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현대정치광복 직후의 국내 정세

모스크바 3국 외상회담 결정에 대한 조선 공산당의 지지 담화문

모스크바 삼상 회의 진보적-조선 공산당지지 표명

모스크바 삼상 회의의 결정을 신중히 검토한 결과, 우리는 다음의 태도를 표명한다. 이번 회담은 세계 민주주의 발전에 있어서 또 한걸음 진보한 것이다. 영국과 미국 양국으로 하여금 얄타 회담에서 결정된 민주주의 노선을 더욱 강하게 인식시킴으로써 소련⋅영국⋅미국 삼국은 국제 협력을 더욱 굳게 하는 동시에 전후 평화 유지와 전후 건설에 있어서 삼국은 세계를 지도하는 책임과 의무를 가지고 있는 것은 반 파쇼 전쟁에 있어서나 전후에 있어서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 삼상 회담에서 여러 나라에 대한 민주주의 발전의 구체적 결정이 나오게 된 것이다. 예컨대 조선 문제에 있어서 『조선을 독립 국가로 부흥하고 민주주의 기초 위에서 나라가 발전될 조건을 만들기 위하여 또는 장구한 일본 지배의 해독 있는 잔인한 자취를 신속히 청산할 목적으로 조선에서 공업⋅농업⋅교통⋅민족 문화의 발전의 방책을 진행할 수 있는 정부와 조선 민주주의 정부를 조직한다』는 동 결정문의 이러한 국제적 결정은 오늘날 조선을 위하는 가장 정당한 것이라고 우리는 인정한다. 이것은 조선으로 하여금 민주주의 국가로 발전시키자는 것이다. 조선의 독립은 민주주의 국가로서만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문제의 5년 기한은 그 책임이 삼국 회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인즉 우리 민족 자체의 결점(장구한 일본 지배의 해독과 민족적 분열 등)에 있다고 우리는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결정의 책임을 의식적으로 삼국에 돌리고 이것을 정면으로 반대 배격함에 열중하고 삼국의 우호적 협조와 협력(신탁)을 마치 제국주의적 위임 통치제라고 왜곡하고 과거에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동일시하여 조선 민족을 오도하며 민주주의적 연합국을 적대하는 방향으로 대중을 기만하는 정책을 쓰고 있는 김구 일파의 소위 반 신탁 운동은 조선을 위하여 극히 위험천만한 결과를 나타날 것은 필연이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이번 삼국 회의의 본질적 진보성을 널리 해석 설명하여 조선 민족의 나갈 길을 옳게 보여주어야 한다. 세계 평화와 민주주의와 국제 협동의 정신 하에서만 조선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카이로 회담은 조선 독립을 적당한 시기에 준다는 것인데 이 적당한 시기라는 것이 이번 회담에서 5년 이내로 결정된 것이다. 이것을 우리가 5년 이내에 통일이 되고 우리 발전이 상당한 때에는 그 기한은 단축될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은 오직 우리 역량발전 여하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모스크바 결정은 카이로 결정을 더욱 발전 구체화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할 일은 무엇보다도 먼저 통일의 실현에 있다. 민족의 통일 –이것이 우리의 가장 급무임을 이해하고 속히 민주주의 원칙(친일파, 민족 반역자, 국수주의자를 제외한)을 내세우고 이것을 중심으로 조선 민족 통일 전선을 완성함에 전력을 집중하여야 한다.

1946년 1일 2일 조선 공산당 중앙 위원회

〈해방일보〉, 1946년 1월 6일

모스크바삼상회의 진보적-조선공산당지지표명

모스크바三相會議의 決定을 愼重히 檢討한 結果, 우리는 다음의 態度를 表明한다. 이번 會談은 世界民主主義發展에 있어서 또 한거름 進步한 것이다. 英米 兩國으로 하여금 야루타 會談에서 決定된 民主主義로선을 더욱 强하게 인식식힘으로서 소, 英, 米 三國은 國際協力을 더욱 굿게 하는 同時에 戰後平和維持와 戰後建設에 있어서 三國은 世界를 指導하는 責任과 義務를 가지고 있는 것은 反팟쇼戰爭에 있어서나 戰後에 있어서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이런 意味에서 이번 三相會議는 여러 나라에 對한 民主主義發展의 具體的決定이 나오게 된 것이다. 例컨데 朝鮮問題에 있어서 『朝鮮을 獨立國家로 復興하고 民主主義 基礎 우에서 나라가 發展될 條件을 맨들기 爲하야 또는 長久한 日本支配의 害毒있는 殘蹟을 急速히 淸算할 目的으로 朝鮮에서 工業, 農業, 交通, 民族文化의 發展의 方策을 進行할 수 있는 政府와 朝鮮民主主義政府를 組織한다』 同決定文의 이러한 國際的 決定은 今日 朝鮮을 爲하는 가장 正當한 것이라고 우리는 認定한다. 이것은 朝鮮으로 하여금 民主主義國家로 發展식히자는 것이다. 朝鮮의 獨立은 民主主義國家로서만 解決되여야 한다는 것을 意味한 것이다.

