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근대문화식민지 문화 정책과 그 대응

문자 보급 운동

문자 보급 운동

만천하의 지원을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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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조선인에게 무엇 하나 필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산업⋅건강⋅도덕이 다 그렇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필요하고 긴급한 것을 들자면 지식 보급일 것이다. 지식 없이는 산업이나 건강이나 도덕이나 지지되고 발달될 수 없다. 문맹자 앞에는 항상 바닥 모를 함정이 놓여 있다. 그들이 가는 곳에는 위험과 저주가 따라다닐 뿐이다. 농민의 생활을 보라. 노동자의 생활을 보라. 그리고 부인의 생활을 보라. 그들이 무지몽매하기 때문에 그 생활은 한층 더 저열하고 향상되지 못하지 않는가. 전 인구의 1000분의 20밖에 문자를 알지 못하고, 학령기 아동의 30%밖에 취학할 수 없는 현재 조선의 상황에서 간편한 문자 보급은 민족 최대의 긴급한 일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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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본사는 이를 절실히 느낀 바 있어 이미 6년 전부터 문자 보급 운동을 일으켰다. 다행히 학생 여러분의 순결하고 열렬한 동의를 얻어 그 결과 예상 이상으로 좋았던 것은 독자 여러분도 인정하는 바이다.

그런데 재작년부터 부득이한 사정으로 이 사업을 중지해야만 했던 것은 본사뿐만 아니라 조선 전체를 위해서도 유감이었다. 그러나 이제 본사가 모든 진용을 다시 회복하고 새롭게 하여 올해부터 계속 문자 보급 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는 독자 여러분의 열렬한 애호와 본사의 민중을 위한 성의의 결과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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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부터 문자 보급 운동에는 많은 비난과 어려움이 수반되었다. 비난이라 함은 아직 재학 중인 청소년 학생들로 하여금 대중을 지도하게 한다는 것과, 기껏 휴양할 시기에 있는 학생의 여름방학에 피땀 흘리며 협소한 장소에서 교육을 시킨다는 것이다. 어려움이란 문자 보급에 필요한 성의와 경제 등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난은 조선인의 특수성을 무시하는 것이니, 물론 재학 중인 청소년을 대중 교육에 내세우는 것이 좋은 현상은 아니지만 문화적으로 뒤떨어진 조선에서 이 일을 맡을 사람은 또한 대중보다 조금이라도 많이 알고 시간의 여유가 있는 청소년 학생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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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업을 속행하는 과정에서 수반되는 어려움은 분명히 문제가 되지만, 우리는 이를 고려할 여유가 없다. 우리에게 좋은 건물과 좋은 교사와 많은 시간이 있다면 굳이 문자 보급 운동을 일으키겠는가. 농민⋅노동자⋅부인⋅미취학 청소년들에게는 시간도 없고 교사도 없고 건물도 없다. 각 지역의 뜻 있는 분들의 찬조와 학생들의 성의로만 온전한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곧 조선의 문화 운동 역사상 특기할 만한 사실일 것이다. 제4회 문자 보급 운동을 다시 계속 조직하는 이때에 만천하 제현(諸賢)의 열렬한 지원을 바라는 바이다.

〈조선일보〉, 1934년 6월 10일

文字普及運動

滿天下의 支援을 望함

現下 朝鮮人에잇서서 무엇하나 必要치안은것이 업다. 産業과 健康과 道德이 다그러하다. 그러나 그中에서도 가장 必要하고 緊急한것을 들자면 知識普及을 除하고 다시엄슬것이다 知識이 업시는 産業이나 健康이나 道德이나 支持發達될수가 업다. 文盲압헤는 항상 밋모를 陷穽이 橫在햇스니, 그들의 가는곳에는 危險과 咀呪가 따라다닐 뿐이다. 農民의 生活을 보라. 勞動者의 生活을 보라. 그리고 婦人의 生活을 보라. 그들이 無智蒙昧하기때문에 그 生活은 一層 低劣하고, 向上되지못하지 안는가. 全人口의 千分의 二十박게 文字를 理解하지하지못하고, 學齡兒童의 三割박게 就學할수업는 現下 朝鮮狀態에잇서서 簡易한 文字의 普及은 民族의 가질 最大의 緊急事라하겟다.

