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國文)을 논하다
이종일
세계 각 처에서 각각 나라를 세워 인문(人文)이 각기 다르고 언어가 같지 않다. 그 방언에 따라 모두 문자가 있으니 모두 자기 나라의 국문이다. 동서양 모든 나라의 언어와 문자를 살펴보면 일본·청국·영국·독일·러시아·이탈리아 등의 나라는 언어가 각각 다르기 때문에 그 글자 또한 다르고, 영국과 미국은 언어가 같기 때문에 문자 또한 같다. 그러므로 문자는 언어의 대표이자 촬영물에 불과하다. 지금 우리 한국인 선비들이 줄곧 말하길 한문이 아니면 나라가 망하고 사람의 도리가 없어지며 세상의 일을 처리할 수 없다고 하면서, 국문은 여자나 아이들의 학문이라고 치부하며 서양 및 일본의 문자는 문자가 아니라고 하니, 이 얼마나 잘못된 의견인가?
무릇 한문이라는 것은 중국의 국문이다. 원래 그 나라의 언어에 나온 것이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쉽게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그 뜻과 언어가 서로 크게 달라 그 말은 있는데 해당하는 한문 글자가 없는 경우나, 그 한문 글자는 있는데 해당하는 사물이 없는 경우가 많다. 또 글자의 뜻은 아름답더라도 말로 분명하게 표현할 수 없는 경우도 있으며, 말은 지극히 아름답더라도 문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우도 있는 등 말과 글자가 서로 맞지 않아 배우기가 매우 어렵다. 훌륭한 인재라 하더라도 10년 정도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지식인의 대열에 들 수 없기에 끝내 노년에 이르기까지 한문에 파묻혀 지내야만 한다. 그래서 새롭게 나타나고 있는 세계의 학문을 배울 겨를이 없기 때문에 총명하고 준수한 자제들이 아닌 백성들은 새로운 학문을 전혀 배우지 못한다. 백성이 배우지 못해 무지하니 나라의 쇠약한 점이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전국의 백성 중에서 배운 자가 많은가, 배우지 못한 자가 많은가? 상고시대의 천황씨(天皇氏)·지황씨(地皇氏)부터 명국과 청국에 이르기까지 배운 것이 모두 중국의 문자이니, 감동하며 신앙하는 것이 모두 중국의 위인과 영웅호걸이며, 통달하고 이해하는 것이 모두 중국의 역사와 지리이며, 뇌수에 박힌 것이 모두 중국의 풍속이다. 우리나라의 성현
이나 역사나 풍토나 지리 등은 전혀 알지 못하여, 우리나라의 위대한 성현
이나 영웅이라도 간신히 이름만 알면서 중국 위인들 중에서 가장 낮은 등급으로 인정할 뿐이다. 의지하고 신앙하는 것이 모두 중국이니, 여기에서 무슨 자주(自主)의 마음이 나오겠는가. 지금의 상황을 보면서 어찌 가슴이 아파 피를 토하지 않겠는가.
'성현' 관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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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이 만들어진 원인을 생각해 보면, 결승문자(結繩文字)
들이 글자 모양을 개량하여 오늘의 형태를 이뤘고, 후세를 깨우쳐 주기 위해 정치·법률·미담·선행 등을 담은 책을 지어서 귀감이 되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이를 실천하려 하지 않고 다만 책을 많이 읽어 구절에만 파고들려고 하면서 성현의 문자임을 자처하니, 이것이 어찌 성현의 죄인이 아니겠는가? 선행을 본받으려 한다면 외국의 성현의 문자라도 무방한 것인데, 어찌 한문에만 헛되이 매달리면서 문자의 뜻을 자신의 삶으로 본받으려 하지 않는가?
끈에 매듭을 지어 글자를 표현
로는 모든 일을 다스릴 수 없기에 문자를 만들어 일을 기록하게 했다. 사물에 따라서 글자를 만들고, 글자는 각각 사물을 상징하게 한 것이다. 예를 들어 인(人)이라는 글자는으로 만들되 천(天)이라는 글자는로 하여, 사람의 머리 위에 일(一)을 얹은 것이다. 두(豆)라는 글자는 이며, 목(目)이라는 글자는 눈 모양을 본뜬 것이고, 식(息)이라는 글자는 새를 본뜬 것이다. 이를 미루어 보건대 그 문자들은 별다른 것이 아니라 사물을 기록하고 계약을 확정하며 뜻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후 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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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국문이라는 것은 동서양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모두 쉽게 배울 수 있는 것을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하여 30~40자를 넘지 않기 때문에, 지극히 우둔한 사람이라도 몇 개월만 배우면 그 글자를 배울 수 있고, 고등학문의 경우도 그 뜻만 배우면 되지 어려운 글자를 따로 배울 필요가 없다. 그런데 한문은 말과 글이 서로 맞지 않아 배우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글자 수가 너무 많아 당대의 문장가가 평생 공부만 했다 하더라도 그 글자를 다 배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생각해 보면 우리 국문은 28개의 글자만으로 천 가지 만 가지 말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엄청난 글자이다. 배우기도 매우 쉬워서 1~2일 혹은 4~5일 안에 그 뜻을 깨우쳐 책을 읽을 수 있다. 그 편리함과 쉬움이 세계의 모든 글자 중 제일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를 한문과 비교한다면 누가 이기고 누가 질지는 너무나 분명하다. 국문으로 효제충신(孝悌忠信)
효성스럽고 공손하며 충성스럽고 신실함
을 가르친다면 어찌 효성스럽고 공손하지 않겠는가. 국문으로 정치와 법률을 가르친다면 어찌 법을 거스르겠는가. 국문으로 농업·공업·상업을 가르친다면 어찌 곡식을 제대로 키우지 못하고 물건을 제대로 만들지 못하며 상품을 제대로 유통시키지 못하겠는가. 정치도 외교도 국문을 통해 가르칠 수 있고, 천문·지리 등 수많은 학문도 국문으로 가르쳐서 깨우치지 못할 것이 없다. 국문으로 한 번 가르치면 그 배운 바에 따라 실천하는 것이 한문으로 가르친 것에 비해 조금도 떨어지지 않는다. 우리 대한제국의 2,000만 백성들 중에서 한문을 익숙하게 깨우친 자 외에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말고 모두 교육시키되, 동네마다 학교를 설립하여 각 과목을 나누어 밤낮으로 가리키며, 처음에는 소학(小學)이나 수신학(修身學)에서 시작하여 우리나라 역사·지리·산술(算術)·물리·화학·법률·정치 등을 차례로 가르치면 4~5년 안에 2,000만 민족이 시무(時務)에 통달하게 될 것이다. 애국심을 길러 나라에 헌신하는 사람이 많아질 것이고 산업이 저절로 개발되어, 문명국의 자리로 나아갈 날을 기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만약 타인의 노예의 자리에서 벗어나 자신의 권리를 회복하고자 하는 열심을 조금이라도 가진 사람이라면, 이 글을 미친 사람의 망언으로 치부하지 말고 지난날 한문에 집착했던 고질적인 문제를 깨 버리고 국문의 발전에 힘쓰길 바란다. 그렇게 한다면 이 어찌 국가의 큰 행운이 아니겠는가.『대한협회회보』 2호, 1908년 5월 25일, 「논국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