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근대정치일제의 식민 정책과 민족의 수난

신사 참배 문제 확대

유예 요구에도 불응. 도(道) 당국(當局)의 태도는 강경.

미션 학교 재학생은 현재 10만 명

(12월 13일에 평양노회를 긴급 개최)

신사 참배 문제 확대

(평양지국 전화) 신사 참배 문제는 이미 보도한 바와 같이 문제가 확대되고 있다. 지난 25일 오후 2시에 미션회 위원인 경성의 홀드, 그로풀드 씨, 평양의 피칼 씨가 평안남도의 야스다케[安武] 지사를 방문하고

미국 미션회 본부에서 총무가 조선으로 와서 그 문제에 대해 협의할 것이므로 내년 7월까지 기다려 달라고 청했다. 이에 대하여 야스다케 지사는 내년 7월까지 기다릴 수 없으며, 수일 내로 관계 학교에 통지를 발송할 것이니 참가하지 않으면 그때 최후 수단을 취하겠다고 밝혔다.

문제가 이 같이 확대되자 어쩔 수 없이 평양노회(平壤老會)는 12월 13일 평양 장대현 예배당에서 200여 목사와 선교사들이 모여 신사 참배 문제에 대해 토의를 할 것이라고 한다. 현재 목사와 선교사의 태도가 강경해 결국 문제는 더욱 확대될 운명에 있는데, 만일 문제 해결이 곤란할 경우에는 최후의 귀결로 평양은 물론 전 조선에 널려 있는 학교가 폐교 지경에까지 이를 것이라고 한다.

이 미션회 계통 학교는 전문학교 1개, 중학교 12개, 소학교 60개로 수용하고 있는 생도 수는 실로 10만 명을 넘어, 실로 이 문제의 해결 여부가 사회에 중차대한 영향을 미치리라 한다.

각지 선교회 위원 회합 미션회 소집 신청

동양전도부(東洋傳道部) 총무 파견 내정

교섭 결렬의 경위와 전말

이제 이 문제 해결에 대한 경위를 들어보면, 미션회 선교사회에서는 지난 23, 24일 양일간 평양 시내 순영리 박대효 씨 댁에서 모였으며, 경성⋅봉천⋅전주⋅평양 등 각지에서 선교회 위원들이 모여 미션회 사무국 위원회를 열고 신사 참배 문제에 대해 미국 뉴욕 미션 본부에 미션회 소집 신청을 하는 동시에 동양전도부 총무 로버트 체어 씨를 조선으로 파견해 주기를 신청했으며, 이에 대한 승낙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난 25일 평안남도 지사를 방문하고 이 총무가 조선으로 오기까지 연기를 요청했으나 야스다케 지사는 이를 단연 거절하고 불일간 통지를 발송할 것을 밝혀 드디어 문제는 급속히 확대되어 장로회 계통의 학교에 큰 문제가 되었다.

국가 의식에 참배는 당연. 폐교도 어쩔 수 없다.

오노(大野) 학무과장의 설명

오노 조선총독부 학무과장은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문제는 매우 간단명료한 것이다. 신사 참배는 국가적인 의식이지 종교적 의식이 아니다. 그러므로 신사에 참배하지 않는다는 것은 국가 의식에 참배하지 않는다는 것이 된다. 그렇다고 하면 일본 영토 안에서 일본 국가 의식에 참가하지 않는 것은 결국 일본에 복종하지 않는 것이 된다. 헌법에도 신사는 종교가 아니라는 것이 명백하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에 많은 공헌이 있는 기독교 선교사가 경영하는 학교들이 이 문제 때문에 폐교한다고 하는 것은 당국으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 하여 폐교하고 선교사들이 돌아간다고 해도 당국으로서는 어찌 할 수 없는 일이다.

당국으로서는 어찌 할 수 없다.

그리고 기독교도 중에서도 가장 구파인 천주교에서 3년 전에 이런 문제가 있었으나 로마 교황의 특사가 와서 원만히 해결하고 국가 의식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기독교도 국가 의식인 신사 참배 문제는 말썽될 것이 전혀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동아일보〉, 1935년 12월 1일

猶豫 要求에도 不應 道當局 態度 强硬

미슌校 在學生은 現下 十萬名

(十二月 十三日에 平壤老會를 緊急 開催)

神社參拜問題 擴大

(평양지국전화) 신사참배(神社參拜) 문제는 기보한 바와 같이 문제가 확대되는데 지난 二十五일 오후 二시에 미슌회임원 경성의 홀드⋅그로풀드씨, 평양의 삐칼씨가 평남 안무(安武)지사를 방문하고

미국 미슌회 본부에서 총무가 조선으로 오게 되엇으니 오면 그 문제에 대하야 협의할 터인 즉 명년 七월까지 기대려달라 청하엿든바 이에 대하여 안무지사는 명년七월까지 기다릴 수 없다 수일 내로 관게 학교에 통지를 발송할 터이니 참가하지 안흐면 그때에 최후수단을 취하겟다 언명하엿다.

