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현대정치광복 직후의 국내 정세

좌우 합작 위원회의 좌우 합작 7원칙

좌우 합작 위원회 합작 원칙(1946. 10. 7)

본 위원회의 목적(민주주의 임시 정부를 수립하여 조국의 완전 독립을 촉성할 것)을 달성하기 위하여 기본 원칙을 아래와 같이 의논하여 정함

1) 조선의 민주 독립을 보장한 삼상 회의 결정에 의하여 남북을 통한 좌우 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 정부를 수립할 것

2) 미소 공동 위원회 속개를 요청하는 공동 성명을 발표할 것

3) 토지 개혁에 있어서 몰수, 유조건 몰수, 체감매상(遞減買上) 등으로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주며, 시가지의 기지와 큰 건물을 적정 처리하며, 중요 산업을 국유화하며, 사회 노동 법령과 정치적 자유를 기본으로 지방 자치제의 확립을 속히 실시하며, 통화와 민생 문제 등등을 급속히 처리하여 민주주의 건국 과업 완수에 매진할 것

4)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처리할 조례를 본 합작 위원회에서 입법 기구에 제안하여 입법 기구로 하여금 심리 결정하여 실시케 할 것

5) 남북을 통하여 현 정권하에 검거된 정치 운동가의 석방에 노력하고 아울러 남북 좌우의 테러 행동을 일절 즉시로 제지토록 노력할 것

6) 입법 기구에 있어서는 일체 그 권능과 구성 방법 운영에 관한 대안을 본 합작 위원회에서 작성하여 적극적으로 실행을 기도할 것

7) 전국적으로 언론, 집회, 결사, 출판, 교통, 투표 등 자유를 절대 보장되도록 노력할 것

단기 4279년(1946) 10월 7일

좌우 합작 위원회

〈동아일보〉, 1946년 10월 8일

左右合作委員會 合作原則(1946. 10. 7)

本 委員會의 目的(民主主義臨時政府를 樹立하야 祖國의 完全獨立을 促成할 것)을 達成하기 위하야 基本原則을 下와 如히 議定함

1) 朝鮮의 民主獨立을 保障한 三相會議決定에 依하야 南北을 通한 左右合作으로 民主主義臨時政府를 樹立할것

2) 美, 蘇共同委員會 續開를 要請하는 共同聲明을 發할것

3) 土地改革에 있어 沒收, 有條件沒收, 遞減買上等으로 土地를 農民에게 無償으로 分與하며 市街地의 基地及大建物을 適正處理하며 重要産業을 國有化하며 社會勞動法令及政治的自由를 基本으로 地方自治制의 確立을 速히 實施하며 通貨及民生問題等等을 急速히 處理하야 民主主義建國課業完遂에 邁進할 것

4) 親日派 民族叛逆者를 處理할 條例를 本合作委員會에서 立法機構에 提案하야 立法機構로 하야금 審理決定하야 實施케할것

5) 南北을 通하야 現政權下에 檢擧된 政治運動者의 釋放에 努力하고 아울러 南北左右의 테로적行動을 一切卽時로 制止토록 努力할것

6) 立法機構에 있어서는 一切 其權能과 構成方法運營等에 關한 代案을 本 合作委員會에서 作成하여 積極的으로 實行을 企圖할 것

7) 全國的으로 言論 集會 結社 出版 交通 投票等 自由를 絶對保障되도록 努力할것

檀紀 四二七九年 十月 7日

左右合作 委 員 會

〈東亞日報〉, 1946年 10月 8日

이 사료는 우익의 김붕준(金朋濬, 1888~1950)⋅최동오(崔東旿, 1892~1963)⋅안재홍(安在鴻, 1891~1965), 좌익의 여운형(呂運亨, 1886~1947)⋅장건상(張建相, 1883~1974) 등이 1946년 10월 7일 좌익의 5원칙과 우익의 8원칙을 절충하여 결정한 「좌우 합작 7원칙」이다.

