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근대경제개항 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외국 상인의 진출에 대한 서울 상인들의 대응

객반위주

예산군 및 온양군 장시(場市)에서 발생한 문제를 본 신문사에 보내 왔기에 다음에 기록한다.

대한이 개항한 이래 외국 상인은 각 항구에서만 장사를 해 왔다. 그러나 1894년 이후로 청국 상인이 예산읍과 온양읍 두 장시에 수없이 찾아와 가게를 차리고 장사를 하여 상권이 모두 청국 상인에게 넘어가 버렸을 뿐만 아니라 지난 4, 5년간 행패가 막심하였다. 이번 음력 9월에 다행히 조정의 지엄한 명령에 따라 청국 상인을 모두 몰아내라는 훈령이 충청남도 관찰부에 내려졌고 관찰부에서 각 읍에 관문(關文)을 보냈다. 하지만 청국 상인들은 일체 무시하고 행패는 더욱 심할 뿐이었다. 이 때문에 우리 상인들은 분함과 원망을 이기지 못해 예산군에 호소했고 상인이든지 촌민이든지 청국 상인과는 물건 하나도 사고 팔지 않았다. 그러자 음력 10월 20일에 예산장에서 청국 상인 100여 명이 갑자기 무리를 지어 총, 창, 칼, 몽둥이 등을 가지고 시장을 때려 부쉈다. 이런 흉악한 무리들에게 힘없는 상인들이 어떻게 저항하겠는가. 한바탕 풍파가 일어나던 중 이들에 의해 부상을 당해 사경을 헤매게 된 사람이 30명이고 재산을 빼앗긴 것은 셀 수도 없다. 세상에 이런 원통한 일이 있었던가. 우리 상인들이 더욱 분함과 원통함을 이기지 못해 다시 예산군에 호소를 하니 잠시 물러나 기다리라는 분부가 있었다. 이에 충남 관찰부로 올라와 북을 치면서 억울함을 호소하니 관찰부의 분부에서도 ‘청국 상인들이 스스로 물러나는 날이 있을 것이니 우선 물러나 기다리라’고 하였다. 청국 상인들은 더욱 기고만장하고 있으며 우리 상인들은 예산장에 들어가지도 못한 지 이미 여러 장이 지났다. 연말에 상인이 한 번 장시에 참가하지 못해도 손해가 막심한데 이렇게 처리가 지연되고 있으니,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큰 피해를 겪고 있을지 알 수조차 없다. 이에 상경하여 외부에 고소했으니, 이 상황을 귀 신문에 상세히 기재하여 대한 관민과 각국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 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황성신문〉, 1898년 12월 16일

客反爲主

禮山溫陽塲市商瘼事實을本社에寄送엿기로左記노라

自大韓開港以後로外國商人이各港口에셔만行商이더니自甲午以後로淸商이右兩邑塲市에滋蔓허와至於買屋設舖허와商販專權이盡歸於淸商이올더러這間作弊가太甚이于玆四五年矣러니今陰曆九月分에幸蒙 朝令이切嚴허와淸商을盡爲逐出之意로發訓于本營而自營發關于各邑이온바淸商等이少無動念이고如前作弊尤甚故로本商等이不勝忿寃허와號訴于禮山郡後에本商等이던지村民이던지淸商과一分物도買賣를永杜허엿더니不意陰曆十月二十日에禮山塲에셔淸商百餘名이作黨허와各持銃鎗劒棒허고亂打塲市허온즉如此頑漢을殘商等이何以抗拒乎잇가一塲風波中被頑凶之鋒와幾至死境者三十名이고錢財見奪이不計其數이온즉世豈有如許至寃極痛之事乎잇가本商等이尤不勝忿寃허와更訴于禮山郡則姑爲退待之意로題下시기로卽爲上營와擊皷號訴이온즉營題內開에自有逐送之日矣姑爲退待라시온즉淸商等은尤極乘勝와本商等은不能入於禮山塲이爲數三塲矣라年終商民이一塲不見이오면利害夥多이온바如此延遷則商業之民이不知至何境故로卽爲上京와呈訴于外部얏오니詳細記載于貴新聞와大韓官民과至於各國人이라도咸知케여달나고엿더라

〈皇城新聞〉, 1898年 12月 16日

이 사료는 청과 일본을 비롯한 여러 나라와 수교를 맺은 후 조선의 내륙 지방 중 충청남도 예산군 및 온양군에서 일어난 청국 상인들의 행패에 대해 고발한 〈황성신문〉 기사 내용이다.

