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근대사회개항 후 사회 구조와 의식의 변화

신분 제도의 폐지와 사회 관습의 개혁

대조선 개국 503년(1894) 6월 28일

의안

1. 이제부터는 국내외의 공사(公私) 문서에 개국 기년(開國紀年)을 쓴다.

1. 청국과의 조약을 개정한 후 각국에 특명 전권 대사를 파견한다.

1. 문벌, 양반평민들의 등급을 없애고 귀천에 관계없이 인재를 선발하여 등용한다.

1. 문관과 무관의 높고 낮은 구별을 폐지하고, 단지 품계(品階)에 따르며 별도로 서로 만났을 때의 의례를를정한다.

1. 죄인 본인 이외에 [가족을 함께 처벌하는] 연좌율(緣坐律)을 일체 시행하지 않는다.

1. 처와 첩에게 모두 아들이 없을 경우에만 양자를 데려오는 것을 허락하여 옛 법[舊典]을 거듭 밝히도록 한다.

1. 남녀가 [어린 나이에 결혼하는] 조혼(早婚)을 신속하고 엄격하게 금지한다. 남자는 20세, 여자는 16세 이상이라야 비로소 혼인을 허락한다.

1. 과부가 재혼하는 것은 귀천을 막론하고 그 자유에 맡긴다.

1. 공노비사노비에 관한 법을 일체 혁파하고 사람을 사고파는 일을 금지한다.

1. 평민이라도 나라에 이롭고 백성을 편안하게 할 수 있는 의견이 있으면 군국기무처에 글을 올릴 수 있고, 그것을 회의에 부친다.

1. 각 관청의 (경호⋅경비⋅사령 등에 종사하던 하급 군관인) 조례(皁隷)들은 상황을 판단하여 더 줄이거나 더 둔다.

1. 조정 관리의 의복 제도에서 임금을 뵐 때의 관복(官服)은 사모(紗帽)와 깃이 둥글고 소매가 좁은 장복(章服)으로 하며, 품대(品帶)와 화자(靴子)를 사용한다. 한가히 지낼 때의 사복(私服)은 갓, 탑호(搭護), 실띠로 한다. 사대부와 백성들의 의복 제도는 갓, 두루마기, 실띠로 하고, 군인의 의복 제도는 최근의 예규에 따라 장수와 군졸 간에 차이를 두어서는 안 된다.

『경장의정존안』, 고종 31년 6월 28일

大朝鮮開國 五百三年六月二十八日

議案

一. 從今以後, 國內外公私文牒, 書開國紀年事.

一. 與淸國改正約條後, 派送特命全權大使于列國事.

一. 劈破門閥班常等級, 不拘貴賤, 選用人材事.

一. 廢文武尊卑之別, 只從品階. 另有相見儀事.

一. 罪人自己外, 緣坐之律, 一切勿施事.

一. 嫡妾俱無子然後, 始許率養, 申明舊典事.

一. 男女早婚, 亟宜嚴禁. 男子二十歲, 女子十六歲以後, 始許嫁娶事.

一. 寡女再嫁, 無論貴賤, 任其自由事.

一. 公私奴婢之典, 一切革罷, 禁販買人口事.

一. 雖平民, 苟有利國便民之起見者, 上書于軍國機務處, 付之會議事.

一. 各衙署皁隷, 酌量加減設置事.

一. 朝官衣制, 陛見衣服, 紗帽⋅章服【盤領窄袖】⋅品帶⋅靴子, 燕居私服, 漆笠⋅搭護⋅絲帶, 士庶人衣制, 漆笠⋅周衣⋅絲帶, 兵弁衣制, 遵近例, 將卒不宜異同事.

『更張議定存案』, 高宗 31年 6月 28日

이 사료는 1894년 갑오개혁 당시 군국기무처가 처음으로 내놓은 사회 개혁안이다. 신분제가 공식적으로 폐지된 것은 갑오개혁 시기 개화파 정권이 설치한 군국기무처가 내놓은 법령에 의해서였다. 개항 이후 신분제를 폐지하라는 압력은 동학 농민 운동으로 구체화되었다. 동학 농민군이 요구한 폐정 개혁안에는 신분제 개혁을 요구하는 내용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농민군 사이에 퍼져 있던 동학의 평등 사상이 신분 관념을 깨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민씨 척족 세력이 이끄는 한국 정부는 농민들의 요구를 막을 수 있는 대책 수립에 고심하며 교정청을 세웠다. 하지만 일본군이 불법적으로 경복궁을 점령한 이후 개화파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들은 일본의 지원을 등에 업고 등장했지만 오래 전부터 구상하던 나름의 개혁 방안을 제시하였다.

1894년 6월 25일(음력) 궁궐에 설치된 입법 기구인 군국기무처는 사흘 뒤 신분 제도 폐지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개혁안을 의결하였다. 군국기무처는 7월 2일에는 역인(驛人), 광대, 피공(皮工) 등 천민 제도를 폐지한다고 발표하였다. 공사 노비 제도를 폐지하고, 천민을 해방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양반상민 사이의 차별 철폐와 양반 사이의 차별, 즉 문벌 위주로 관료를 임용하던 관행을 철폐하고, 신분과 무관하게 정치적 의견을 제출할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7월 3일 발표된 과거제 폐지와 맞물려 양반 지배층 사회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와, 이후 관료를 선발하는 새로운 제도가 마련되었고, 경전 중심의 전통적인 유학 교육을 대신하여 신식의 학교 교육이 실시되었다. 신분제의 폐지와 양반의 특권 폐지는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특히 공사 노비 제도의 폐지는 고대 사회 이래로 수천 년 동안 지속되어 온 신분제의 기본 틀이 깨지는 것을 의미하였다. 동시에 신분제를 바탕으로 성립된 중세 봉건 사회가 해체되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개혁 조치는 잘못된 제도를 개혁하라고 요구하는 동학 농민군의 요구를 수용함으로써 농민군의 봉기를 억누르고, 다른 한편에서는 양반의 특권을 철폐함으로써 양반 관료 사회 내부의 재편성을 의도한 것이었다.

