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현대정치광복 직후의 국내 정세

이승만과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의 연합군에 대한 감사 결의

이박사 기초 결의서 전문

우리는 이에 삼천만 조선대중의 공동성명을 발표하여 4 연합국과 아메리카 민중에게 보낸다.

물론 우리의 공동 적인 일본의 항복 후 조선에는 여러 정당이 발생하였고 또한 우리 사이에 의견의 차이가 없지 아니하다. 그러나 그것은 민주주의의 발달과정에 있어서 보통 있는 일이요, 또한 아메리카 민중이 그 모든 제도를 발달시킴에 있어서 밟아온 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모두 합동하였다. 조선의 전 민중을 대표하여 경성에 존재하는 각 정당은 우리의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중앙협의회로 완전히 결합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공동의 목적을 위하여 한 덩어리가 되었다. 우리의 목적은 즉 우리의 완전한 독립이다. 우리는 주권국으로서의 영토적⋅정치적⋅행정적 모든 특권을 회복하는 권리를 요구한다.

조선을 남북의 양 점령구역으로 분할하는 가장 중대한 과오는 우리가 스스로 취한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양단(兩斷)이 되었다. 북위 38도 이북은 소련군이 점령하고 그 이남은 아메리카가 점령하였다.

귀(貴) 열국(列國)은 조선 사람이 분열이 되었으므로 자유 국민의 자격이 없다 하나 우리 조선을 마치 양단된 몸과 같이 양단(兩斷)한 것은 우리가 스스로 취한 것이 아니요, 귀 열국이 강행한 것임을 이에 선명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이 양단된 몸으로서 어찌 생존하여 적당한 활동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카이로선언에 발표된 모든 조건을 수행할 수 있도록 우리의 전 민족적 생활을 통일로서 조직하는 기회가 허여(許與)되기를 이에 단호히 요구하는 바이다.

우리는 맥아더 대장이나 하지 중장이나 군정장관 아놀드 소장이 이 양단정책에 대하여 조금도 관계하여 아는 바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따라서 그 양단정책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사태에 관하야 그들이 오해와 부당한 비판을 받게 된 것을 유감으로 아는 바이다.

사실 그들은 우리의 주장과 요구에 대하여 공평과 호의의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사태에 관한 책임자를 알고자 하며 조선의 장래 운명을 결정함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관계가 있는 이 사실에 관하여 귀 열국의 명백한 성명을 요구하여 마지아니한다. 우리는 은인자중하고 있다. 그러나 이 양단정책의 참담한 결과는 날로 확대하고 심각해지는 사실을 지적하지 아니할 수 없다. 우리는 이 불행한 사태로부터 속히 해결되기를 고대하고 있는 중에 또한 조선통치에 대하여 공동신탁제가 제안되었다는 보도를 접하고 참으로 경악을 느끼지 아니할 수 없었다.

우리는 경의와 신실한 우호의 정신으로써 이 제안이 미국의 대조선정책에 있어서 한 가지 중대한 과오가 될 것을 지적하고자 한다.

과거 40년 동안 미국의 극동정책은 주로 일본인과 및 친일파를 통한 정보에 기인하였고 그 결과는 진주만의 참사를 초치(招致)하게 되었든 것이다.

1941년 12월 7일 이후에 있어서도 미국국무성의 당국자는 우리의 경고를 반복 거절하야 마침내 현재의 혼돈상태를 야기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당국자의 대부분과 이제 새 정치가들과 그 자리를 교대하게 되었다.

대통령 트루먼 씨와 국무장관 번스 씨를 지도자로 하는 미국은 금후 조선과 미국 양국 간에 일층 양호한 양해의 길을 타개할 것을 확신하는 바이다.

우리는 귀 열국의 가장 중요한 인식사항으로서 아래 사항을 이에 제시한다.

1) 우리는 자주할진대 1년 이내에 국내를 안돈(安頓)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외국의 물질적 기술적 후원으로써 비교적 단시일간에 평화로운 정상생활을 회복할 수 있다. 이 사실을 부인하는 자는 아직도 일본인의 선전술에 마취하고 있는 자들이다.

2) 우리는 연합국과 우호 관계로서 협력할 것이며 극동 평화유지에 응분의 노력을 경주할 것이다.

3) 우리 임시 정부가 연합국의 승인 하에 환도하면 1년 이내에 국민선거를 단행할 것이요, 1919년에 선포된 독립 선언서와 동년에 경성에서 건설된 임시 정부의 취지에 의하여 천명된 민주주의의 정치원칙을 무엇이든 존중할 것이다.

조선인은 연합국과 싸운 일이 없고 따라서 연합국은 조선을 정복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열의로 귀 열국에 지적한다. 조선은 과거 40년간 우리의 공동적인 일본과 싸워 온 것이 사실이다.

일층 더 큰 규모로서 금번 전쟁에 참여치 못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우리가 무기대여법의 정부와 민주주의국의 병기창으로부터 물질적 원조를 받지 못한데 기인한 것뿐이다. 우리는 정복된 적국의 대우는 거부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대한 일대 불의인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타개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허여하기를 요구한다.

