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근대정치국내외의 민족 운동

한인 애국단 선서문

선서문

나는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할 것을 진실로 맹세합니다.

대한민국 14년(1932) 4월 26일

선서인 윤봉길

한인애국단

윤봉길 의사 기념사업회, 『도록 윤봉길 의사』, 1992

宣誓文

나는赤誠으로써祖國의獨立과自由를回復하기爲하야韓人愛國團의一員이되야中國을侵略하는敵의將校를屠戮하기로盟誓하나이다

大韓民國十四年四月二十六日宣誓人尹奉吉

韓人愛國團앞

윤봉길 의사 기념사업회, 『도록 윤봉길 의사』, 1992

1932년 4월 26일 윤봉길(尹奉吉, 1908~1932)은 상하이 훙커우 공원(虹口公園)에서 거행된 천장절(天長節) 축하장에서 일본군 장교들을 암살하라는 지령을 받는다. 이 사료는 그때 한인애국단에 제출한 선서문이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상하이에서 통합된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헌정에 기반한 민주 공화 정부였으나, 영토와 국민이 없고 대한제국 정부와도 연관성이 없었기 때문에 현실적인 정책 운영과 독립운동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한편 1931년 9월 8일 일본이 만주 지역을 침공하여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우자, 중국인들 사이에서 반일 감정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려운 여건을 돌파하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령 김구(金九, 1876~1949)는 소수의 인원으로 일본에 최대한 타격을 주는 한편, 임시 정부의 활동 공간이던 중국과의 협력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1931년 10월 일본 정부 및 군부 수뇌들을 암살할 목적으로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였다.

단체의 간부는 단장 김구를 비롯해 이유필(李裕弼, 1885~1945)⋅이수봉(李秀峰, 1896~1933)⋅안공근(安恭根, 1889~1940) 등이며, 단원은 이봉창(李奉昌, 1900~1932)윤봉길⋅이덕주(李德柱, 1908~1935)⋅유진만(兪鎭萬, 1912~1966)⋅최흥식(崔興植, 1909~1932)⋅유상근(柳相根, 1910~1945) 등이었다.

1931년 말 김구 등은 일본 천황의 암살을 계획하고 이봉창을 도쿄로 파견하였다. 1932년 1월 초순 도쿄에 도착한 그는 1월 8일 사쿠라다 문(櫻田門) 앞에서 일본 천황에게 폭탄을 투척했으나 암살에 실패했고, 곧 체포된 뒤 사형을 당하였다. 이 사건은 당시 일본 및 그 점령 아래에 있던 지역에 큰 충격을 던져 주었으며 임시 정부의 항일 민족운동에 큰 활력을 제공하였다.

이후 윤봉길은 1932년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시라카와(白川義則) 군사령관, 우에다(植田謙吉) 육군대장, 노무라(野村吉三郎) 해군중장, 시게미쓰(重光葵) 공사 등 7명을 살상하고 잡혀 사형을 당했다. 이 사건 역시 항일 민족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 밖에도 같은 해 이덕주⋅유진만이 조선 총독을 암살하려 했으며, 최흥식⋅유상근은 국제연맹조사단 환영차 다롄(大連)에 파견된 혼조 시게루(本庄繁, 1876~1945)를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쳤다. 이때 한인애국단이 이들의 배후에 있다는 게 밝혀지면서 이후 활동은 이어지지 못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한인애국단’의 독립운동에 관한 연구」,,김명희,동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1984.
편저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30, 국사편찬위원회 편, 국사편찬위원회, 2008.
「대한민국임시정부」, 조동걸, 국사편찬위원회, 1978.
『한인애국단의 성립과 활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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