이러한 조치에 대해 갑오 농민군뿐만 아니라 전국의 중인양인천인들은 크게 환호하였다. 그러나 노비 제도 폐지를 둘러싸고 향촌 사회에서는 양반노비의 갈등이 극에 달하였다. 특히 동학 농민 운동이 지속되던 시기에는 천인, 노비들이 양반을 질책하고 양반의 상징인 갓을 빼앗아 찢어 버리거나 욕을 보이는 일도 일어났다.

한편 개혁 조치에 대한 양반의 반발에 직면한 개화파 한국 정부는 일부 관직 대기자들에게 약간의 봉급을 지급하고 향후 관직에 등용하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8월 10일에는 노비양반 사이의 신분 투쟁이 첨예화되는 것을 완화하기 위해 위의 군국기무처 의안을 해설하였다. 즉 노비 제도를 폐지하는 것은 자비를 베푸는 조치이며, 양인을 강제로 천민으로 만들어 노비를 재생산하는 것을 금지하려는 의도였지, 노비로 판매된 자를 해방시키는 조치는 아니라고 설명한 것이다. 이러한 조치는 개혁의 속도를 늦추는 완화책이었다. 을미개혁을 주도한 내부 대신 박영효도 음죄(淫罪)를 범한 여자를 관노비에 편입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리면서도 이미 공노비로 있던 관기를 해방시키는 조치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다. 노비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그 수를 줄이는 조치만을 취함으로써 갑오개혁의 완화된 신분 제도 개혁 방침을 이어 나갔다.

군국기무처는 신분제 폐지와 함께 사회 관습의 철폐도 제시했다. 과부의 재혼 허용, 적자와 서자의 차별 폐지, 연좌 제도 폐지, 조혼 관습 폐지 등 관료제나 가족 제도와 관련된 사회 관습으로부터의 해방을 선언하였다. 사회 관습의 개혁은 제도 개혁과 달리 일상 생활 영역에 깊이 뿌리내린 규범을 바꾸려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미친 사회적 파장은 엄청났다. 과부의 재혼을 금지하는 관습은 정절을 강조하면서 양반층 중심의 가부장적 가족 제도를 유지하는 수단이었는데, 일반 상민들에게까지 널리 침투해 있었다. 연좌제나 서얼 차별 같은 관습도 과거 제도 운영과 맞물려 양반 중심의 관료제를 운영해 나가는 장치였다. 특히 서얼 차별은 조선 사회에서 민감한 문제였다. 양반 지배층의 적지 않은 수가 첩을 소유했기 때문에, 서얼들은 조선 후기 내내 과거에 응시하게 해 달라는 허통 운동(許通運動)을 벌여 나갔다. 조혼 금지 문제는 아들을 낳아 일찍부터 가문을 이어 갈 자손을 확보하려는 의도에서 등장한 관습이었다. 신분과 관직에 따라 달랐던 의복 제도는 지배층에게는 권위의 상징이었고 피지배층에게는 신분적 제약의 상징이었다. 의복 제도의 개혁은 신분적 차별의 외적 표현을 없애는 조치였다. 그러나 사회 관습을 개혁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후일 단발령을 계기로 폭발하였고, 의병이 전국적으로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개화파 정권이 의결한 신분제 폐지 개혁안과 사회 관습 폐지 정책은 동학 농민군의 폐정 개혁 요구를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세력 기반을 확대하려는 방안으로 제기된 것이었다. 가장 상징적 의미를 지녔던 신분제 폐지 정책은 수정, 후퇴하면서 수위가 조절되었지만, 이미 시대의 대세가 되었다. 이후 호구 조사 제도를 시행하고 형법을 제정함으로써 신분 제도 폐지를 실질적으로 제도화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갑오개혁 이후 일반 사람들은 봉건적 신분으로 위치지워진 것이 아니라 근대 국가의 평등한 주민으로 편성되었다. 곧 1894년 사회 신분 제도의 폐지는 수천 년 묵은 제도의 폐지로, 근대 사회로 향해 가는 첫 걸음이 되었다고 하겠다. 그 뒤 대한제국은 갑오개혁에서 추진했던 개혁안의 기본 골격을 그대로 계승하면서 점진적으로 개혁을 추진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수정해 나갔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1894년의 사회신분제의 폐지」,『규장각』9,신용하,,1985.
「갑오개혁기 갑오정권의 신분제폐지정책」,『한국근현대의 민족문제와 신국가건설』김용섭교수정년기념한국사학논총간행위원회,조성윤,김용섭교수정년기념한국사학논총간행위원회,1997.
저서
『한국 근대국가의 형성과 갑오개혁』, 왕현종, 역사비평사, 2005.
『갑오경장연구』, 유영익, 일조각, 1997.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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