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현대정치광복 직후의 국내 정세

신탁 통치 반대 국민 총동원 위원회의 반탁 선언과 결의문

탁치 반대 국민 총동원 시위 대회(託治反對國民總動員示威大會)

선언문

카이로, 포츠담 선언과 국제 헌장으로 세계에 공약한 한국의 독립 부여는 금번 모스크바에서 개최한 3상회의의 신탁 관리 결의로서 수포로 돌아갔으니 다시 우리 3천만은 영예로운 피로써 자주독립을 획득치 아니하면 아니 될 단계에 들어섰다. 동포여! 8⋅15 이전과 이후 피차의 과오와 마찰을 청산하고서 우리 정부 밑에 뭉치자. 그리하여 그 지도하에 3천만의 총역량을 발휘하여서 신탁 관리제를 배격하는 국민 운동을 전개하여 자주독립을 완전히 획취하기까지 3천만 전민족의 최후의 피 한방울까지라도 흘려서 싸우는 항쟁 개시를 선언함.

선서문

1) 우리 3천만 전 민족은 좌우양익을 들어서 해외에서 과거 37년간 투쟁하고 환국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진정한 우리 정부로써 절대지지하는 동시에 그 지도하에 그 국민된 응분의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서함.

2) 금번 신탁관리제를 배격하기 위한 국민 총동원령에 의한 전민족의 항쟁행동은 각층 각계의 각 지역과 직장에서 질서 있는 규율을 엄수하여 최대의 성과를 내도록 일치한 행동을 전개할 것을 이에 맹서함.

3) 문화 수준이 높은 국민으로서의 금도를 잃지 않은 국민적 단체 행동으로서 비폭력적 항쟁으로 일시적 기분 감정에 그치지 않고 목적 달성하기까지 탁치에 살지 않고 완전한 자주독립에 죽기를 이에 맹서함.

대한민국 27년(1945) 12월 31일

결의문

1) 3천만 전 국민이 절대 지지하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우리의 정부로서 세계에 선포하는 동시에 세계 각국은 우리 정부를 정식으로 승인함을 요구함.

2) 우리는 5천년의 유구한 문화를 가진 민족으로서 도저히 4개국 관리 하에 신탁 통치를 받지 못함을 미(美), 영(英), 중(中), 소국(蘇國) 원수에게 통고함.

3) 현하 우리 국토 남북으로 진주하고 있는 미소 양군의 즉시 철퇴 요구를 연합군에 통고함.

4) 완전한 자주독립을 획득할 때까지 3천만 전 민족을 들어 탁치 반대 운동을 결사적으로 계속할 것을 4개국에 통고함.

〈중앙신문〉, 1946년 1월 1일

탁치반대국민총동원시위대회(託治反對國民總動員示威大會)

선언문

카이로, 포츠담선언과 국제헌장으로 세계에 공약한 한국의 독립부여는 금번 모스크바에서 개최한 3상회의의 신탁관리결의로서 수포로 돌아갔으니 다시 우리 3천만은 영예로운 피로써 자주독립을 획득치 아니하면 아니 될 단계에 들어섰다. 동포여! 8⋅15 이전과 이후 피차의 과오와 마찰을 청산하고서 우리정부 밑에 뭉치자. 그리하여 그 지도하에 3천만의 총역량을 발휘하여서 신탁관리제를 배격하는 국민운동을 전개하여 자주독립을 완전히 획취하기까지 3천만 전민족의 최후의 피 한방울까지라도 흘려서 싸우는 항쟁개시를 선언함.

선서문

1) 우리 3천만 전 민족은 좌우양익을 들어서 해외에서 과거 37년간 투쟁하고 환국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진정한 우리 정부로써 절대지지하는 동시에 그 지도하에 그 국민된 응분의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서함.

2) 금번 신탁관리제를 배격하기 위한 국민총동원령에 의한 전민족의 항쟁행동은 각층 각계의 각 지역과 직장에서 질서 있는 규율을 엄수하여 최대의 성과를 내도록 일치한 행동을 전개할 것을 玆에 맹서함.

3) 문화수준이 높은 국민으로서의 금도를 잃지 않은 국민적 단체행동으로서 비폭력적 항쟁으로 일시적 기분 감정에 그치지 않고 목적달성하기까지 탁치에 살지 않고 완전한 자주독립에 죽기를 玆에 맹서함.

大韓民國 27년 12월 31일

결의문

1) 3천만 전 국민이 절대지지하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우리의 정부로서 세계에 선포하는 동시에 세계 각국은 우리 정부를 정식으로 승인함을 요구함.

2) 우리는 5천년의 유구한 문화를 가진 민족으로서 도저히 4개국 관리 하에 신탁통치를 받지 못함을 美, 英, 中, 蘇國 원수에게 통고함.

