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근대문화근대 교육의 보급

여학교 설치 통문

북촌의 어느 여성 군자 세 분이 개명(開明)에 뜻을 가지고 여학교를 설립하려는 통문이 있기에 놀랍고 신기하여 우리 논설을 빼고 아래에 기재하노라.

대개 사물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변하고, 법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고치는 것은 고금에 당연한 이치라. 우리 동방 삼천리 강토와 열성조(列聖朝) 500여 년의 사업으로 태평성대한 세월에 취해 무사히 지내더니, 우리 황제 폐하가 높고도 넓은 덕으로 왕위에 오르신 후에 국운이 더욱 왕성하여 이미 대황제의 지위에 오르셨도다. 그리하여 문명 개화할 정치로 만기(萬機)를 모두 살피시니, 이제 우리 이천만 동포 형제가 성스러운 뜻을 본받아 과거 나태하던 습관은 영구히 버리고 각각 개명한 새로운 방식을 따라 행할 때, 시작하는 일마다 일신 우일신(日新又日新)함을 사람마다 힘써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한결 같이 귀먹고 눈먼 병신처럼 옛 관습에만 빠져 있는가. 이것은 한심한 일이로다. 혹 이목구비와 사지 오관(四肢五官)의 육체에 남녀가 다름이 있는가. 어찌하여 병신처럼 사나이가 벌어 주는 것만 앉아서 먹고 평생을 깊은 집에 있으면서 남의 제어만 받으리오. 이왕에 우리보다 먼저 문명 개화한 나라들을 보면 남녀 평등권이 있는지라. 어려서부터 각각 학교에 다니며, 각종 학문을 다 배워 이목을 넓히고, 장성한 후에 사나이와 부부의 의를 맺어 평생을 살더라도 그 사나이에게 조금도 압제를 받지 아니한다. 이처럼 후대를 받는 것은 다름 아니라 그 학문과 지식이 사나이 못지않은 까닭에 그 권리도 일반과 같으니 이 어찌 아름답지 않으리오. ……(中略)…… 슬프도다. 과거를 생각해 보면 사나이가 힘으로 여편네를 압제하려고, 한갓 옛말을 빙자하여 “여자는 안에서 있어 바깥 일을 말하지 말며, 오로지 술과 밥을 짓는 것이 마땅하다(居內而不言外, 唯酒食施衣). ”고 하는지라. 어찌하여 사지 육체가 사나이와 같거늘, 이 같은 억압을 받아 세상 형편을 알지 못하고 죽은 사람의 모양이 되리오. 이제는 옛 풍속을 모두 폐지하고 개명 진보하여 우리나라도 다른 나라와 같이 여학교를 설립하고, 각기 여자 아이들을 보내어 각종 재주를 배워 이후에 여성 군자들이 되게 할 목적으로 지금 여학교를 창설하오니, 뜻을 가진 우리 동포 형제, 여러 여성 영웅 호걸님들은 각기 분발하는 마음으로 귀한 여자 아이들을 우리 여학교에 들여 보내시려 하시거든, 바로 이름을 적어내시기 바라나이다.

9월 1일 여학교 통문 발기인

이소사(李召史)1) 김소사(金召史)

황성신문〉, 1898년 9월 8일 별보 「오백년유」

1)소사(召史)란 남편을 사별한 과부를 가리킨다.