일즉히 本社는 이것을 切實히 늣긴바잇서 이미 六年前부터 文字普及運動을 이르켯다. 僥倖히 學生諸君의 純潔하고, 熱烈한 同意를 어더 그成績이 豫想以上의 好結果를 매즌것은 讀者諸位의 認定하는바다.

그런데 再昨年來로 不得已한事情으로 一時 이事業을中止치아니치못하게된것은 홀로本社뿐아니라 朝鮮全體를爲하야 遺憾이엇섯다.

그러나 이제 本社가 모든 陣容을 다시恢復一新하야 今年부터 繼續하야 이文字普及運動을 이르키게된것은 讀者諸位의 熱烈한 愛護와 本社의民衆을 爲한誠意가發露된것으로 여기지아니할수업다.

由來 文字普及運動에는 만흔 批難과困難을 伴하기쉽다 批難이라하는것은 아죽 在學中의 靑少年學生들로하야금大衆을 指導케한다는것과, 깃것 休養할 時期에잇는 學生의夏期放學에 汗血을흘리며 狹窄한 場所에서 敎授를 시키는것이오,困難이라는것은 文字普及에 必要한 誠意, 經濟等이다 그러나 이러한 批難은 朝鮮人의 特殊性을 無視하는것이니 勿論 在學中 인靑少年을大衆敎導에 내세우는것이 好現象은아니나 文化的으로뒤떠러진 朝鮮에잇어서 이것을할者는 또한 大衆보다 多少라도 만히알고, 時間의餘裕가 잇는 靑少年學生들이 이所任을맛지안을수업다

그리고 이事業을 續行하는데에對한 困難性의隨伴이니, 이것도 또한 問題 안되는것이 아니나 그러나 우리는 이것도考慮할 餘裕가 업다. 우리에게 조흔 校舍와 조흔 敎師와 만흔 時間이 잇다할진대 구태여 文字普及運動을 이르키랴. 農民, 勞動者, 婦人, 未就學靑少年에게는 時間도업고, 敎師도업고, 校舍도업다 各其 四方有志의 贊助와學生들의 誠心으로써만 完全히그成果를 나타낼수잇스니 이는 곳 朝鮮의 文化運動史上에特記할 事實이다할것이다.

第四回 文字普及運動을 다시 繼續하야 組織함에際하야 滿天下諸彦의 熱烈한 支援을 望하는바이다

〈朝鮮日報〉, 1934年 6月 10日

이 사료는 〈조선일보〉 1934년 6월 10일자에 게재된 문자 보급 운동 참여를 독려하는 기사로, 문자 보급 운동은 1929년 조선일보사가 중심이 되어 전개한 애국 계몽 운동이다.