3) 현하 我國土 남북으로 진주하고 있는 미소 양군의 즉시 철퇴 요구를 연합군에 통고함.

4) 완전한 자주독립을 획득할 때까지 3천만 전 민족을 들어 탁치반대운동을 결사적으로 계속할 것을 4개국에 통고함.

〈중앙신문〉, 1946년 1월 1일

이 사료는 1945년 12월 31일 개최된 신탁 통치 반대 국민 총동원 위원회의 ‘탁치 반대 국민 총동원 시위 대회’에서 나온 선언문과 선서문, 결의문이다.

1945년 12월 16일 미국⋅영국⋅소련 3국 외무 장관은 모스크바에서 외무 장관 회담을 개최하고 한반도 문제를 처리하는 방안에 관해 논의하였다. 회의의 주요 내용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과 이를 지원하기 위한 미소 공동 위원회 설치, 미국⋅영국⋅소련⋅중국 등 4개국에 의한 잠정적인 신탁 통치 실시였다.

신탁 통치 문제는 한반도의 독립을 위한 수단이자 과정으로 선택되었는데, 국내에서는 ‘신탁 통치 실시’만 알려지면서 우익에서는 즉각 반탁 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우익인 한민당의 입장을 대변했던 〈동아일보〉는 “소련은 신탁 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 점령”이라고 왜곡 보도하여 반탁 운동에 불을 붙였다. 1945년 12월 28일 대한민국 임시 정부 요인들이 중심이 되어 각계 대표자들과 회합하였고, 다음 날 ‘신탁통치 반대 국민 총동원 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임시 정부 측은 긴급히 비상 국민 회의를 통하여 민주의원을 구성하고 ‘탁치 반대 국민 총동원 시위 대회’를 개최하는 등 신탁 통치를 적극 반대하였다.

임시 정부는 1946년 1월 21일 비상 정치 회의 주비 회의를 열고 2월 1일 비상 국민 회의를 정식 소집하였다. 혁신 계열 및 좌익이 참가하지 않아 비상국민회의는 우익 세력만으로 구성되었지만 전국적 반탁 운동 전개의 기반이 되었다. 비상 국민 회의 최고정무위원회는 1946년 2월 14일 미군정 고문기관인 남조선 대한 국민 대표 민주의원으로 개편되어 일종의 입법기관 역할을 하였다. 비상 국민 회의는 1947년 2월 16일 제2차 본회의를 열고 국민 의회로 개칭하고 주석에 이승만(李承晩, 1875~1965), 부주석에 김구(金九, 1876~1949)를 추대하였다. 해방 직후 이승만이 주도하여 결성했던 독립 촉성 중앙 위원회는 1946년 2월 8일 독립 촉성 국민회로 개칭했고, 이승만은 이를 중심으로 ‘자율 정부 수립 운동’을 펼쳐 나갔다. 반탁 운동은 이승만과 김구 등 우익 인사의 주도 하에 전개되었지만, 결국 이후에는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 문제를 둘러싸고 이승만의 단정 노선과 김구의 단정 불가⋅통일 정부 노선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1946년 4월 17일 미소 공동 위원회의 협의 대상이 되려면 「모스크바 협정」을 지지하는 선언서에 서명을 해야 한다는 이른바 미소 공동 위원회 「코뮤니케 제5호」에 대한 하지(Hodge, J. R.) 의 해석을 둘러싸고 미국과 소련 사이의 의견 대립이 심각해져 5월 6일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결렬되었다. 그러자 이승만은 6월 3일 이른바 「정읍 발언」을 통해 남한 단독 정부 수립 운동을 시작하였다.

김규식과 여운형(呂運亨, 1886~1947)은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결렬된 뒤 이념 대립을 극복하고 임시 정부를 수립하고자 좌우 합작 운동을 전개하였고, 「좌우 합작 7원칙」에 대해 합의하였다. 그러나 우파인 한민당과 좌파인 조선 공산당이 이 원칙에 반대함으로써 좌우 합작 운동은 중도파의 운동이 되어 버렸고, 여기에 1947년 7월 19일 여운형이 암살당했다.

제2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다시 협의 대상 문제로 결렬되자 미국이 한반도에서의 신탁 통치를 포기하고 한반도 문제를 국제 연합으로 이관하면서 미소 공동 위원회와 한반도 신탁 통치 문제도 소멸되었다. 그 뒤 미군정의 대한반도 정책은 이승만과 한민당의 남한 단정 노선으로 바뀌게 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저서
「해방 후 좌우합작에 의한 민족국가건설운동 연구」, 서중석,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0.
편저
『분단전후의 현대사』, 브루스 커밍스 외, 일월서각, 1983.
『해방40년의 재인식』, 송건호 외, 돌베개,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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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탁 통치 반대 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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