귀 열국이 참으로 공평할진대 우리의 행동으로써 우리를 판단할 것이요 우리에게 대한 타의 말로써 판단할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단연코 공동신탁제를 거부하며 기타 여하한 종류를 물론하고 완전독립 이외의 모든 정책을 단연 반대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위하여 전 생명을 바치기로 결의하였다.

우리는 귀 열국의 회답을 경의로써 고대하고 있다.

〈자유신문〉, 1945년 11월 3일

李承晩起草 결의서 전문

우리는 이에 三千萬 朝鮮大衆의 共同聲明을 發表하야 四聯合國과 밋 亞美利加 民衆에게 보낸다.

勿論 우리의 共同敵인 日本의 降伏후 朝鮮에는 여러 政黨이 發生하얏고 또한 우리 사이에 意見의 差異가 없지 아니하다. 그러나 그것은 民主主義의 發達科程에 있어서 普通있는 일이요 또한 亞美利加 民衆이 그 모든 制度를 發達시킴에 있어서 발버온 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모다 合同하얏다. 朝鮮의 全民衆을 代表하여 京城에 存在하는 各政黨은 우리의 共同한 問題를 解決하기 爲하야 中央協議會로 完全히 結合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共同한 目的을 爲하야 한덩어리가 되얏다. 우리의 目的은 卽 우리의 完全한 獨立이다. 우리는 主權國으로서의 領土的, 政治的, 行政的 모든 特權을 回復하는 權利를 要求한다.

朝鮮을 南北의 兩占領區域으로 分割하는 가장 重大한 過誤는 우리의 自取한 바가 아니다. 우리나라는 兩斷이 되었다. 北緯 三十八度 以北은 蘇聯軍이 占領하고 그 以南은 亞美利加軍이 점령하얏다.

貴列國은 朝鮮사람이 分裂이 되엇슴으로 自由國民의 資格이 없다하나 우리 朝鮮을 마치 兩斷된 몸과 같이 兩斷한 것은 우리가 自取한 바가 아니요 貴列國이 强行한 것을 이에 宣明치 안흘 수 없다.

이와 같이 兩斷된 몸으로서 어찌 生存하야 適當한 活動을 繼續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카이로宣言에 發表된 모든 條件을 遂行할 수 있도록 우리의 全民族的 生活을 統一로서 組織하는 機會가 許與되기를 이에 斷乎코 要求하는 바이다.

우리는 맥아-더 大將이나 하-지 中將이나 軍政長官 아-놀드 少將이나가 이 兩斷政策에 對하야 何等 關知한 바가 업는 事實을 알게 되엿스며 딸아서 그 兩斷政策으로 因하야 이러나는 事態에 關하야 그들이 誤解와 不當한 批判을 밧게 된 것을 遺憾으로 아는 바이다.

事實 그들은 우리의 主張과 要求에 對하야 公平과 好意의 態度를 堅持하고 잇는 것이다.

우리는 이 事態에 關한 責任者를 알고저 하며 朝鮮의 將來 運命을 決定함에 잇서서 가장 重大한 關係가 잇는 이 事實에 關하야 貴列國의 明白한 聲明을 要求하야 마지아니한다. 우리는 隱忍自重하고 잇다. 그러나 이 兩斷政策의 慘憺한 結果는 날로 擴大하고 深刻하야지는 事實을 指摘하지 아니할 수 업다. 우리는 이 不幸한 事態로부터 速히 解決되기를 苦待하고 있는 中에 또한 朝鮮統治에 對하야 共同信託制가 提案되엿다는 報道를 接하고 참으로 驚愕을 느끼지 아니할 수 업섯다.

우리는 敬意와 信實한 友好의 精神으로써 이 提案이 美國의 對朝鮮政策에 잇서서 한가지 重大한 過誤가 될 것을 指摘하고저 한다.

過去 四十年 동안 美國의 極東政策은 主로 日本人과 밋 親日派를 通하야 엇은 情報에 基因하얏고 그 結果는 眞珠灣의 慘事를 招致하게 되얏든 것이다.

一九四一年 十二月 七日 以後에 잇서서도 美國國務省의 當局者는 우리의 警告를 反復 拒絶하야 마침내 現在의 混沌狀態를 惹起한 것이 事實이다. 그러나 그러한 當局者의 大部分과 이제 새 政治家들과 그 자리를 交代하게 되얏다.

대통령 트루맨 氏와 國務長官 반스 氏를 指導者로 하는 美國은 今後 朝美 兩國間에 一層 良好한 諒解의 길을 打開할 것을 確信하는 바이다.

우리는 貴列國의 가장 重要한 認識事項으로서 左記 事項을 이에 提示한다.

1) 우리는 自主할진대 一年 以內에 國內를 安頓할 수 잇슬뿐 아니라 外國의 物質的 技術的 後援으로써 比較的 短時日間에 平和로운 正常生活을 回復할 수 잇다. 이 事實을 否認하는 者는 아직도 日本人의 宣傳術에 痲醉하고 있는 者들이다.

2) 우리는 聯合國과 友好關係로서 協力할 것이며 極東 平和維持에 應分의 努力을 傾注할 것이다.

