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근대문화근대 교육의 보급

국민 교육회 규칙

국민교육회 규칙의 대요

제1장 명칭과 목적

제1조 본회는 국민교육회라 명칭한다.

제2조 본회의 목적은 일반 국민의 교육에 힘써 지식을 발달하게 하며 옛 악습을 혁파하고 쇄신의 모범을 확립한다.

제3조 본회는 앞의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매번 개회할 때 교육상 유익한 의견을 서로 강연하되 정치에 관한 일은 일체 거론하지 않으며, 다만 다음의 사항에만 종사한다.

1. 학교를 널리 설립하는 일.

2. 문명적인 학문에 사용할 서적을 편찬하거나 번역하여 배포하는 일.

3. 우리나라의 역사와 지리, 고금 위인들의 업적을 수집하고 널리 알려서 국민의 애국심을 고취하고 원기를 배양하는 일. 단, 서적 발간 비용은 회비로 지출하고 도서 판매 수익의 2/3는 편집원에게 지급하고 나머지는 회비에 보탤 것.

4. 본회의 회보를 매월 혹은 매주일에 간행하는 일. 단, 발행 날짜는 수시로 변통할 것.

제2장 조직

제4조 본회는 통상 회원과 특별 회원으로 조직한다.

제5조 통상 회원은 우리나라 남녀 중 연령 20세 이상의 품행이 단정한 자를 들인다.

제6조 특별 회원은 외국인 남녀 중 학식이 고명하고 대한국민의 교육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사람을 영입한다.

제3장 회원의 의무와 권한

제7조 통상 회원은 본회의 사업에 협력할 의무가 있고 투표권 및 임원으로 선출될 권한이 있다.

제8조 특별 회원은 통상 회원과 같은 의무가 있으나 투표권 및 임원 피선거권이 없으며, 그 의견은 표결에 반영되지 않는다.

다만 통상 회의 및 임시 회의에 출석하여 상의할 수 있다.

제4장 임원

제9조 본회의 임원은 회장 1인, 부회장 1인, 간사 12인, 회계감사 1인, 회계 2인, 서기 2인, 편집위원 10인을 선임한다.

10조부터 19조까지는 삭제하고 기재하지 않음.

제5장 회비와 특허

제20조 통상 회원과 특별 회원으로 가입할 때에는 2원을 납부하고, 그 뒤에는 매년 2원씩 납부하되 기일은 매년 9월 첫 번째 토요일로 정한다.

제21조 본회에 가입하는 사람 중 한 번에 30원 이상 납부하는 사람은 특별히 종신회원이 되는 것을 허락한다.

22조부터 27조까지는 삭제하고 기재하지 않음.

제7장 회기와 회의 규칙

제28조 본회는 매주 토요일 오후 2시에 통상 회의를 개최하고 회의 제반 사무를 상의한다.

제29조 본회가 모이는 날에 개회 및 폐회 의전은 경천하는 뜻으로 기도를 행하되, 회장이 회원 중 한 명을 지정하여 인도하게 하며 혹 회장이 직접 진행할 수도 있다.