북촌 엇던 녀즁 군 슈삼분이 명샹에 유지야 녀학교를 셜시랴 통문이 잇기로 도 놀납고 신긔야 우리 론셜을 졔각고 좌에 긔노라

대져 물이 극면 반다시 변고 법이 극면 반다시 갓츔은 고금에 덧 리치라 아동방 삼쳔리강토와 렬셩조 오여년 긔업으로 승평일월에 취포무더니 우리 셩샹폐하의 외외탕탕신 덕업으로 림어신 후에 국운이 더옥 셩왕야 임의 대황뎨위에 어시고 문명화 졍치로 만긔를 총찰시니 이제 우리 이쳔만 동포 형뎨가 셩의를 효슌하야 젼일  습은 영영 리고 각각 명 신식을 쥰 이 취셔되여 일신 우일신 을 사마다 힘 쓸 거시여 엇지하야 일향 귀먹고 눈먼 병신모양으로 구습에만 져잇뇨. 이거시 한심헌 일이로다. 혹쟈 이목구비와 지오관 륙톄가 남녀가 다름이 잇가. 엇지하야 병신모양으로 사나희의 버러쥬 것만 안져먹고 평섕을 심규에 쳐하야 의 졀졔만 밧으리오. 이왕에 우리보다 몬져 문명 화헌 나라들을 보면 남녀가 동등권이 잇지라 어려셔브터 각각 학교에 니며 각종 학문을 다호아 이목을 널펴 셩헌 후에 사나희와 부부지의을 결허여 평섕을 살더도 그 사나희의게 일호도 압졔를 밧지 아니허고 후대을 밧음은 다름아니라. 그 학문과 지식이 사나희와 못지 아니헌 고로 권리도 일반이니 잇지 아름답지 아니허리오 ……(中略)…… 이져 녯 풍규를 젼폐고 명진보야 우리나라도 타국과 치 녀학교를 셜립고 각각 녀아들을 보여 각항 조를 호아 일후에 녀즁 군들이 되게 올 로 방 녀학교를 창셜허오니 유지허신 우리 동포형뎨 여러 녀즁 영웅 호걸님네들은 각각 분발지심을 내여 귀 녀아들을 우리 녀학교에 드려보시랴 허시거든 곳 착명시기를 라나이다.

구월 일일 녀학교 통문 발긔인

리소 김소

〈皇城新聞〉, 1898年 9月 8日 別報 「五百年有」

이 사료는 1899년(대한제국 광무 3년) 2월 순성 여학교(順成女學校)를 설립한 양성당(養成堂) 이씨와 양현당(養賢堂) 김씨가 1898년(광무 2년) 9월 〈황성신문(皇城新聞)〉과〈독립신문(獨立新聞)〉에 기고한 글로, 여성들이 교육을 통해 남성과 동일한 지식을 습득하여 동일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음을 강조하는 한국 최초의 여권(女權) 선언문으로 평가받고 있다.

개신교 여자 선교사들의 활동과 『독립신문』의 창간으로 여성 교육과 여성의 사회 진출에 대한 인식이 점차 확산되는 가운데 1898년 9월, 최초의 여성 교육 운동 단체 ‘찬양회(讚揚會)’가 결성되었다. 회원 자격은 신분, 직업 등 일체의 제한이 없어서 회비를 내기만 하면 누구나 회원이 될 수 있었으며, 임원 조직은 회장, 부회장, 총무원, 사무원으로 구성되었다. 찬양회 회장은 양성당 이씨, 부회장은 양현당 김씨가 선임되었으며, 총무원에 창길당(昌吉堂) 이씨와 양진당 태씨, 사무원에 정길당(貞吉堂) 고씨 등이 임원을 맡았다. 회장과 총무원은 북촌 부인들 중 영향력 있는 부인으로 추대하였고, 양현당 김씨와 정길당 고씨가 전체 여론을 조성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찬양회는 일반적으로 북촌양반가 부인들이 중심이 되었으며, 대략 300~400명이 참여하였다. 종묘사직과 궁궐을 중심으로 한 북촌 일대는 왕족이나 양반이 거주하는 고급 주거지였다. 회장인 양성당 이씨 또한 왕가 종친 출신이었다. 찬양회가 관립 여학교 설립을 강하게 주장한 것은 이들의 사회적 신분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렇지만 찬양회에는 일반 서민층 여성도 상당수 참여하였고, 기생과 첩들도 참여하였다. 주로 정식 회원은 아니지만 지방에 사는 부인들이나 외국 부인들도 협조하였다. 이밖에 남자 찬성원과 이를 대표하는 찬성원장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윤치호(尹致昊, 1865~1945),⋅장지연(張志淵, 1864~1921), 이종일 등이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찬양회는 설립되자마자, 이 사료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바로 여성 교육과 여권 신장을 주장하는 여권 통문(女權通文)을 발표하였다. 이 통문은 한국 여성이 발표한 최초의 인권 선언이자 실천적인 여권신장을 주장한 첫걸음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첫째 여성이 온전한 하나의 인간임을 주장하고 있다. 문명 개화의 시대를 맞아 구법과 구습이 개혁되었는데, 유독 여성들만 옛 법을 그대로 지키고 있어서 마치 귀먹고 눈 어두운 병신과 같다고 표현하면서 여성들이 의식의 병신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둘째, 남성과 같은 신체 능력을 가진 여성이 집 안에만 머물고 있는 현실을 애석해 하며, 그러한 현상은 경제적 무능력에서 비롯되었기에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여성들도 경제적 능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여성의 사회 진출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셋째, 개명 진보와 남녀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여성들이 남성들과 동등한 교육을 받아야 하며, 이를 위한 여성 교육 기관의 설립이 급선무임을 주장하고 있다. 곧 이 통문은 여성의 천부 인권, 직업권, 교육권 등 보편적 권리를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통문이 발표되자 『독립신문』이나 『황성신문』 등에서는 여권 신장을 위한 교육 운동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는 등, 동조하는 내용의 논설이 실리기도 하였다.