원래 대규모 농촌 계몽 운동은 1874년 러시아 학생들과 지식인들이 추진한 것이 시초라고 할 수 있다. 이때의 슬로건이 ‘하즈데니예 브 나로드(khozhdeniye v narod, 러시아어: хождение в народ)’였는데, 이는 ‘민중 속으로 들어감’이라는 의미로서 이상 사회를 건설하려면 지식인으로서 먼저 민중을 깨우쳐야 한다는 취지로 만든 구호이다. 이 구호를 앞세워 1874년에 수많은 러시아 학생들이 농촌으로 가서 계몽 운동을 벌였는데, 농민을 대상으로 급진적 혁명 사상을 전파하고 계몽과 선전을 벌이기 위해 2000여 명에 이르는 러시아 지식인과 학생이 농촌으로 들어가면서 정점을 이뤘다. 그러나 이 운동은 정작 농민들로부터 호응을 얻지 못했고, 주동자들이 체포되어 ‘193인 재판’을 받으면서 막을 내렸다. 하지만 이 운동은 농촌을 근간으로 한 사회주의적 급진 사상의 시발점이었으며, 많은 혁명가가 이를 통해 양성되었고 주변 여러 나라의 농촌 계몽활동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국내의 농촌 계몽 운동은 비슷한 소재의 소설 제목을 따서 ‘상록수 운동’이라고도 불렸는데, 1920년대 초 서울의 학생과 문화단체, 도쿄의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었다. 브나로드 운동의 예로 1926년 천도교 조선농민사에서 펼친 귀농 운동과 1930년대 수원 고등농림학교 한국 학생들의 문맹 퇴치 운동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농촌 계몽 운동과 함께 한글 보급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1930년대 초반 조선일보사가 중심이 된 ‘귀향 학생 문자 보급 운동’과 동아일보사 중심의 ‘브나로드 운동’이 대표적이다. 1927년 신간회 결성으로 좌파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연대하는 상황에서 전자와 관련이 있던 〈조선일보〉 측은 이미 야학이 가진 민중 교육 운동으로서의 역량을 인정하면서 이를 보다 조직적으로 발전시켜 ‘귀향 학생 문자 보급 운동’을 추진했다. 1927년 10월 9일자 ‘가갸날 기념 사설’에서 “조직 운동이 투쟁 운동을 위해 퍽 긴요한 준비 과정이 되는 것과 같이 교양 운동이 또 모든 운동의 출발점이 되는 것은 명백의 정도를 지나서 명백하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10월 26일자 사설에서는 “환멸기 로서아에 맹렬한 ‘브나로드’ 운동이 있었음을 안다. ‘브나로드!’ ‘민중 속으로!’ …… 민중 교양 운동의 공효(功效)가 얼마나 위대함을 보여줌에는 좋은 표본이 될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어서 1929년에는 마침내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라는 표어 아래 여름방학으로 귀향하는 중등학교 이상의 학생들을 동원해 문맹 퇴치를 목적으로 ‘귀향 남녀 학생 문자 보급 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1929년부터 1934년까지 4회에 걸쳐 8200여 명의 학생이 참여한 가운데 귀향지에서 ‘한글 원본’ 등을 교재로 하여 문자 보급 운동을 전개했다. 1931년에는 문자 보급반원 지망자가 1800명, 봉사한 자가 924명, 이에 대한 교본이 9만 5000부, 보고된 강습 인원이 2만 858명, 문자를 새로 배우게 된 사람이 1만 100명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문자 보급 운동의 성과는 시간이 흐를수록 그다지 만족스러운 것이 못 되었다. 이 사료의 내용을 보면 조선의 문맹률이 일본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음을 개탄하면서, 재정적⋅공간적⋅인력적 여건이 열악하지만 시급한 문맹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운동을 강행하겠다는 취지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문자 보급 운동이 종결된 이후인 1934년 9월 11일자 기사를 보면 “매우 좋은 성적을 나타낸 반원은 드물다”면서 그 이유로 직예총독부의 방해, 농사일에 따른 농민들의 어려움, 장소 문제, 경비 문제 등이 제시되었다. 직예총독부의 방해가 있었다는 것은 문자 보급 운동이 전개되는 하부에서는 ‘민족성’이 개입되는 사례가 빈번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의와 한계 속에서 지속된 문자 보급 운동은 결국 1936년 직예총독부의 금지명령에 의해 중지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일제강점기 조선어 교육과 조선어 말살정책 연구』,,김성준,경인문화사,2010.
「1930년대 문자보급운동과 브나로드 운동」,『한국학보』31,신용하,일지사,2005.
「일제시기 브나로드운동 재평가해야」,『역사비평』11,지수걸,역사문제연구소,1990.
「1930년대 전반기 민중교육운동」,『한국학연구』6⋅7합,최석규,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1996.
저서
『일제강점기 조선어 교육과 조선어 말살정책 연구』, 김성준, 경인문화사, 2010.
『문자보급운동 교재 : 조선일보⋅동아일보 (1929-1935)』, 정진석, LG상남언론재단, 1999.
『일제하의 문화운동사』, 조용만, 현음사,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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