문제가 이같이 확대됨으로 할 수 없이 평양노회(平壤老會)를 오는 十二월十三일에 평양 장대현(章台峴) 례배당에서 二백여 목사와 선교사들이 모혀 신사참배문제에 대한 토의를 할터이라는데 현재 목사와 선교사의 태도는 강경하여 결국 문제는 더욱 확대될 운명에 잇는데 만일 문제 해결이 곤란하게 되는 경우에는 최후의 귀결로 평양은 물론 전조선에 널려잇는 학교가 페문의 지경에까지 이르리라고 한다.

동미슌회 게통의 학교는 전문학교一, 중학교十二, 소학교가 六十교로 거게 수용하고 잇는 생도수는 실로 十만명을 넘어 실로 이 문제의 해결여부가 사회에 중차대한 영향을 미치리라 한다

各地宣敎會委員會合 미슌會 召集 申請

東洋傳道部 總務의 派遣을 內定

交涉 缺裂의 經緯와 顚末

이제 이 문제 해결에 대한 경위를 들건대 미슌회선교사회에서는 지난 二十三, 四 양일간 평양시내 순영리(巡營里) 박대효(朴大孝) 씨 댁에서 모혓는데 경성(京城), 봉천(奉天), 전주(全州), 평양 등 각지에서 선교회위원들이 모혀 미슌회사무국 위원회를 열고 이 신사참배문제에 대하야 미국 뉴욕미슌본부에 미슌회 소집 신청을 하는 동시에 동양전도부(東洋傳道部) 총무 로버트 최어씨를 조선으로 파견해주기를 원하여 이에 승낙이 잇엇다 한다.

그리하여 지난 二十五일 평남지사를 방문하고 동총무가 조선으로 오기까지 연기를 하엿든바 이에 안등지사는 이를 단연 거절하고 불일간 통지를 발송할 것을 언명하여 드디어 문제는 급속히 확대되어 장로회게통의 학교에 큰 문제가 되엇다.

小田通譯官 平壤에 急行

신사참배문제가 점점 확대되어 사회에 큰 문제를 일으킬 형편이므로 총독부 외사과(外事課) 소전(小田) 통역관은 二十九일에 평양으로 급행하여 선교사들을 방문하고 의견을 교환하엿다.

이와 동시에 평양경찰서에서는 경관들이 목사들을 방문하며 신사참배문제에 대하야 여러 가지로 물엇다는데 이구동성으로 긔독교 주지에 어그러진다고 하야 반대를 표명하엿다는데 이 문제는 평양뿐 아니라 四十만 신도의 문제라고 하야 실로 문제의 추이가 주목된다.

國家儀式에 參拜는 當然 廢校도 不得已

大野 學務課長 談

대야 총독부학무과장(大野總督府學務課長)은 이 문제에 대하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문제는 극히 간단명료한 것인 것이다 즉 신사참배문제는 국가적 의식이요 종교적 의식이 아니다. 그럼으로 신사에 참배치 아니한다는 것은 국가의식에 참배치 아니한다는 것이 된다. 그러타고 하면 일본영토 안에서 일본 국가의식에 참가치 아니하는 것은 결국 일본에 복종치 아니하는 것이 된다. 헌법상에도 신사는 종교가 아니라는 것이 명백하다. 이럼에 불구하고 조선에 만흔 공헌이 잇는 기독교 선교사가 경영하는 학교들이 이 문제로 해서 철페한다고 하는 것은 당국으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라 사실이라 하야 철페하고 선교사들이 몰아간다 하여도 당국으로서는 없지함 수 없는 일이다.

당국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다.

그리고 기독교도 중에서도 가장 구파인 천주교에서 三년 전에 이런 문제가 잇엇으나 나마교황(羅馬敎皇)의 특사가 와서 원만해결하고 국가의식에 참가하게 되엇다. 그럼으로 기독교로서도 국가의식인 신사참배문제는 말성될 것이 전연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東亞日報〉, 1935年 12月 1日

이 사료는 1930년대 일제의 신사 참배 강요에 대한 기독교 측과 조선 총독부 간의 갈등 과정을 보여 주는 내용이다. 당시 신사 참배에 대해 기독교계가 강력히 반대하자 조선총독부가 1935년 11월 학교를 폐교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이에 기독교계는 조선총독부와 대화를 시도하는 한편 미국 선교 본부를 통해 압박을 가하고자 하였다.

