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근대정치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한국 광복군

한국 광복군의 행동 준승 9개항

한국 광복군을 본회(중국 군사위원회)에서 통할 지휘케 된 후에 준행할 9항 준승(九項準繩)

1. 한국 광복군은 아국(중국)의 항일 작전 기간에는 본회에 직예(直隷)하고, 참모총장이 장악 운용한다.

2. 한국 광복군은 본회에서 통할 지휘하되 아국이 항전을 계속하는 기간 및 한국 독립당임시 정부가 한국 국경 내로 추진하기 전에는 아국 최고통수부의 군령만을 접수할 뿐이고, 기타의 군령이나 혹은 기타 정치적 견제를 접수하지 못한다. 한국 독립당임시 정부와의 관계는 아국의 군령을 받는 기간에 있어서는 고유한 명의(名義) 관계를 보류한다.

3. 본회에서 해당 군(한국 광복군)이 한국 내지 및 한국 변경 접근 지역을 향하여 활동함을 원조하되 아국의 항전 공작과 배합함을 원칙으로 하며, 한국 국경 내로 추진하기 전에는 한인을 흡수할 수 있는 윤함구(淪陷區: 중국 내 일본군 점령지역)를 주요 활동 구역으로 삼는다. 군대를 편성하는 기간에 있어서는 아국 전구(戰區) 제1선 부근에서 조직 훈련하되 그 지역의 최고 군사 장관의 절제(節制)를 받아야 한다.

4. 전구 제1선 이후 지구에서는 다만 전구의 장관 소재지 및 본회 소재지에서만 연락통신 기관을 설립할 수 있으며, 부대를 모집⋅편성하여 임의로 체류하거나 기타 활동은 할 수 없다.

5. 해군 총사령부의 소재지는 군사위원회에서 지정한다.

6. 해군은 윤함구(淪陷區) 및 전구 후방을 물론하고 아국적의 사병을 모집⋅수합하거나 행정관리를 마음대로 둘 수 없다. 만일 중국어로 된 문화 공작이나 기술 인원을 사용하려면, 이를 모두 군사위원회에서 파견한다.

7. 해군의 지휘명령이나 혹은 문서와 무기의 청구 수령 등에 관한 것은 본회에서 지정한 판공청 군사처와 상의한다.

8. 중일 전쟁이 끝나기 전에 한국 독립당임시 정부가 한국 국경 내에 진입하였을 때는 해군과 임시 정부의 관계는 별도로 의논하여 규정하되, 종전대로 본회의 군령을 계속 접수하여 중국군과 배합하여 작전함을 위주로 한다.

9. 중일 전쟁이 끝났을 때에도 임시 정부가 한국 국경 내로 진입하지 못한 경우, 이후 광복군을 어떻게 운용할 것인가는 본회의 정책에 기본하고 당시 정황을 살펴서 책임지고 처리한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1 임정편』, 1970, 451쪽

韓國光復軍歸本會統轄指揮後規定九項

一. 韓國光復軍 在我國抗日作戰期間 直隷本會 由參謀總長掌握運用

二. 韓國光復軍 歸本會統轄指揮 在我國繼續抗戰期間及韓國獨立黨臨時政府 未推進韓境以前 僅接受我國最高統帥部唯一之軍令 不得接受其他軍令 或受其他政治牽掣 其與韓國獨立黨臨時政府之關係 在受我國軍令期內 准保留固有之名義關係

三. 本會以援助該軍 向韓國內地及 接近韓國邊境之地域活動 以配合我國抗戰工作爲原則 在未能推進韓境以前 應以有韓人可吸引之淪陷區 爲主活動區域 在其軍隊編練期間 特准其在我國戰區第一綫(軍部以前)附近組訓 但須受我當地最高軍事長官之節制