3) 우리 臨時政府가 聯合國의 承認下에 還都하면 一年以內에 國民選擧를 斷行할 것이요 一九一九年에 宣布된 獨立宣言書와 同年에 京城에서 建設된 臨時政府의 趣旨에 依하야 闡明된 民主主義의 政治原則을 어듸든지 尊重할 것이다.

朝鮮人은 聯合國과 싸운 일이 업고 따라 聯合國은 朝鮮을 征服한 것이 아니라는 事實을 熱意로 貴列國에 指摘한다. 朝鮮은 過去 四十年間 우리의 共同敵인 日本과 싸워 온 것이 사실이다.

一層 더 큰 規模로서 今番 戰爭에 參與치 못한 것이 事實이라면 그는 우리가 武器貸與法의 政府와 民主主義國의 兵器廠으로부터 物質的 援助를 밧지 못한데 基因한 것 뿐이다. 우리는 征服된 敵國의 待遇는 憤擊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對한 一大 不義인 것이 明白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自身의 運命을 스스로 打開할 수 잇는 能力을 發揮할 機會를 許與하기를 要求한다.

貴列國이 참으로 公平할진대 우리의 行動으로써 우리를 判斷할 것이요 우리에게 對한 他의 말로써 判斷할 것이 아니다. 우리는 斷然코 共同信託制를 拒否하며 其他 如何한 種類를 勿論하고 完全獨立 以外의 모든 政策을 하야 斷然 反對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自由를 爲하야 全生命을 밧치기로 決議하엿다.

우리는 貴列國의 回答을 敬意로써 苦待하고 잇다.

〈자유신문〉, 1945년 11월 3일

이 사료는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이 미국에서 환국하고 한 달여 지난 뒤 연합국 측에 보낸 일명 「이승만 기초 결의서」 전문이다.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 17일과 18일 당시 정당 통일 운동의 구심체인 ‘각 정당 행동 통일 위원회’가 두 차례 회의를 개최하였다. 회의의 목표는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민족 통일이었다. 10월 16일 환국한 이승만은 주로 우익 인사 중심으로 남한 정계 인사들을 만났고, 10월 20일 서울시민 주최 연합군 환영 대회에서 대중 앞에 나타났다. 같은 날 이승만은 각 정당 통일 기성회 내 각 정당 행동 통일 연락 위원회에 참가한 4대 정당 대표자들에게, “근본적인 강력한 통일 단체를 만들어야 한다”라고 주장하면서 10월 23일 조선호텔에서 각 정당 대표 2명씩을 소집해 회견하고 통일을 도모하겠다고 통보하였다.

이에 1945년 10월 23일 정당⋅사회단체 등 50여 단체 대표 200여 명이 조선호텔에 모였다. 이날 안재홍(安在鴻, 1891~1965)의 제안에 따라 ‘독립 촉진 중앙 협의회’(이하 독촉 중협)가 구성되었고, 이승만이 회장에 추대되었다.

해방 이후 건국 준비 위원회(이하 건준)-조선 인민 공화국(이하 인공)을 통한 민족 통일 전선 결성이 실패한 뒤 시도되었던 정당 통일 운동은 이승만 중심의 독촉 중협 발족으로 귀결되었다. 독촉 중협은 이승만을 중심으로 범우익 세력을 결집했고, 아울러 좌익 진영의 상당 부분을 포괄하였다. 이승만은 독촉 중협을 발족하는 과정에서 좌익 진영과 마찰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당시만 해도 이승만은 좌익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한편, 지금까지 독촉 중협 결성을 이승만의 귀국을 계기로 한 민족 통일 전선 결성으로 이해해 왔다. 그런데 독촉 중협이, 이승만과 미군정이 긴밀히 연대하여 국무부의 다자간 국제 연합 신탁 통치 계획안을 무산시킨 후 그 대안으로 모스크바 3상 회의에 제출할 목적으로 준비⋅조직한 단체라는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이 문제는 미군정의 초기 점령 정책으로 논의되는 미군정 정치고문 윌리엄 랭던(William R. Langdon)의 ‘정무 위원회(governing commission)’ 계획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데, 이 계획은 1946년 이래 ’남조선 대한 국민 대표 민주의원‘, ’좌우 합작 위원회‘, ’남조선 과도 입법의원‘ 등 여러 가지 변형된 모습으로 남한 현실에 적용되었다고 한다.

즉, 미군정은 한국인들의 민족통일 열망을 이용해 이승만과 김구(金九, 1876~1949) 세력을 중심으로 정계를 통합하고 자신들의 통제하에 ‘임시한국 행정부’를 수립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는데, ‘정무 위원회’는 임시 한국 행정부의 사전 조직이었고, 독촉 중협은 ‘정무 위원회’ 계획의 시험 무대였다는 것이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주한미군정의 ‘임시한국행정부’ 수립 구상과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역사와 현실』19,정병준,한국역사연구회,1996.
저서
「해방 후 좌우합작에 의한 민족국가건설운동 연구」, 서중석,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0.
『우남 이승만 연구 : 한국 근대국가의 형성과 우파의 길』, 정병준, 역사비평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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