1876년(고종 13년) ‘조일 수호 조규(朝日修好條規)’를 통해 일본과 최초의 근대적 외교 관계를 맺은 조선은 그 외교 범위를 점차 서구 여러 국가로 확장했고, 그 과정에서 주요 항구들을 개항하면서 외국 상인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외국 상인들의 출입은 개항장(開港場)을 중심으로 한 10리 안 지역에만 제한했으며, 수도인 한성을 포함한 내륙 지방 상권은 여전히 조선의 전통 상인들이 장악하였다.

그러나 개항장을 통해 외국 상품이 수입되고 외국 상인이 대거 진출함에 따라 국내 상인들은 스스로 상권 보호를 위해 대책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외국 상인들과 직접적으로 경쟁할 수밖에 없던 개항장의 객주(客主), 여각(旅閣)들은 상인 조합이나 단체 등을 설립하여 이에 대응하고자 하였다. 1883년(고종 20년)에는 원산 상인들이 처음으로 상의소(商議所)를 설립했고 1885년(고종 22년)에는 부산과 인천에 객주회(客主會)가 조직되었다. 1890년(고종 27년)에는 인천에서 객주회가 전국을 25개 지역으로 나누어 객주 간에 지역 담당제를 실시하고 도매업⋅운송업 등에 관여하였다. 객주회는 지역에 따라 상의소(商議所), 상법회사(商法會社), 균평회(均平會社)사, 사상회(士商會) 등 다양한 명칭을 지녔으나 기능과 설립 목적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한편, 객주회 등의 상인 조합이나 단체 등의 결성과는 별도로 대도시 상인들 중에서는 근대적인 상회사(商會社)를 조직한 경우도 있었다. 주로 유통 부문에 집중하여 당초 궁방 등 왕실과 결탁한 도고(都賈)의 성격을 띤 것도 있었으나, 점차 정부 허가제와 영업세 제도에 의한 주식회사의 성격을 띠어 갔다. 대표적인 사례로 1883년 6월 평양의 전통 상인들이 설립한 합자 회사인 대동상회(大同商會)는 주로 재령, 해주, 봉산, 장연 등지에서 소가죽이나 쌀 등을 수집해 판매하였다. 이 외에 1884년(고종 21년) 6월 충남 지역을 중심으로 설립된 의신상회사(義信商會社)와 그 해 인천에서 업무를 시작한 순신창상회(順信昌商會) 등이 있다.

대부분의 상회사는 정부가 발행하는 빙표(憑票)를 가지고 전국 어디서나 자유롭게 거래를 하였다. 상회사는 지방관이나 특권 상인들로부터 각종 잡세를 징수당하지 않도록 정부의 특별한 보호를 받았으며, 인천의 광성 회사나 부산의 동항 회사처럼 정부의 지방 상인에 대한 영업세 징수 업무를 대행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상회사는 전통적인 특권 상인의 성격을 일부 지녔기 때문에 지방의 도고 상인들과 상권을 둘러싼 분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1894년(고종 31년) 갑오개혁 이전까지 시전, 공인, 객주, 여각 등의 유통망을 대신해 설립된 상회사는 약 40여 개로 추산된다.

이러한 조선 상회사의 발전은 1882년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과 1883년 ‘조영 수호 통상 조약(朝英修好通商條約)’에 의해 서울 및 내지(內地)가 외국 상인에게 허용되면서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특히 전통적으로 상업의 중심지면서 지방과 개항장을 연결하는 국내 유통망의 중추적 위치에 있던 한성의 개방은 국내 상업계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조선과 전통적으로 사대 주종 관계를 유지하던 청국 상인들은 한성에 직접 거주하면서 조선 상권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육의전을 직접 공략하는 한편 여러 가지 폐단을 일으켰다.