신사(神社)는 일본의 고유 민간 종교인 신도(神道)의 사원이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국민 통합을 위해 각지에 신사를 건립하고 이 신도를 육성해 ‘천황’ 국가의 지도 정신으로 이데올로기화했다. 그리하여 ‘천황’ 및 ‘천황의 선조’를 신사에 모시고 살아 있는 ‘천황’도 신격화해 자국 국민의 정신적 지배는 물론, 군국주의적 침략 정책 및 식민지 지배에도 이용하였다. 우리나라에는 1876년(고종 13년) 개항과 더불어 일본의 침략이 개시되면서 신사⋅신도가 침투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신사는 1910년 한일 병합 전에는 일본 거류민을 중심으로 민간에서 건립과 유지를 주도했지만, 병합 후에는 조선 총독부의 보호와 육성 아래 신사의 관⋅공립적 성격이 강화되었다. 나아가 문화 침략 내지 동화 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인에게까지 신사 참배와 신사 신앙을 강요했는데, 1910년대에는 관⋅공립 학교에, 1920년대 초반부터는 사립 학교에 신사 참배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1925년 조선 신궁 진좌제(鎭座祭)를 고비로 언론과 기독교계 사립 학교들이 강력히 반발하자 사립 학교 학생들까지 강제로 신사에 참배시키는 정책은 일단 보류되었다.

1930년대에 들어 다이쇼 데모크라시(Taisho Democracy)가 종결되고 강경파 군부가 일본 정권을 장악하면서 조선의 상황도 변화하였다. 1920년대의 소위 ‘문화 통치’가 종결되고 군국주의적 정책이 강화되었는데, 특히 조선은 대륙 침공을 위한 후방 기지 역할을 맡아야 했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사상 통일을 이룩하기 위해 각종 행사를 개최하고 기독교계 사립 학교에까지 다시 신사 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하였다.

1880년대 개신교 선교 초기부터 한국에는 다양한 종파의 기독교회가 진입했으며, 기독교단들은 자체적인 회의를 통해 교단별로 각각 다른 지역에 정착했다. 그 중 신사 참배 문제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교단은 서북 지방에 분포했던 장로교회로, 특히 평안도⋅황해도 지역에 거점을 갖고 있던 미국 북장로교회 연관 교단들은 신학적으로 보수적이었기에 신사 참배 문제에 대해서도 더 강경하게 반발했다.

본 사료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이 평양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은, 기독교 내 종단 문제가 신사 참배 반대 운동과 큰 관련이 있음을 보여 준다고 하겠다. 반면 일제 강점기 당시 경기⋅충청 지역에 기반을 잡고 있었으며, 수로는 장로교에 뒤졌지만 사회적 영향력으로는 도리어 장로교를 능가했던 감리교단은 신사 참배 문제에 그리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이는 감리교단이 장로교에 비해 신학적으로 진보적이었던 데다 조선총독부 권력과 교류를 하던 인물들이 많아 동화정책에 가담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 사료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조선 총독부는 기독교계의 요구를 일축하며, 신사 참배는 종교 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국가 의식으로 종교 단체가 찬반을 논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논리를 폈다. 이러한 강경 대응은 1920년대 조선총독부의 대응과는 차이가 있으며, 1930년대 군국주의적 총력전 체제를 추진했던 일본 식민정책의 반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에 대해 기독교계는 유효한 대응을 할 수 없었다. 가톨릭교회의 경우 일찍부터 신사 참배를 받아들였던 데다, 기독교회 안에서도 종단에 따라 입장이 달랐기 때문이다. 결국 기독교계의 의견이 분열되면서, 1937년부터 기독교계 학교 일부는 폐교하고 일부는 순응하기에 이르렀다.

1937년 중일 전쟁 이후 이른바 ‘황민화 운동’이 고조되면서 일제는 일반인은 물론 교회에까지 신사 참배를 강요하였다. 일선 경찰력을 동원해 개별 교회부터 시작해 교단적 차원에서 신사 참배를 결의, 실행하도록 압력을 가하자 기독교계는 1938년 9월 장로회 총회의 신사 참배 결의를 고비로 굴복하고 만다. 그 결과 신사 참배와 부일 협력 문제를 둘러싼 교계의 분열은 광복 후에까지 영향을 미쳐, 한국 교회의 심각한 교파 분열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1930년대 평양교구의 신사참배 거부운동」,『한국민족운동사연구』38,김수태,한국독립운동사연구회,2004.
「신사참배문제가 한국 교회에 끼친 영향 연구」,,김훈,연세대학교 석사학위논문,2002.
「한국 교회 신사참배 반대운동: 역사적 개관」,『신학지남』67,박용규,대한예수교장로회,2000.
「중일전쟁 발발 전후 신사참배 문제와 평양의 기독교계 중등학교의 동향」,『한국문화』48,안종철,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2009.
「정치적 증거로서의 순교 : 일제하 한국기독교의 신사참배항거를 중심으로」,,유승희,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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