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근대정치다양하게 전개된 민족 운동

광주 학생 항일 운동 격문

학생 대중아 궐기하자!

검거자를 즉시 우리들이 탈환하자!

검거자를 즉시 석방하라!

교내에 경찰권 침입을 절대 반대하자!

교우회 자치권을 획득하자!

직원회에 생도 대표자를 참석시켜라!

조선인 본위의 교육 제도를 확립시켜라!

민족 문화와 사회과학 연구의 자유를 획득하자!

전국학생대표자회의를 개최하라!

조선 민중아 궐기하자!

청년 대중아, 죽음을 초월하여 투쟁하자.

검거자를 즉시 석방하라.

검거자를 탈환하자.

재향 군인단의 비상 소집을 절대 반대한다.

경계망을 즉시 철폐하라.

소방대청년단을 즉시 해산하라.

만행의 광주중학교를 즉시 폐쇄하라.

기성의 학부형위원회를 분쇄하라.

학부형회를 즉시 소집하라.

집회⋅출판⋅결사의 자유를 획득하자.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제9권 : 학생독립운동사』, 1977, 561~562쪽

學生 大衆아 蹶起하자!

檢擧者를 卽時 우리들이 奪還하자!

檢擧者를 卽時 釋放하라!

校內에 警察權 侵入을 絶對 反對하자!

校友會 自治權을 獲得하자!

職員會에 生徒 代表者를 參席시켜라!

朝鮮人 本位의 敎育制度를 確立시켜라!

民族文化와 社會科學 硏究의 自由를 獲得하자!

全國學生代表者會議를 開催하라!

朝鮮 民衆아 蹶起하자!

靑年 大衆아, 죽엄을 超越하여 鬪爭하자.

檢擧者를 卽時 釋放하라.

檢擧者를 奪還하자.

在鄕軍人團의 非常召集을 絶對 反對한다.

警戒網을 卽時 撤廢하라.

消防隊靑年團을 卽時 解散하라.

漫行의 光中을 卽時 閉鎖하라.

旣成의 學父兄委員會를 粉碎하라.

學父兄會를 卽時 召集하라.

集會出版結社의 自由를 獲得하자.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제9권 : 학생독립운동사』, 1977, 561~562쪽

이 사료는 1929년 10월 광주 학생 운동 당시 뿌려진 격문으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것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나뉜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격문에서 가장 눈에 띄는 내용은 학생 운동 관련 검거자를 석방하라는 내용으로, 이는 11월 3일에 있었던 1차 시위 때 체포된 학생들에 관한 것이다. 현실적으로 학생들을 가장 강력하게 동원한 논리는 ‘검거된 친구들을 석방시켜라’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교우회 자치권 획득’, ‘직원회에 생도 대표자 참석’ 등의 구호는, 학생들의 시위를 통제하는 학교에 대한 저항이다. 이는 학생들의 자치적 교육권 획득에 대한 열망과 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망이 교차되는 지점이라고 하겠다. ‘조선인 본위의 교육 제도 확립’, ‘민족 문화와 사회과학 연구의 자유 획득’은 민족 운동,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학생들의 의지와 ‘학생 투쟁 지도 본부’를 통해 개입한 사회단체들의 운동 전략이 반영된 결과라고 하겠다.

한편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격문에서는 재향군인단과 소방대청년단을 해산하라는 구호가 눈에 띈다. 이는 학생들의 가두 시위를 막기 위해 재향 군인단과 소방대 청년단을 소집한 것에 대한 항의인데, 이 두 단체가 사실상 일본인 중심의 자경단과 유사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 단체들에 대한 비판은 곧 학생들의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것과 동시에 한일 간의 민족 차별 및 갈등에 대한 적극적인 항의라고 하겠다.

1920년대 항일 투쟁에서 학생 집단의 참여가 큰 역할을 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동맹 휴학이라는 운동 양태가 빈번하게 발생한 이유는 일본의 식민지 교육 체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한일 병합 이후 일본의 교육 정책은 조선인에게는 고등 교육을 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하였다. 3⋅1 운동 이후 민심 수습책의 하나로 1면(面) 1교(校) 계획(보통학교)을 4년 내 달성할 것을 공포했으나 10년 뒤인 1927년 현재 전국 인구 2,000만 명에 1,309개의 공립 보통학교가 있을 뿐이었다. 교육 현장에서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 차별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생들은 나름의 입장에서 식민지의 모순된 현실을 느껴 왔으며, 그것이 학생 자발의 식민지 저항 운동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광주 지역 학생 운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 학생 결사 단체인 성진회(醒進會)는 1926년 11월에 조직되었다. 다음 해 독서회로 확대⋅개편되면서 광주 고등보통학교⋅광주 농업 학교⋅광주 사범 학교⋅광주 여자고등보통학교⋅목포 상업 학교 등에 하부 조직을 두었고, 김기권(金基權)과 장재성(張載性)이 학생소비조합을 만들어 자금 조달에 노력하였다. 1928년 11월 초 광주 학생계의 이와 같은 항일적 분위기에 맞추어 광주 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장매성(張梅性)⋅박옥련(朴玉蓮)⋅박계남(朴繼男) 등 11명이 주동이 되어 민족의 독립과 자유 쟁취, 그리고 여성의 해방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인 소녀회를 조직하였다.