황성신문〉, 1904년 9월 19일

國民敎育會(▣)規則의 大要

  第一章 名稱과 目的

第一條 本會난 國民敎育會라 名稱할 事

第二條 本會의 目的은 一般國民의 敎育을 勉勵야 智識을 發達켸호 泥古의 獘習을 革袪고 刷新의 規模을 確立할 事

第三條 本會난 前條의 目的을 貫徹기 爲야 每開(▣)會時에 敎育上有益 意見을 互相講演호 政治上에 關 事난 一切勿論고 但左開諸項에 從事할 事

一 學校를 廣設할 事

二 文明的學問에 應用할 書籍을 編纂或繙譯야 刋佈할 事

三 本國史記와 地誌의 古今名人傳蹟을 蒐集(▣)廣佈야 國民의 愛國心을 鼓動고 元氣를 培養할 事

但書籍發刋費 會金으로 支出고 發售納本後에 利剩의 三分之二는 編輯員의게 酬고 三之一은 會金에 補 事

四 本會會報를 每月이나 或每週日에 刋行 事

但發行期日은 隨時變通 事

  第二章 組織

第四條 本會 通商會員과 特別會員으로 組織 事

第五條 通商會員은 本國人男女中에 年齡二十歲以上品行이 端正한 者를 許入할 事

第六條 特別會員은 外國人男女中이 學識이 高明고 大韓國民의 敎育을 爲야 齊心相期난 者를 延入할 事

  第三章 會員의 義務와 權限

第七條 通常會員은 本會事業에 協心同力하 義務가 有하고 投票와 任員被選의 權限이 有 事

第八條 特別會員은 通常會員과 同 義務가 有하나 投票와 任員被選의 權限이 無하고 且表決數에 加을 不得 事

但通常會와 臨時會에 出席相議을 得 事

第九條 本會任員은 會長一人과 副會長一人과 幹事十二人과 會計監檢一人과 會計二人과 書記二人(一▣)과 編輯委員十人을 選任 事

自第十條로 至十九條 刪而不載

  第五章 會金과 特許

第二十條 通常會員과 特別會員이 入會時에 金二元을 納고 其後에 每年二元式納호 期日은 每年九月第一土曜日노 定 事

第二十一條 本會에 入參하 人員中一時에 金三十元以上을 來納 者 特別히 終身會員됨을 許 事

自第二十二條至二十七條 刪而不載

  第七章 會期와 會例

第二十八條 本會 每週土曜日下午二時에 通常會(▣)를 開고 會中諸般事務를 商議 事

第二十九條 本會會集日에 開會閉會하 儀節은 敬天하 意로 祈禱를 行호 會長이 會中一人을 特定하야 引導켸하며 或會長이 自行 事

〈皇城新聞〉, 1904年 9月 19日

이 사료는 1904년(대한제국 광무 8년) 〈황성신문〉 9월 19⋅20⋅21일자에 게재된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 규칙이다. 〈대한매일신보〉 순한글판에서도 동일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규칙 중 10~19조, 20~27조는 삭제하고 기록하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어, 현재 그 내용을 확인할 방법은 없다. 국민교육회는 1904년 8월 24일 서울에서 설립되어 1907년(광무 11년) 말까지 활동한 교육 단체이다. 설립 장소는 장로교 선교사였던 게일(Gale, J. S., 1863~1937) 목사의 집이었다.

창립식에 참여한 사람 중 확실하게 알려진 사람은 이원긍(李源競, 1849~?)이며, 그 외에 이준(李儁, 1859~1907)⋅홍재기(洪在祺, 1873~1950)⋅김흥경(金興京)⋅유진형(兪鎭衡) 등 현재 확인되는 인원은 30명 정도이다. 이들은 전체 회원 중 임원진에 포함되었거나 적극적으로 참여한 회원들로 생각된다. 한편 이름이 파악된 이들 회원 중 상당수가 게일 목사가 시무했던 연동교회 교인이었으며, 또 〈대한매일신보〉 1904년 8월 11일자 ‘국민학교’라는 기사에 따르면, 연동교회에서 계를 조직하여 학교를 설립하고자 한 것으로 보아, 국민교육회 설립 과정에 연동교회가 상당히 깊숙이 개입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실제로 본 사료 중 29조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국민교육회는 회칙상 회의석상에서 기독교식 기도회를 진행하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다만 국민교육회에서 기독교 학교를 설립하거나 기독교 서적을 간행한 경우는 확인되지 않는다.

국민교육회의 전체 회원은 현재 정확히 확인할 수 없으나, 이 회의 연회비 수입을 기준으로 계산했을 때 1905년(광무 9년)에는 최소한 87명 이상, 1907년에는 최소한 228명 이상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들 회원 중에는 전⋅현직 관리도 여럿 있었으며, 일부는 일본에서 유학을 했거나 국내에서 근대 교육을 이수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위 관직자는 거의 없었고 중, 하급 관리 출신이 중심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1900년대 기호 흥학회나 대동학회와 같이 고관의 참여가 뚜렷한 몇 개 단체를 제외한다면 공통점으로 지적될 수 있는 부분이다. 즉 정치 개혁이나 실력 양성에 대한 관심은 집권 세력이 아닌 재야 지식인이나 중, 하급 관리 계층에서 주로 제기되었으며, 국민교육회도 그 중 하나였다.