이에 1887년(고종 24년) 2월, 1889년(고종 26년) 12월과 1890년 1월 등 세 차례에 걸쳐 육의전과 시전 상인들이 주도하여 철시(撤市, 시장 철수) 파업 및 시위투쟁을 벌이면서 외국과의 조약을 개정할 것을 정부에 요구하였다. 외국 상인들의 내지 진출은 조선의 육의전 및 시전 등 대형 상인들뿐만 아니라 노점상이나 보부상들의 상권마저 침해했기 때문에 상인들의 저항은 대규모로 일어났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조선 정부에게는 조약을 개정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으며, 상인들이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도 한계가 있었다.

이처럼 개항 후 조선에 침투한 외국 상인들이 세력을 확장하면서 그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국내 상인들과의 마찰은 빈번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 사료를 〈황성신문〉에 기고한 사람의 말에 따르면, 예산군과 온양군 장시에서 청국 상인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된 것은 1894년부터라고 한다. 그 해 7월 일본은 청일 전쟁의 와중에 조선의 경복궁을 점령하여 조선 정부를 장악했고, 이때부터 조선의 내정과 외교는 일본의 영향력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 정부는 7월 25일 청과의 모든 외교 조약에 대해 일방적인 파기를 선언하였다. 이후 청일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굳어진 12월에, 기존의 청국 상민 대우와 관련한 모든 조약을 대신할 새로운 규칙인 「보호 청상 규칙(保護淸商規則)」이 제정되었다.

이 규칙은 총 9개 조문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중 제1조가 청국인의 거주지를 한성 성내 및 인천, 부산, 원산 등 종래의 개항장 및 개시장으로 제한하는 내용이었다. 이에 따르면 청일 전쟁 이후 조선에 거주하는 청국 상인들이 내륙 지방에서 점포를 개설하여 상행위를 하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되었다. 그러나 조선 정부가 민감한 대청 외교와 관련된 문제를 용이하게 처리하기 위해 청국 내 조선인과 조선 내 청국인의 보호 문제를 영국 총영사에게 위탁하면서 문제가 더욱 복잡하게 되었다. 조선에서 청국 상인들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재판에 영국 총영사가 관여하게 되면서 현실적으로 치외법권을 계속 유지하게 된 청국 상인들이 불법으로 규정된 내륙 지방에서의 정착 상행위를 계속 추진했던 것이다. 더욱이 청국 상인들은 청일 전쟁 이후 일본과의 정치 외교적 대결에서 패배하고 한성 상권에서 영향력을 잃게 되자 지방 상권을 적극적으로 공략하는 모습을 보였다. 본 사료는 그러한 청국 상인들의 동향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청국 상인들의 공격적인 불법 영업으로 인해 예산 및 온양의 조선 상인들과 일반인들이 연합하여 청국 상인 불매운동을 벌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시장에 청국 상인들이 무기를 들고 찾아와 폭력을 행사했으며, 이 과정에서 다수의 부상자와 재산 파괴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할 행정기관에서는 뚜렷한 대응을 하지 못하였다. 이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당시 조선의 관인들이 청국 상인들을 통제할 권한을 갖고 있지 못한데다, 전통적인 중화 사대 관념이 잔재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지역 상민들은 생업을 위해 외부에 직접 호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청일 간의 국제 분쟁이 격화된 상황에서 대등한 경쟁을 할 만한 실력을 갖지 못한 조선 정부는 줄곧 미온적 대응을 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 피해는 고스란히 서민들이 져야만 하였다. 이 사료는 외국인의 행패에 대한 권력의 무력한 대응, 이에 대한 자구책을 마련해 나가면서 저항하는 상민들의 양상을 볼 수 있는 내용이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저서
『독립협회연구: 독립신문⋅독립협회⋅만민공동회의 사상과 운동』, 신용하, 일조각, 1981.
편저
『한국사』12(근대민족의 형성 2), 강만길 외, 한길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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