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근대문화근대 문물의 수용과 발전

지석영의 종두법(우두법) 전파

우리나라에 두진(痘疹)이란 질병이 있는데, 어느 시대부터 있게 된 것인지 알 수 없다. 그 질병이 천기에 따라 전염되기 때문에 ‘시두(時痘)’라고 일컫는데, 때가 되면 번지는 것이다. 100년 이래로 사람들의 재주가 차츰 열려서 비로소 접종하는 방법이 발명되었는데, 그것을 일러 종두(種痘)라고 하니 접종을 하여 감염되도록 하는 것이다. 시두는 증세가 치명적이어서 유아 사망자가 줄을 이었는데, 종두를 하면 감염이 되더라도 증세가 점차 약화되어 치료가 비교적 쉽다. 근세에 우두법(牛痘法)이 서양에서 나와 오대주에 전해진 지 이미 수십 년이 되었으나 우리나라는 막연히 모르고 있었다. 서울의 지석영(池錫永)이란 사람은 역관 집안 출신으로 시 짓기를 좋아하고 서화도 잘했다. 일본에 유학하여 우두법을 배워 기묘(1879)⋅경진(1880) 연간에 서울에 약국을 설치하고 지방의 노는 사람들을 모집하여 교습시켰다. 이에 우두법이 점차 팔도에 행해지게 되었다. 종두 방법은 시두에 걸리는 것에 비하면 열 배는 온전하다고 할 수 있으나 잘못되어 죽는 자도 더러 있었다. 우두법이 나오고 부터는 만에 한 명도 죽지 않게 되어 종두법은 드디어 폐지되었다. 그러나 우두법이 처음 시행되었을 때는 사람들이 종두가 처음 시행될 때처럼 의심하였다.

『매천야록』권1, 갑오이전 상

東方之有痘疹, 不知始于何代. 其天行傳染者, 謂之時痘, 以時至則染也. 百年來, 人巧漸通, 始剏傳種之法, 謂之種痘, 以種之則感也. 時痘症多險, 殤夭相屬, 種痘毒漸殺, 捄治較易. 近世牛痘之法, 自泰西延及五洲, 盛行已數十年, 而我國漠然未之聞. 京師有池錫永者, 象胥之家也. 攻小詩解書畵, 遊日本, 學牛痘, 以己卯庚辰(高宗十六⋅七年)間, 設局京中, 延外方遊手敎習之, 漸次行于八域, 種痘比之時痘, 可稱十全, 然橫折者間亦有之. 牛痘出而萬無一失, 種痘遂廢, 然方其始也, 人猶疑(之), 如種痘之始.

『梅泉野錄』卷1, 甲午以前 上

이 사료는 황현(黃玹, 1855~1910)이 저술한 『매천야록(梅泉野錄)』에 기록된 우두법(牛痘法)에 관한 기록으로 개항기의 대표적인 개인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황현은 두진(痘疹)에 대한 치료법을 시두(時痘)⋅종두(種痘)⋅우두(牛痘)로 구분했는데, 시두는 자연적으로 감염되는 천연두, 종두는 천연두 환자의 균을 이용하는 방법, 우두는 소에 감염된 천연두 균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우두법이 도입되었을 때 종두법과 마찬가지로 많은 의심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근세에 우두법이 서구에서 만들어졌으나 한국에는 소개되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으며, 이를 지석영(池錫永, 1855~1935)이 최초로 도입했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우두 종법에 대한 기록은 1800년대 전반부터 보이며, 지역에 따라서는 시행된 경우도 있었다. 이는 황현의 정보가 부족했던 결과로 보인다.

종두법은 천연두 균을 소에게 감염시켜 약화시킨 뒤 이를 다시 사람에게 감염시켜 면역력을 얻게 하는 방법이다. 1796년(정조 12년) 5월 영국인 제너(E. Jenner, 1749~1823)가 발견했으며, 우리나라에는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마과회통(麻科會通)』 권말에 부기된 「종두기법(種痘奇法)」에 언급되어 있다. 한편 이규경(李圭景, 1788~1856)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1835년(헌종 1년) 정약용이 “일종의 기방(奇方)을 장(藏)하였다”고 하며 “젖소에서 발생되는 두종(痘腫)을 침으로 긁어내어 소아의 팔 위에 접종하고 그 자리에 우두가(牛痘痂)로 마찰하면 그 뒤에는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고 정확히 기술한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이 방법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이 종두법은 국부적으로 시행되어 오다 서학(西學)의 탄압과 함께 중단되었다. 그 뒤 1876년(고종 13년) 일본과 수호 조약이 체결되면서 다시 우리나라에 정식으로 전해지게 되었다. 당시 의사였던 지석영은 1879년(고종 16년) 10월 부산에 일본 해군에서 설치한 제생의원(濟生醫院)에 가서 2개월간 종두법을 실시하고 두묘(痘苗)3병(柄)과 종두 침 2개를 얻어 12월 하순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처가인 충청도 충주군 덕산면에서 40여 명에게 종두를 실시하였는데, 이것이 지석영이 최초로 실시한 종두이다. 그리고 이듬해 정월 중순 서울로 돌아온 지석영은 종두를 계속하다가, 가지고 올라온 두묘로는 양이 부족하자 1880년(고종 17년) 제2차 일본수신사를 수행하여 일본 도쿄로 가서 독우(犢牛)의 채장법(採漿法) 및 사양법(飼養法) 등을 배운 뒤 두묘 50병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서울에 종두장을 만들어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1894년(고종 31년) 갑오개혁이 단행되면서 의료 행정의 혁신으로 내무아문(內務衙門)에 위생국을 두고 전염병 예방 및 종두 사무 등을 맡게 하였으며, 우두종계소(牛痘種繼所)⋅종두의양성소⋅종두소⋅한성부 종두사(種痘司)⋅광제원(廣濟院)⋅대한의원⋅위생시험소 등으로 제도가 변화되어 갔다. 지석영은 이러한 제도의 중심에서 종두법 전파에 앞장선 한편 정치 개혁, 한글 보급을 주장하는 등 급진적 개화파로서 왕성하게 활동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조선후기 ‘두진’ 연구」,『한국문화』17,김호,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1996.
「지석영의 개화사상과 개화활동」,『한국학보』30,신용하,일지사,2004.
「한국의 우두법 도입과 실시에 관한 연구」,『한국과학사학회지』15,이꽃메,한국과학사학회,1993.
저서
『한의학에 미친 조선의 지식인들 : 유의열전(儒醫列傳)』, 김남일, 들녘, 2011.
『지석영전집』, 지석영, 아세아문화사, 1985.

관련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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