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방(東方)은 바다의 한쪽 구석에 치우쳐 있어 일찍이 외국과 교섭한 적이 없기 때문에 견문이 넓지 못한 채 삼가고 스스로 단속하여 지키면서 500년을 내려왔다. 근년 이래로 천하의 대세는 옛날과 판이하게 되었다. 영국·프랑스·미국·러시아 같은 구미 여러 나라에서는 정교하고 이로운 기계를 새로 만들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들은 화륜선을 타고 지구를 두루 돌아다니며 모든 나라와 조약을 체결하여, 군사력으로 서로 견제하고 공법(公法)으로 서로 자기 의견만 고집하고 양보하지 않는 것이 마치 춘추시대 열국의 세상을 방불케 한다. 그러므로 천하에서 홀로 존귀하다는 중화(中華)도 오히려 평등한 입장에서 조약을 맺고, 서양 배척에 엄격하던 일본도 결국 수호 조약을 맺고 통상하고 있으니, 어찌 까닭 없이 그렇게 하는 것이겠는가. 참으로 형편상 부득이하기 때문이다.
드디어 우리나라도 병자년(1876) 봄에 일본과 우호를 거듭 강구하여 세 곳의 항구를 여는 것을 허락했고, 이번에 또 미국·영국·독일 등 여러 나라와 새로 화약(和約)을 맺었다. 이는 처음 있는 일이니 너희 사민(士民)들이 의심하고 비방하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교제의 예(禮)는 모두 평등하므로 의리로 헤아려 볼 때 장애될 것이 없다. 군사를 주둔시키는 의도는 본래 상인을 보호하는 데 있으니, 일의 형세를 참작하더라도 또한 걱정할 것이 없다.
교린(交隣)
에 도(道)가 있다는 것은 경전(經典)에 나타나 있는데, 사리에 어둡고 막혀 있는 유생들은 송나라 조정이 금나라와 화의(和議)를 했다가 나라를 망친 것만 보고 망령되이 끌어다 비유하여 번번이 척화(斥和)
의 논의에 갖다 붙이고 있다. 상대 쪽에서 화의를 가지고 왔는데 우리 쪽에서 싸움으로 대한다면 천하가 장차 우리를 어떤 나라라고 할지 어찌 생각하지 않는단 말인가. 고립되어 남의 도움이 없고 만국과 틈이 생겨 공격의 화살이 집중되면 패망할 것이라는 것을 스스로 헤아리면서도 조금도 뉘우치지 않으니 의리에 있어서 과연 무엇에 근거하고 있는가. 주장하는 자들은 또 서양 나라들과 수호를 맺는 것을 가지고 점점 사교(邪敎)에 물들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진실로 유교를 위해서나 세상의 가르침을 위해서나 깊이 우려되는 문제이다. 그러나 수호를 맺는 것은 수호를 맺는 것이고 사교를 금하는 것은 사교를 금하는 것이다. 조약을 맺고 통상하는 것은 다만 공법에 의거할 뿐이다. 당초 내지(內地)에 서교를 전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니, 너희들은 평소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을 익혀 왔고 오랫동안 예의의 풍속에 젖어 왔는데 어찌 하루아침에 정도(正道)를 버리고 사도(邪道)를 따를 수 있겠는가? 설사 어리석은 백성들이 몰래 서로 서교를 전하며 익힌다 하더라도 나라에 떳떳한 법이 있는 이상 처단하고 용서하지 않을 것이니, 어찌 숭상하고 물리치는 데에 그 방도가 없다고 근심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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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기계를 제조하는 데 조금이라도 서법(西法)을 본받는 것을 보기만 하면 대뜸 사교에 물든 것으로 지목하는데, 이것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들의 종교는 사특하니 마땅히 음탕한 음악이나 미색(美色)처럼 멀리해야겠지만, 그들의 기계는 이로워서 진실로 이용후생(利用厚生)할 수 있으니 농기구·의약·병기·화륜선과 같은 제조를 어찌 꺼려하며 하지 않겠는가. 그들의 종교는 배척하고 기계를 본받는 것은 진실로 병행하여도 사리에 어그러지지 않는다. 더구나 강약의 형세가 이미 현저한데 만일 저들의 기계를 본받지 않는다면 무슨 수로 저들이 얕보는 것을 막고 저들이 넘겨다보는 것을 막을 수 있겠는가. 참으로 안으로 정치와 교육을 닦고 밖으로 이웃 나라와 수호를 맺어 우리나라의 예의를 지키면서 각국의 부강한 방법을 취하여 너희 사민들과 함께 태평성대를 누릴 수 있다면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지난번에 교화하기 어려운 자들을 예사로 보고 백성들의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마침내 6월의 변고(임오군란
)가 일어나 이웃 나라에 신의를 잃고 천하에 비웃음을 사게 되었다. 나라의 형세는 날로 위태로워지고 배상금은 수만이나 되었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는가. 일본인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언제 우리를 학대하고 모욕하며 우호에 어긋난 일을 한 적이 있었는가. 그러나 다만 우리 군인과 백성들이 함부로 의심해서 멀리하고 오랫동안 분노의 감정을 품고서 이렇게 까닭 없이 먼저 범하는 행동이 있게 되었다. 너희들은 그 잘못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생각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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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다행스럽게도 일처리가 대강 이루어져서 옛날의 우호 관계를 다시 펴게 되었고, 영국과 미국 등 여러 나라들이 또 뒤이어 와서 조약을 맺고 통상하게 되었다. 이는 세계 만국의 일반적인 관례로 우리나라에서 처음 행해지는 것이 아니니, 결코 경악할 일이 아니다. 너희들은 각기 두려움 없이 편안히 지내면서 선비들은 부지런히 공부하고 백성들은 편안히 농사를 지으며, 다시는 ‘양(洋)’이니 ‘왜(倭)’니 하면서 근거 없는 말을 퍼뜨려 인심을 소란하게 하지 말라. 각 항구와 가까운 곳에서 비록 외국인이 한가롭게 다니는 경우가 있더라도 마땅히 일상적인 일로 보아 넘기고 먼저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만일 저들이 능멸하거나 학대하는 일이 있다면 응당 조약에 따라 처벌하며 결단코 우리 백성들을 억눌러 외국인을 보호하는 일이 없게 할 것이다.
아, 어리석게 자기 생각만 고집하며 제멋대로인 것은 성인(聖人)이 경계하는 바이고, 아랫사람으로서 윗사람을 비방하는 것은 왕법(王法)에 죽이는 죄에 해당한다. 가르쳐 주지도 않고 형벌을 주는 것은 백성을 속이는 것이 되므로 이에 나열해 말하여 두루 유시(諭示)한다. 그리고 이미 서양의 나라와 수호를 맺은 이상 서울과 지방에 세워 놓은 척양(斥洋)에 관한 비문들은 시대에 맞는 조처가 아니니 모두 뽑아 버리도록 하라. 너희 사민들은 각기 이러한 뜻을 잘 알라. 그리고 의정부
는 이를 게시하여 8도(道)와 4도(都)에 알리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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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실록』 권19, 고종19년 8월 5일(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