용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7.
『신간회연구』, 이균영, 한양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0.
편저
「신간회운동」, 안건호, 국사편찬위원회,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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