1946년 1월 7일 「4당 공동 코뮤니케」를 발표되면서 좌우 합작 운동의 기초가 마련되었는데, 이는 조선 공산당⋅인민당⋅국민당⋅한국 민주당 등 4당 대표가 신탁 통치 문제가 대두한 이후 민족 내부의 단결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발표한 공동 성명이다. 「4당 공동 코뮤니케」의 핵심은 “모스크바 결정에 대해 조선의 자주 독립을 보장하고 민주주의적 발전을 원조한다는 정신과 의도는 전적으로 지지한다”면서도 “신탁 제도는 장래 수립될 우리 정부로 하여금 자주독립의 정신에 기하여 해결케” 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4당 공동 코뮤니케」는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의 반탁 성명과 한국 민주당 내 강경파의 반대로 성과를 내지 못했지만 민족 단합을 위한 원칙이 되었다. 여운형과 김규식(金奎植, 1881~1950)의 정치 노선이나 좌우 합작을 추진하는 기본 구상은 달랐지만 그것을 추진하는 기본 원칙은 양쪽 모두 「4당 공동 코뮤니케」의 정신이었다.

1946년 5월 8일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결렬됨에 따라 한국 임시 정부 수립에 대한 전망이 흐려지고, 각 정파는 이승만계의 남한 단독 정부 수립 운동, 김구계의 반탁 통일 운동, 김규식의 좌우 합작 운동, 좌익계의 미소 공동 위원회 재개 촉진 운동 등 여러 방안으로 난립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군정이 김규식과 여운형계가 이끄는 중도 세력을 중심으로 한 좌우 합작 정책을 지원하면서 이 운동은 대대적인 호응과 지지를 받게 되었다.

1946년 10월 7일, 미군정 고문 버치(Bertsch, Leonard M.) 중위의 지원으로 좌우 합작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좌익과 우익은 1946년 5월 25일 1차, 5월 30일 2차, 6월 14일 3차 회합하였고, 7월 19일 좌우 합작 대표가 결정되었다. 우익 대표는 김규식⋅원세훈(元世勳, 1887~1959)⋅안재홍 등이며, 좌익 대표는 여운형⋅허헌(許憲, 1885~1951) 등이었다. 양측 대표는 7월 26일 제1차 정례 회담을 개최했으나 좌측이 합작 원칙 5개 조항을 회의 진행 전제 조건으로 제시하여 회의가 유회되었다. 7월 29일 제2차 정례 회담 때 우측도 「좌우 합작 8원칙」을 발표했지만 좌측의 불참으로 제2차 회담도 유회되고 말았다.

좌익인 민주주의 민족 전선의 「좌우 합작 5원칙」과 우익의 「좌우합작 8원칙」은 주로 토지 개혁과 주요 산업의 처리, 친일파 청산, 신탁 통치 문제, 인민 위원회와 입법 의원 문제 등에서 차이를 보였다. 민주주의 민족 전선은 “무상 몰수, 무상 분배에 입각한 토지 개혁과 친일 민족 반역자 제거, 정권을 인민 위원회로 넘길 것” 등을 주장하였고, 우익 측은 “임시 정부 수립 후 친일파 처리, 신탁 통치 반대 및 유상 몰수, 유상 분배의 토지개혁” 등을 주장하였다.

1946년 8월 26일 우익의 김붕준⋅최동오⋅안재홍, 좌익의 여운형⋅장건상 등이 회합하여 합작 대책을 논의하였고, 9월 9일에는 여운형⋅장건상 등이 예비 회담을 열었다. 그리고 10월 4일, 일주일 동안 북조선을 방문하고 돌아온 여운형이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좌측의 5원칙과 우측의 8원칙을 절충한 「좌우 합작 7원칙」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좌우 합작 운동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좌우 합작 7원칙」이 결정될 무렵 이미 좌익과 우익의 사이가 크게 벌어져 상호 비방을 넘어 물리적 충돌과 테러가 자주 일어났으며, 공산당은 미군정의 탄압을 받아 지하로 들어간 상태였다. 미국과 소련도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정부를 세우기로 결정하고 남과 북에 각각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논문
「해방직후의 민족통일전선 운동」,『한국현대사』1,윤덕영,풀빛,1991.
「8⋅15를 전후한 여운형의 정치활동」,『해방전후사의 인식』1,이동화,한길사,1979.
저서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서중석, 역사비평사, 1991.
『해방3년사』, 송남헌, 까치, 1985.
『여운형』, 이기형, 창작과 비평사, 1994.
편저
『한국현대사 강의』, 김인걸 외, 돌베개,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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