본 규칙 중 주목할 만한 점은 3조에서 밝히는 “정치에 관한 일은 일체 거론하지 않는다”라는 부분이다. 위에서 밝힌 것처럼 국민교육회를 비롯한 제반 단체들이 설립된 것은 대한제국 내외의 정치적 상황의 변동 때문이었다. 당시 가장 먼저 설립된 민간단체가 노골적인 정치색을 표방했던 일진회라는 점은 더더욱 당시의 상황을 시사한다. 대한제국 정부도 일진회 창립 이후 민간 단체 설립을 주목하고 있었으며, 국민교육회 창립 당시에도 경무청의 순검들을 파견했는데, 국민교육회에 독립 협회 회원들이 참가하여 활동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민교육회 규칙 3조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사회에서 국민교육회를 가리켜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아무런 의견이 없었다”고 평할 정도였다.(〈대한매일신보〉 1906년 2월 28일자 ‘잡보’)

여기에는 국민교육회의 특별 회원이자 연동교회 목사였던 게일의 정치적 성향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게일은 미국 장로교회에서 보낸 선교사로, 조선인의 교육과 계몽에는 관심이 많았지만 교회의 정치적 참여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인 입장이었던 인물이다. 또한 조선인의 자구 능력에 회의를 갖고 있어, 일본이 조선을 지배함으로써 조선의 역사에 변화가 올 것에 대한 기대마저 내비치기도 했다.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국민교육회 주요 회원 중 상당수가 연동교회 교인이었던 것을 감안할 때 게일 목사의 정치적 성향이 국민교육회 회칙에 반영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물론 국민교육회가 현실 정치와 전혀 무관한 행보만 보인 것은 아니었다. 1905년 7월 주영 대리공사 이한응(李漢應, 1874~1905)이 자결했을 때 이를 애도하는 조문을 발표한 것이나, 그 해 9월에 있었던 일제의 한국인 교원 차별 대우에 대한 저항 시위를 주도한 것, 일진회합방 청원에 반대한 것, 1906년 12월 2일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하여 자결한 ‘7충신’의 추도회를 개최한 것 등의 사례는 국민교육회가 국권 회복이란 대의에 대해서는 반응을 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는 현실 정치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국민적 공감대 형성이나 교육적 실천과 관련된 활동으로 이해할 수 있다.

회칙상으로 보면 국민교육회 활동은 학교 설립, 근대 문명에 관한 서적 편찬 및 배포, 국학(國學)에 관한 서적 편찬 및 배포로 정리할 수 있다. 실제 국민교육회의 활동을 보면 1905년 10월에 국민 사범 학교를 설립했고, 1906년 5월에 법학 강습소를 설치했으며, 그 외에 일부 사립 학교를 설립하거나 최소한 지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1906년에 『대동역사략(大東歷史略)』⋅『신찬소물리학(新撰小物理學)』을, 1907년에 『초등소학(初等小學)』⋅『초등지리교과서(初等地理敎科書)』⋅『신찬소박물학(新撰小博物學)』을 발간했다. 그리고 유성준(兪星濬, 1860~1934)의 저서인 『법학통론(法學通論)』도 출간했으며, 이 외에 역사책과 지리지, 『초등소학(初等小學)』 등을 간행하였다. 한편 회보는 설립 초기부터 국한문의 월간으로 발간할 계획이었으나 실제로 발간된 것 같지는 않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한말 서우학회의 애국계몽운동과 사상」,『한국학보』8,이송희,일지사,1982.
저서
『한국민족문학론연구』, 권영민, 민음사, 1991.
『한국 애국계몽기 신문연재소설 연구 : 한문소설⋅토론체소설⋅신소설의 주제적 특성을 중심으로』, 김형중, 한림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9.
편저
『한국사』12(근대민족의 형성 2), 강만길 외, 한길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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