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나는 1924년 봄, 대구시 대명동에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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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열세 살 때였던 것 같다. 어머니 쪽인지 아버지 쪽인지 잘은 모르지만 일본에 살던 먼 친척 부부가 우리 고향을 방문하였다. 그때 그들은 어머니에게 심부름이나 시키면서 친딸처럼 학교도 보내 주고 좋은 사람 만들어 시집도 보내 준다며 나를 일본으로 데리고 가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공부를 못 시켜 항상 가슴 아파하던 어머니는 두말없이 승낙해 주었다. 나 또한 배울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들 친척을 따라 일본으로 향했다.
친척집은 후쿠오카 현의 오무타에 있었다. 친척은 많은 인부들을 데리고 고물 장사를 했다. 막상 내가 가자 친척은 내 댕기 머리를 무조건 단발로 잘라 버렸다. 댕기 머리를 잘라 서운해 하는 내 기분에는 아랑곳없이 친척은 학교는 보내 주지 않으면서 매일 설거지·빨래·청소를 시키고 자신의 아이들만 돌보라고 나를 몰아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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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에 나는 만 열여섯 살이 되었다. 그해 늦가을쯤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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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군복을 입고 기다란 칼을 차고 왼쪽 어깨에 빨간 완장을 한 남자가 내게 다가왔다. 그는 갑자기 내 팔을 끌며 일본 말로 무어라고 하였다. 당시는 순사라는 말만 들어도 무서워하던 때라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가 끄는 대로 끌려갔다. 그 사람은 한참 팔을 잡고 가다가는 나를 앞세우고 걸어갔다. 간 곳은 헌병대로 생각된다. 거기에는 내 또래의 다른 여자애 한 명이 먼저 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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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이 되자 일본 군복을 입은 남자는 우리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그는 우리를 역전으로 데리고 가서는 평복을 입은 일본인 남자와 조선인 남자에게 넘겨주었다. 우리는 이들과 함께 기차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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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것을 타고 이틀 정도를 계속 북쪽으로 갔다. 중간 중간에 사람들이 내리면서 안동이니 봉천이라고 했던 것도 기억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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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녘이 되어 우리는 당시 중국 동북부 도안성(逃安城)이라는 곳에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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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럭을 타고 한참 갔다. 트럭은 마을과 허허벌판을 지나 외딴집 앞에 와서 멈추었다. 우리가 내리자 많은 여자들이 나와 우리를 맞아 주었다. 모두 조선인 여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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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온 여자들은 20명가량 됐다. 나는 ‘왜 이런 곳에 여자들이 많을까’ 하고 궁금해 하면서도 피곤하여 그날은 별 생각 없이 잤다. 다음 날 나는 여자들에게 이곳이 뭐하는 데냐고 물었다. 그러자 누가 너희들은 돈 받고 안 왔냐고 물었다. 내가 그런 게 아니고 붙들려 왔다고 했더니 그 여자는 큰일이라며 안타까워했다. 내가 “왜 그러는데요” 하고 물었더니 그 여자는 “여기는 위안소로 군인들 받는 데다”라고 했다. 내가 “군인들 받는 데면 받는 데지 우리와 무슨 상관 있냐”라고 했더니 그 여자는 아주 답답해 하면서 “군인들이 자는 곳이다”라고 했다. 그 여자들의 설명이나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고도 나는 군인들이 자면 잤지 그것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곳에 온 지 사흘이 지나자 주인은 나와 일행에게 각각 방 하나씩을 주었다. 거기에는 이불 하나, 요 하나, 그리고 베개 둘이 있었다. 