四. 在戰區第一綫以後地區 僅准在戰區長官所在地及 本會所在地 設立連絡通信機關 均不得有招編部隊 任意逗留或作其他活動情事

五. 該軍總司令部所在地 由軍事委員會指定之

六. 該軍無論在淪陷區 及戰區後方 均不得招收我國籍之士兵及 擅設行政官吏 倘欲引用華籍文化工作及 技術人員 均呈由軍事委員會核派之

七. 關於該軍之指揮命令及 請領款械等事 由本會指定辦公廳軍事處負責接洽

八. 在中日戰爭未結束以前 韓國獨立黨臨時政府 如已推進韓境時 該軍與臨時政府關係 另行議定明令規定之 但仍以繼續接受本會軍令 配合作戰爲主

九. 中日戰爭結束時 向該臨時政府 如尙未推進韓境 則該光復軍爾後如何運用 由本會本一貫之政策 按當時之情況 自行負責處理之

국사편찬위원회, 『韓國獨立運動史 資料1 臨政篇』, 1970, 451쪽

이 사료는 1941년 11월 중국 군사위원회가 임시 정부가 창설한 광복군과 관련하여 군사원조에 동의하면서 제시한 「한국 광복군 행동 준승 9개 항」이다.

1937년 7월 시작된 일제의 중국 대륙 침략으로 점령 지역이 확대되자 대한민국 임시 정부광저우(廣州), 류저우(柳州), 치장(綦江) 등을 전전하다 1940년 충칭(重慶)에 자리를 잡았다. 충칭은 중국 정부가 임시 수도로 정한 곳이었고 항일 전선의 중심지였다. 이곳에서 임시 정부는 “광복군은 중화민국 국민과 합작하여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타도하기 위하여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을 계속한다. ”는 내용의 「한국 광복군 선언문」을 발표하고, 1940년 9월 17일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였다.

그러나 중국 군사위원회는 자신들의 승인 없이 창설된 광복군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 중국군에 예속된 지원군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기존의 조선의용대가 중국 군사위원회에 예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관계를 고려해 같은 방식으로 임하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광복군은 이에 대해 대한민국과 중국이 동맹군임을 주장하며 반발하였으나 교섭은 순조롭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광복군은 중국 내지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중국 당국 승인 없이 활동하기가 힘들었다. 특히 광복군의 활동 경비는 중국의 지원에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임시 정부에서도 중국 정부의 인준을 받기 위해 여러 차례 교섭을 진행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1941년 3~5월 사이 조선의용대 대원 대부분이 중국 공산당 거점 지역인 화북으로 진출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임시 정부와 중국 군사위원회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다. 이로 인해 중국 정부는 조선의용대는 물론 광복군까지 확실하게 통제할 필요가 있었다. 그 결과 장개석(蔣介石)의 지시로 광복군과 조선의용대를 중국 군사위원회에 예속시키고, 참모총장이 직접 장악하여 운영하게 되었다. 1941년 10월 30일 중국 군사위원회는 광복군의 활동을 규제하는 「한국 광복군 행동 준승 9개 항」을 요구하고, 광복군을 중국군사위원회 판공청(辦公廳)에 배속시켰다. 이로써 광복군의 통수권과 작전지휘권 등이 중국 군사위원회에 넘어갔고, 광복군에 상당수 중국 측 인물이 파견되어 활동을 간섭⋅통제하였다.

이처럼 임시 정부로서는 어쩔 수 없는 현실적인 조건 때문에 중국 정부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후 광복군의 자주권 회복을 위하여 지속적으로 ‘9개 준승’ 개정 교섭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마침내 1944년 8월 중국 군사위원회로부터 ‘9개 준승’을 취소하고 광복군을 임시 정부에 직속시킨다는 공식 통보를 받았다. 이로써 광복군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독자적 지휘를 받는 직속 군대로 다시 태어났고,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항일 전선에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저서
『한국광복군』(한국독립운동의 역사 52), 김광재,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7.
『광복 직전 독립운동 세력의 동향』(한국독립운동의 역사 56), 정병준,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9.
『대한민국임시정부Ⅲ-중경시기』(한국독립운동의 역사 25), 한시준,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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