이후 찬양회는 여성 계몽과 여성 교육 기관 설립을 위해 정기적으로 집회를 개최하고 연설회 및 토론회 등을 열었다. 또한 1898년 10월에는 회원 100여 명은 경복궁 앞으로 나아가 고종(高宗, 재위 1863~1907)에게 직접 관립 여학교 설립을 청원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상소문에서 서양 각국에 모두 있는 여학교가 우리나라에만 없다고 지적하고 여학교 설립을 위한 칙령을 내려줄 것을 요구하였다. 고종은 즉시 답을 내려 적절한 조치를 약속했다.

당시 독립 협회와 활동 시기가 맞물려 있음을 감안하여 찬양회에서는 자신들을 ‘여성 협회’라 자부했으며, 만민 공동회에 참석하거나 후원하기도 하였다. 한편 찬양회는 여학교 설립 운동과 더불어 여성 계몽을 위한 사업으로 일요일마다 정기 집회를 개최하고 연설회와 토론회를 열었다. 주요 주제는 여성의 의식 각성과 여성 교육의 필요성이었는데, 회원이 아닌 여성도 많이 참여할 정도로 집회는 성황을 이루었다. 강사진은 주로 독립 협회 남성 회원들이었다. 이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여성들이 스스로 주도하는 여성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는 단계는 아직 아니었다. 위의 사료에 기재된 통문을 보면 여성의 교육권을 강조하면서도 정치 참여나 노동권과 관련해 여성의 지위 확보를 구체화하는 실제적인 영역으로는 확장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 사료는 최초의 여권 단체라고 할 수 있는 찬양회의 의의와 한계를 동시에 보여 준다고 하겠다.

찬양회고종의 약속을 믿고 여학생을 뽑기도 하였지만, 재정 부족을 이유로 학부에서 반대하면서 관립 여학교 설립 계획은 1년이 넘도록 진전되지 않았다. 이러한 한국 정부의 미온적인 태도에 찬양회는 1899년 2월, 회원들에게서 거둔 회비로 ‘순성(順成) 여학교’를 직접 설립하였다. 순성 학교는 한국인이 세운 최초의 여학교로, 초등과 중등 과정을 두어 7~13세 연령의 여학생 30명을 모집하였고, 『천자문』, 『동몽선습』, 『태서 신사』 등을 가르쳤다. 찬양회는 부회장 양현당 김씨를 교장에 임명하고, 서기 정길당 고씨 및 약간의 외국 부인들을 교원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순성 여학교는 항상 재정적 어려움에 놓여 있어서, 회비와 후원금 혹은 교장의 사재를 털어도 학교를 운영하는 일이 여의치 않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순성 여학교를 관립 여학교로 만들려고 한국 정부에 청원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별 성과를 얻지 못했다. 1900년에 이르면 찬양회는 사실상 해체된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학교 경영은 양현당 김씨가 거의 혼자 이끌어 갔다. 1903년 자현당 이씨가 제2대 교장으로 취임하지만 이미 학교는 지탱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1905년 12월 24일부터 31일까지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교장 이신원(자현당 이씨)이 사무원 한계창씨의 이론으로 교장직을 자퇴한다”는 광고를 끝으로 순성 여학교에 대한 기사는 신문상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게 되고, 그 즈음 폐교된 것으로 보인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대한제국기 찬양회의 설립과 활동」,,박승희,충남대학교 석사학위논문,2007.
「개화기의 여성교육론」,『외대논총』18,최경숙,부산외국어대학교,1998.
저서
『대한제국말기 여성운동의 성격연구』, 정경숙,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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