이날부터 우리는 군인들을 받아야 했는데 이때서야 비로소 우리는 여자들이 왜 그토록 안타까워했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이날 처음 정조를 빼앗겼다. 눈앞이 캄캄하고 기가 차서 까무러치고 울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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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들은 정말 많았다. 어떤 때는 하루에 20명 내지 30명은 상대했던 것 같다. 그 근처에서 위안소는 우리밖에 없었던 것 같고 사병이나 장교들은 여가가 있을 때마다 오곤 했다. 높은 사람들은 자유롭게 드나들었고, 긴 밤은 주로 장교들만 자고 갔다. 군인들이 가끔씩 돈을 주어 푼돈을 쓰기도 했다. 그곳에는 우리를 때리거나 주정하는 군인들은 별로 없었다. 군인들이 삿쿠
【콘돔】
를 사용했기 때문에 내가 있는 동안 임신한 사람은 없었다. 군인들을 상대하는 일 외에도 우리는 군인들의 각반(脚絆) 각반(脚絆)
)무장용으로 정강이를 보호하려고 군인이 사용하였으며,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스패츠(spats)라 하여 남녀가 즐겨 착용함
도 쳐 주어야 했다.……(중략)……
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서 나는 물건을 관리하는 장교를 사귀었다. 나는 정당하게 노력해서는 고향으로 돌아가기가 힘들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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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품 담당자는 나보고 위안소 밖에서 살림을 차리고 같이 살 것을 제안해 왔다. 그러자 나는 그에게 내가 끌려 올 때 우리 어머니가 아파 돌아가시려 하는 것을 보고 왔다. 그러니 당신이랑 같이 살기 전에 먼저 조선에 다녀오게 해 달라, 갔다 와서 꼭 같이 살겠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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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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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다녀올 수 있는 증서를 떼 주었다.
고향에 다니러 왔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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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금천에 내려 선물을 산 후 무조건 택시를 대절하여 언니 집으로 향했다.
내동까지 가서 나는 동네 사람에게 형부 이름을 밝히면서 우리 언니에게 알려 주기를 청했다. 동네 사람은 밭일 나간 언니를 부르러 갔고 그 후 언니는 멀리서부터 한참이나 손을 흔들며 뛰어와 네가 옥주냐며 부둥켜안고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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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언니 집에서 한 열흘쯤 지낸 후 대구 집으로 돌아온 나는 때로는 남의집살이도 하면서 일 년쯤 지냈다.
다시 남방으로
대명동 집 근처에는 우연히 알게 된 친구 한 명이 있었다. 1942년 7월 초 그 친구는 돈을 많이 주는 식당에 가려는데 너도 안 가겠느냐 하고 물었다. 나는 이미 버린 몸이라 생각하고 있던 터라 어찌됐든 돈이라도 많이 벌자 다짐하며 곧장 수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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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 갔더니 역전에는 두 남녀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둘 다 조선인이었는데 남자는 마쓰모토(松本)라고 하는 사람으로 나중에 보니 우리를 관리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여자는 우리와 같은 위안부
로 그저 남자를 따라 나왔던 것 같다.
'위안부' 관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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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18명은 1942년 7월 10일 부산항에서 배를 탔다. 배는 군용으로 예닐곱 척이 함께 떴는데 우리가 탄 배는 맨 마지막에 위치했다. 내 기억으로는 나와 같은 여자들이 300~400명도 넘게 배 안에 가득 있었던 것 같다. 우리 일행 18명은 한 조가 되어 같이 생활했는데 이런 조들이 수많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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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러 우여곡절 끝에 타이완, 싱가포르를 거쳐 버마(미얀마)의 랑군에 도착하였다.