問題의 五年 期限은 그 責任이 三國會議에 있는 것이 아니라 實인즉 우리 民族自體의 缺點(長久한 日帝支配의 害毒과 民族的 分裂 等)에 있다고 우리는 反省하지 안흐면 안된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이번 決定의 責任을 意識的으로 三國에 돌리고 이것을 正面으로 反對排擊함에 熱中하고 三國의 友好的 援助와 協力(信託)을 恰似히 帝國主義的 委任統治制라고 歪曲하고 過去에 日本帝國主義의 侵略과 同一視하여 朝鮮民族을 誤導하며 民主主義的 聯合國을 敵對하는 方向으로 大衆을 기만하는 정策을 쓰고 있는 金九一派의 所謂 反信託運動은 朝鮮을 爲하야 極히 危險千萬한 結果를 나타날 것은 必然이다. 이에 對하야 우리는 이번 三國會議의 本質的 進步性을 널리 해석 설명하야 朝鮮民族의 나갈 길을 올케 보여 주어야 한다. 世界平和와 民主主義와 國際協同의 精神 下에서만 朝鮮問題가 解決되여야 한다. 카이로會談은 朝鮮獨立을 適當한 時期에 준다는 것인데 이 適當한 時期라는 것이 이번 會談에 五年 以內로 決定된 것이다. 이것을 우리가 五年 以內에 統一이 되고 우리 發展이 相當한 時에는 그 期限은 短縮될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은 오직 우리 力量發展如何에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 이번 모스크바決定은 카이로決定을 더욱 發展具體化식힌 것이다. 그럼으로 우리의 할 일은 무엇보다도 먼저 統一의 實現에 있다. 民族의 統一-이것이 우리의 가장 急務임을 리해하고 하로 速히 民主主義 原則(親日派, 民族反逆者 國粹主義者를 除外한)을 내세우고 이것을 中心하고 朝鮮 民族統一戰線을 完成함에 全力을 集中하여야 한다.

一九四六年 一月 二日  朝鮮共産黨中央委員會

〈해방일보〉, 1946년 1월 6일

이 사료는 1946년 1월 2일 조선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에 대한 지지 의사를 처음 공식적으로 표명한 지지 담화문이다.

조선 공산당은 이 지지 담화문에서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의 핵심은 조선에서 민주주의 국가를 수립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탁 통치는 제국주의적 위임 통치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신탁 통치 기간 5년 동안 우리가 할 일은 친일파⋅민족 반역자⋅국수주의자를 제외한, ‘민주주의 원칙’에 근거한 조선 민족 통일 전선의 완성이라고 주장하였다.

일제 강점기 말인 1943년 3월 영국 외상 이든((Eden, Robert Anthony)과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Roosevelt, Franklin Delano)는 워싱턴에서 만나 처음 한반도 문제에 대해 논의하였다. 그리고 그해 11월 카이로 회담과 1945년 2월의 얄타 회담에서도 한반도 문제가 거론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미국이 한반도 신탁 통치를 처음 제안했지만 소련은 이를 반대하면서 한국의 임시 정부 수립과 즉시 독립을 주장하였다. 결국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미국과 소련의 안이 절충된 임시 정부 수립안과 5년간의 신탁 통치안이 결정되었다.

당시 결정된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을 독립 국가로 재건하기 위해 한국 임시 정부를 수립한다. 둘째, 한국 임시 정부 수립을 돕기 위해 미소 점령군 사령부 대표로 구성되는 공동 위원회를 설치한다. 공동 위원회는 한국의 민주적 제 정당 및 사회단체와 협의한다. 셋째, 미국⋅영국⋅소련⋅중국 4개국이 공동 관리하는 최고 5년 기한의 신탁 통치를 실시한다.

모스크바 3상 회의의 신탁 통치 결정에 대해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신탁 통치 반대 국민 총동원 위원회’를 결성하고, 1946년 1월 12일 대규모 반탁 시위를 개최하여 이를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다. 임시 정부는 1월 21부터 비상 정치 회의 주비 회의를 열고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의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와 함께 우익 통일 전선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2월 1일과 2일 우익 정당, 사회단체, 중도파 정당들이 참석한 가운데 비상 국민 회의가 발족했고, 1947년 2월 16일 제2차 본회의에서 국민 의회로 이름을 바꾸고 주석에 조소앙(趙素昻1887~1958), 부주석에 유림(柳林, 1894~1961)을 추대하였다. 이렇듯 반탁 운동은 우익과 민족 진영의 주도 하에 전개되었다.

좌익은 1945년 12월 29일 개최된 신탁 통치 반대 국민 총동원 위원회에도 참여했고, 12월 31일에는 40여 개의 좌익 단체가 모여 반파쇼 공동 투쟁 위원회를 발족하는 등 신탁 통치안 철폐 요구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반탁 입장이었다.

그런데 좌익 측은 1945년 12월 30일 국내 언론에 모스크바 3상 회의 협정문 전문이 공개되고, 주된 내용이 신탁 통치가 아닌 임시 정부 수립이라는 점을 파악한 뒤부터 찬탁으로 입장을 바꿨다. 그리고 1946년 1월 2일 조선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모스크바 3상 회의 지지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저서
「해방 후 좌우합작에 의한 민족국가건설운동 연구」, 서중석,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0.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서중석, 역사비평사, 1991.
편저
『해방전후사의 인식』3, 박현채 외, 한길사, 1987.
『분단전후의 현대사』, 브루스 커밍스 외, 일월서각,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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