1927년 2월 5일 밤 소등 후에 도서실에서 공부하던 광주 사범 학교 학생 윤형남(尹亨南)을 일본인 체육 교사가 지나치게 모욕적인 언사로 단속을 가하였다. 여기에 반발한 광주 사범 학교 기숙사생 150명이 “조선인 본위의 교육을 실시하라!”, “노예 교육을 철폐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하였다. 같은 해 5월 하순에는 광주 고등보통학교 2⋅3학년 학생들이 ‘한⋅일 학생 교육 제도와 시설의 차이’를 지적하며 동맹 휴교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이렇듯 광주 학생들의 동맹 휴교가 확대되자, 학부형⋅동창회 및 재동경 광주 고등보통학교 졸업생들까지 개입된 동맹 휴교 중앙 본부가 발족되었다. 동맹 휴교 중앙 본부가 설치되자 동맹 휴교는 학교 내부 및 광주 지방의 차별 교육 문제에서 탈피하여 식민지 교육 체제와 통치 기구에 대한 항쟁으로 성격이 변화, 발전하였다. 동맹 휴교 정신도 명백해져 식민지 노예 교육을 거부하고 피압박 민족의 해방을 요구하는 등 매우 본격적이며, 지속적인 태세를 갖추게 되었다.

상기한 1927년과 1928년의 동맹 휴교 투쟁은 일제 당국의 폭압으로 좌절되었으나 1929년에 들어서도 광주고등보통학교를 비롯한 광주 학생들의 항일 기운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그러던 1929년 3월 광주 고등보통학교 학생 김몽길(金夢吉)⋅여도현(呂道鉉) 등이 교규 문란의 이유로 퇴학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또, 통학 열차가 운암역을 통과할 때 일본인 중학생 하나가 “한국인은 야만스럽다. ”라고 말한 것이 문제가 되어 일본인 중학생과 광주 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의 충돌 사건이 일어났다. 이러한 사건 등으로 인해 광주 지방의 한⋅일 학생 간 감정은 더욱 악화되어 갔다.

이러한 한⋅일 학생 간 대립은 1929년 10월 30일 오후 5시 반 경 광주 발 통학 열차가 나주에 도착하였을 때 폭발하였다. 이날 나주역에서 통학생들이 집찰구로 걸어 나올 때 일본인 학생 몇 명이 광주 여자고등보통학교 3학년 학생 박기옥(朴己玉)⋅이금자(李錦子)⋅이광춘(李光春) 등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면서 모욕적인 발언과 조롱을 하였다. 그때 역에서 같이 걸어 나오던 박기옥의 4촌 남동생이며 광주 고등 보통학교 2학년생인 박준채(朴準埰) 등이 격분하여 이들과 충돌하였다. 그때 출동한 역전파출소 경찰은 일방적으로 일본인 학생을 편들며 박준채를 구타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독서회 중앙 본부’가 중심이 되어 1929년 11월 3일 광주 학생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날은 일본으로서는 4대절의 하나인 명치절이었고, 우리 민족으로서는 마침 음력 10월 3일로 개천절이었으며, 광주 학생들의 독서회원들에게는 전신인 성진회 창립 3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날 오전 11시경 우편국 앞에서 신사 참배를 하고 돌아오던 16명의 일본인 중학생과 광주 고등보통학교 최쌍현(崔雙鉉) 등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최쌍현이 광주 중학교 학생의 단도에 찔려 코와 안면에 부상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빌미로 양교 학생들이 충돌하여 부상자가 광주 중학교 측은 16명, 광주 고등보통학교 측은 10명이 발생하였다.

이에 대응하고 식민지 교육 상황을 비판하기 위해 광주 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가두시위를 결행했으며, 광주 농업 학교⋅광주 사범 학교⋅광주 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 중 일부도 여기에 가담하였다. 이에 11월 3일 밤 도 당국은 광주 중학교와 광주 고등보통학교 양교에 대해 총 6일간 임시 휴업을 하게 하고 학부형과 학생들에게 다각적인 선무책을 강구하도록 했으나 실효가 없었다. 11월 3일의 가두 투쟁에서 39명의 광주 고등보통학교 학생과 1명의 광주 농업 학교 학생이 구속되었다.

한편 신간회 지부와 청년⋅사회단체들이 이 투쟁에 가담하여 ‘학생투쟁지도본부’가 설치되었고, 이와 같은 계획으로 11월 12일 오전 10시를 기해 제2차 시위가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 치밀한 준비 작업 끝에 격렬한 항일 격문이 요소요소에 뿌려졌으며, 광주 고등보통학교, 광주 농업 학교 학생들이 달려와 가세하여 시위 항쟁은 최고조에 달하였다. 당시 광주 여자고등보통학교와 광주 사범 학교 학생들도 참여하고자 했으나 학교의 저지로 실패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광주학생운동과 사회주의 청년⋅학생조직」,『역사비평』6,김성보,역사문제연구소,1989.
「광주학생운동에 관한 일연구」,『숙명한국사론』1,김소진,숙명여자대학교 한국사학과,1993.
「1920년대 후반 사회주의계열 학생운동 연구」,,양지수,연세대학교 석사학위논문,2006.
「광주학생운동의 사회경제적 배경」,『역사비평』8,장석흥,역사문제연구소,1989.
저서
『광주학생운동연구』, 김성민, 국민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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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학생 항일 운동 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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