남방에서의 위안부
시절
'위안부' 관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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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뽑기가 끝나자 우리 조 관리자는 만다레로 가기로 결정되었다고 알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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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로 된 계단을 따라 올라가자 2층은 가운데 빈 공간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다 방이었다. 방의 수는 열두어 개는 되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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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온 지 3일째부터 군인들이 떼거리로 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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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인가는 한 군인이 내 방에 들어와 눈물을 그렁거리며 울고 있었다. 왜 그러냐니까 자기도 조선인이라면서 마루사 부대에 있는데 이 부대에는 50명 중에서 30~40명은 조선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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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아침을 먹고 아홉 시경부터 군인을 받았는데 때로는 군인들이 새벽부터 줄을 서서 기다리기도 했다. 졸병들이 오후 네 시경에 부대로 돌아가면 그 후 장교들이 와서 열 시 정도까지 있다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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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표는 갈색으로 된 표로 군인들 계급에 따라 가격이 달랐는데, 졸병은 1원 50전, 하사관은 2원, 장교는 2원 50전이었다. 긴 밤은 장교들만 자고 갔는데 이때는 아마 3, 4원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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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창씨 성인 ‘후미하라’를 그대로 사용하고 이름은 ‘요시코’라고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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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 사령부가 아키아부로 이동하자 우리도 따라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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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중에 미군 비행기가 자주 폭격을 했는데 그럴 때마다 우리는 폭격을 피해 아무 섬에나 내려서 몸을 피하곤 했다. 섬에 내리면 낯선 부대의 군인들이 우리 주위를 에워싸고 좋아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도 위안해 달라고 요구했는데, 상부에서 허가가 나면 우리는 이들을 위해 일주일이든 보름이든 머물러 있어야 했다. 머물 때는 그들 초소 곁에 있었으며, 그들과 같이 식사도 하고 잠도 잤다. 또 폭격이 있을 때는 그들과 같이 정글에 숨기도 했다.
아키아부에 도착하여 우리는 1년 정도 3층집에서 살았다. 이곳에는 일본인과 중국인 위안부들도 있었는데 기거하는 데는 각기 멀리 떨어져 있었다. 조선인 위안부
들만 살았던 우리 집에는 병사들이나 하사관이 주로 드나들고 일본인 위안부들은 장교들을 상대했다. 일본인 위안부들 중에는 기생 출신들이 많았는데 나이가 서른 살쯤 돼 보이는 여자도 있었다.
'조선인 위안부' 관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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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술에 취한 군인이 들어와서 칼을 빼어 죽이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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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칼을 들어 엉겁결에 가슴을 찔러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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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헌병대에 불려가 군정 재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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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일주일 만에 풀려 나와 군인들을 다시 상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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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다시 군용 트럭을 타고서 아유타야라는 곳으로 갔다.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부상병들을 간호해야 했다. 처음에는 하루 두세 시간씩 맥박 재기, 주사 놓기, 얼음찜질 등의 간호 교육을 받았다. 부상병 간호를 넉 달쯤 하다 해방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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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 생각나는 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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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를 가든지 우리는 위안부
생활 내내 조센삐, 조센징이라고 놀림을 받았다. 위안부
생활을 하면서 성병 검사는 일주일마다 있었고 군인들은 삿쿠를 사용했다. 나는 군인이 삿쿠를 하지 않으면 그 군인의 사타구니를 발로 걷어차 버리면서 거부하거나 그래도 말을 안 들으면 헌병에게 신고해 버렸다. 당시 아이를 낳은 동료도 있다.
'위안부' 관련자료
'위안부' 관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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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을 맞이하여
아유타야에서의 생활을 끝낸 후 우리는 군용 트럭을 타고 태국에 있는 수용소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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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지나 우리는 배를 타고 인천에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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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준비된 태극기를 흔들며 나오자 사람들이 북·꽹과리를 치면서 반겨 주었다. 확성기에서는 “조선 사람 조선으로 길이 보전하세”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가슴이 뭉클하였다. 우리는 배에서 내리면서 1000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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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에 돌아와서
고향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하루는 외숙모가 집에 와서 양반
집에서 너 같은 아이가 있을 수 없다면서 야단을 했다. 어찌됐든 나는 이후 일가친척들에게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고 살았다.
'양반' 관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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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지 1년 후에 어머니는 나를 달성 권번으로 보내 주었다. 내 나이 스물두 살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3년 동안 교육을 받으면서 틈틈이 기생질도 했다.
권번을 졸업하고 유곽에 있던 나는 대구에서 조선공작 주식회사를 경영하던 김씨를 만나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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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사업이 망해 버리자 아무 대책 없이 자살을 해 버렸다. 그래서 나는 다시 기생질을 해 아이들과 친정어머니를 모셨다. 이때가 내 나이 서른두 살이었나 보다.
『2016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 관련 사료조사 및 D/B화 사업 보고서 :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구술자료 재정리 자료집』, 여성가족부, 2016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