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근대문화근대 교육의 보급

배재 학당 설립

배재 학당 합동

- 배재 학당에서 교육시키기 위해 조선 정부는 학생 200명을 보내며 이 학생들은 외국어를 배우면서 모든 규칙을 지킨다.

- 학생들은 영어를 배우면서 공부가 진행되면 지리학⋅산술학⋅화학⋅의학 등을 배우되 반드시 교사의 지휘에 따른다.

- 퇴학에 관한 권한은 일체 교사에게 부여한다. 교사는 학생들이 화합하여 열심히 배우도록 힘써 권면한다.

- 탁지아문은 이번 2월 1일부터 은화 200원을 학무아문에 보내 배재 학당에 전달하여 학생들의 필기도구와 서책을 위한 비용으로 사용토록 한다. 다만, 현재 학생들이 다 모이지 않았지만 1인당 1원씩 책정하여 배재 학당에 보내되, 이번에는 50명에 미달하지만 50원을 보내 필요한 비용을 미리 준비하도록 한다. 앞으로 60명이면 60원, 70명이면 70원을 보내도록 하여 점점 늘려가 200원을 채우도록 한다.【 은화는 일본 지폐도 괜찮다.】

- 매월 말 학당에서 장학생 수와 이름을 기록하여 외무아문으로 보내면, 학무아문에서 이를 전달받아 편의에 따라 지급하도록 한다.

- 학생에게 과실이 있거나 재능이 없어 쫓겨난 경우 외에는 반드시 3년 동안 수학하도록 하며, 이유 없이 들어오거나 나갈 수 없다.

- 학생 수가 200명이 되면 교사를 3, 4명 고용하되 200명이 된 후에 모집한다. 먼저 임금을 지급해서는 안 된다. 다만 부교사는 조선인을 고용하되 학생 50명당 1명으로 하여 교육을 담당하도록 하며, 20원을 월말에 월급으로 지급한다. 내년 1월부터 매년 5원씩 증액하도록 한다. 만약 교육에 성실하지 않으면 한국 정부에서 퇴직시킨다.

- 이 합동은 5개를 만들어 3개는 학무아문, 외무아문, 탁지아문에 두고, 2개는 미국공관 및 배재 학당에 둔다.

『배재 학당 합동』

培材學堂合同

一 本學堂將敎育 朝鮮政府所送學生二百人該學生遵守學語諸般規則

一 學生肄業英文而以時增加工夫如地理算學化學医學必受諸敎師指揮

一 黜陟事權專任敎師務加和衷勸誘

一 度支衙門自今二月初一日起將銀貨二百元撥到學務衙門轉交學堂以作學生紙筆冊墨等費但現今學生俱不齊集須以每一人一元式爲律隨其多寡送來學堂今番雖不滿五十人須送五十元使預備需用等件如至六十人給六十元七十人給七十元以此爲例次次增撥以滿二百又數【銀貨則日本紙幣亦可】

一 每于月終由學堂將學生人數姓名開單呈交外務衙門轉到學務衙門藉便核撥

一 學生有過及無才見斥外必以三年爲限不可無故進退

一 學生至二百人則敎師必用三四員然後方能集事此不用給●(辛)金惟副敎師則係是朝鮮人而學生每五十人必請一員敎授該員月銀朔給二十元至次年正月起加撥五元逐年加撥五元如不勤敎育自政府斥退

一 右合同繕成五件三置學務外務度支三衙門二置美國公舘及本學堂

『培材學堂合同』

이 사료는 1895년(고종 32년) 1월 조선 정부가 배재 학당을 직접 지원하고 관여할 것을 결정하고 배재 학당의 설립자인 아펜젤러(Appenzeller, Henry Gerhard, 1858~1902)와 체결한 일종의 계약서이다. 배재 학당은 1885년(고종 22년) 미국 북감리회(北監理會) 선교부 선교사 아펜젤러가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사학(私學)이다. 고종(高宗, 재위 1863~1907)은 1886년(고종 23년) 6월 인재를 배양하는 ‘培材學堂(배재 학당)’이라는 교명(校名)과 액(額)을 내려주었다. 배재 학당은 날로 늘어 가는 학생들을 수용하기 위해 1887년(고종 24년) 르네상스식 벽돌집을 신축하였다.

그 뒤 1894년(고종 31년) 갑오개혁 이후 한국 정부는 지지부진하던 ‘육영공원’을 대신할 외국어 교육기관으로 배재 학당을 확보하고자 했다. 한편 1894년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이후 실권을 위협받던 고종이, 미국 인사들과의 협력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시행한 조치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에 1895년 1월 한국 정부 측과 배재 학당 아펜젤러 간에 협의를 통해 『배재 학당 합동』을 작성하였다.

합동의 내용을 조목별로 살펴보면‚ 학생의 의무 사항, 영어⋅이산학(理算學)⋅화학⋅의학 등 교과과정‚ 퇴학 권한 귀속‚ 학생들에 대한 학비 보조‚ 장학금 지급‚ 학생과 교사의 비율과 교사 봉급‚ 한국 정부의 교사 해임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며, 한문과 영문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조선 정부는 장차 배재 학당의 학생을 200명까지 확대할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다만 특이한 점은, 이 문서에 외국인 교사에게 지급할 월급에 대한 규정은 없고 한국인 부교사에 대해서만 지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1897년(고종 34년) 당시 배재 학당에 대한 기록에 따르면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교육적⋅도덕적⋅지적 영향을 미쳐 왔고, 또한 현재까지도 미치고 있는 기관은 배재 학당이다. …… 이에는 한문 고전(古典)과 셰필드(Sheffield)의 만국 역사(萬國歷史)를 가르치는 한문-국문과가 있고, 소규모 신학과(神學科)와 독법(讀法)⋅문법⋅작문⋅철자법⋅역사⋅지리⋅수학 및 화학과 자연 철학을 가르치는 영문과가 있다”라고 하여 배재 학당에서 기독교 신학도 가르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볼 때 조선 정부는 배재 학당에 학생을 위탁하고 교육 비용은 지원했으나 사립 학교로서의 배재 학당 자체의 특성은 존중했으며, 대신 교사들의 월급은 여전히 기독교 선교회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했던 것으로 보인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배재학당의 계몽운동과 협성회」,,노희창,연세대학교 석사학위논문,2010.
「개화기 배재학당의 교육과정 운영」,『교육사학연구』8,류방란,서울대학교 교육사학회,1998.
편저
『배제백년사 : 1885~1985』, 배재학당, 배재학당, 1989.
『아펜젤러와 배재학당』,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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