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본 한국사시대별현대정치4⋅19 혁명과 민주당 정부

서울대학교 문리대 학생의 4.19 선언문

서울대 4.19 선언문(1960. 4. 19)

상아의 진리탑을 박차고 거리에 나선 우리는 질풍과 같은 역사의 조류에 자신을 참여시킴으로써 이성과 진리, 그리고 자유의 대학정신을 현실의 참담한 박토(薄土)에 뿌리려 하는 바이다.

오늘의 우리는 자신들의 지성과 양심의 엄숙한 명령으로 하여 사악(邪惡)잔학(殘虐)의 현상을 규탄 광정(匡正)하려고 주체적 판단과 사명감의 발로임을 떳떳이 선명하는 바이다.

우리의 지성은 암담한 이 거리의 현상이 민주와 자유를 위장한 전체주의의 표독한 전횡에 기인한 것임을 단정한다. 무릇 모든 민주주의의 정치사는 자유의 투쟁사이나 그것은 또한 여하한 형태의 전제정치도 민중 앞에 군림하는 종이로 만든 호랑이 같이 어설픈 것임을 알려 준다.

한국의 일천한 대학의 역사가 적색전제(赤色專制)에의 과감한 투쟁의 거획(巨劃)을 담당하고 있는 데 크나큰 자부를 느끼는 것과 똑같은 논리의 연역(演繹)에서 민주주의를 위장한 백색전제(白色專制)에의 항의를 가장 높은 영광으로 우리는 자부한다.

근대적 민주주의의 근간은 자유다. 우리에게서 자유는 상실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아니 송두리째 박탈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성의 혜안(慧眼)으로 직시한다.

이제 막 자유의 전장엔 불이 붙기 시작하였다. 정당히 가져야 할 권리를 탈환하기 위한 자유의 전역(戰域)은 바야흐로 풍성해 가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민중의 공복(公僕)이며 중립적 권력체인 관료와 경찰은 민주를 위장한 가부장적 전제 권력의 하수인으로 발 벗었다. 민주주의 이념에서 가장 기본적인 공리인 선거권마저 권력의 마수 앞에 농단되었다. 언론⋅출판⋅집회⋅결사 및 사상의 자유의 불빛은 무식한 전제 권력의 악랄한 발악으로 하여 깜박이던 빛조차 사라졌다. 긴 칠흑 같은 밤의 계속이다.

나이 어린 학생 김주열의 참혹한 시신을 보라! 그것은 가식 없는 전제주의 전횡의 발가벗은 나상(裸像)밖에 아무것도 아니다.

저들을 보라! 비굴하게도 위하(威嚇)와 폭력으로써 우리들을 대하려 한다. 우리는 백보를 양보하고라도 인간적으로 부르짖어야 할 같은 학생의 양심을 느낀다.

보라! 우리는 기쁨에 넘쳐 자유의 횃불을 올린다.

보라! 우리는 캄캄한 밤의 침묵에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打手)의 일익(一翼)임을 자랑한다. 일제의 철퇴 하에 미칠 듯 자유를 환호한 나의 아버지 형제들과 같이 양심은 부끄럽지 않다. 외롭지도 않다. 영원한 민주주의의 사수파(死守派)는 영광스럽기만 하다.

보라! 현실의 뒷골목에서 용기 없는 자학을 되씹는 자까지 우리의 대열을 따른다.

나가자! 자유의 비결은 용기일 뿐이다. 우리의 대열은 이성과 양심과 평화, 그리고 자유에의 열렬한 사랑의 대열이다. 모든 법은 우리를 보장한다.

시사연구소 편, 『(시사자료) 광복30년사』, 세문사, 1977

서울大 4.19 宣言文(1960. 4. 19)

象牙의 眞理塔을 박차고 거리에 나선 우리는 疾風과 같은 歷史의 潮流에 自身을 參與시킴으로써 理性과 眞理, 그리고 自由의 大學精神을 現實의 慘憺한 薄土에 뿌리려 하는 바이다.

오늘의 우리는 自身들의 知性과 良心의 嚴肅한 命令으로 하여 邪惡과 殘虐의 現狀을 糾彈 匡正하려고 主體的 判斷과 使命感의 發露임을 떳떳이 선명하는 바이다.

우리의 知性은 암담한 이 거리의 현상이 民主와 自由를 위장한 全體主義의 표독한 傳橫에 基因한 것임을 단정한다. 무릇 모든 民主主義의 政治史는 自由의 鬪爭史나 그것은 또한 如何한 形態의 專制도 民衆 앞에 君臨하는 종이로 만든 호랑이 같이 헤설픈 것임을 敎示한다.

韓國의 日淺한 大學史가 赤色專制에의 果敢한 鬪爭의 巨劃을 掌하고 있는데 크나큰 自負를 느끼는 것과 똑같은 論理의 演繹에서 民主主義를 僞裝한 白色專制에의 抗議를 가장 높은 榮光으로 우리는 自負한다.

近代的 民主主義의 基幹은 自由다. 우리에게서 自由는 喪失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아니 송두리채 剝奪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理性의 慧眼으로 直視한다.

이제 막 自由의 戰場엔 불이 붙기 시작하였다. 正當히 가져야 할 權利를 奪還하기 위한 自由의 戰域은 바야흐로 豊盛해 가고 있는 것이다.

民主主義와 民衆의 公僕이며 中立的 勸力體인 官僚와 警察은 民主를 僞裝한 家父長的 專制 權力의 下手人으로 발 벗었다. 民主主義 理念의 最低의 公理인 選擧權마저 權力의 魔手 앞에 壟斷되었다. 言論 出版 集會 結社 및 思想의 自由의 불빛은 無識한 專制 權力의 악랄한 發惡으로 하여 깜박던 빛조차 사라졌다. 긴 칠흑 같은 밤의 繼續이다.

나이 어린 學生 金朱烈의 懺屍를 보라! 그것은 假蝕없는 專制主義 專橫의 발가벗은 裸像 밖에 아무것도 아니다.

저들을 보라! 卑屈하게도 威嚇와 暴力으로써 우리들을 對하려 한다. 우리는 百步를 讓步하고라도 人間的으로 부르짖어야 할 같은 학생의 良心을 느낀다.

보라! 우리는 기쁨에 넘쳐 自由의 횃불을 올린다.

보라! 우리는 캄캄한 밤의 沈黙에 자유의 鍾을 亂打하는 打手의 一翼임을 자랑한다. 日帝의 鐵槌 하에 미칠 듯 自由를 歡呼한 나의 아버지 兄弟들과 같이 良心은 부끄럽지 않다. 외롭지도 않다. 永遠한 民主主義의 死守派는 榮光스럽기만 하다.

보라! 現實의 뒷골목에서 勇氣없는 自虐을 되씹는 者까지 우리의 隊列을 따른다.

나가자! 自由의 비결은 勇氣일 뿐이다. 우리의 隊列은 理性과 良心과 平和 그리고 自由에의 熱烈한 사랑의 隊列이다. 모든 法은 우리를 保障한다.

시사연구소 편, 『(시사자료) 광복30년사』, 세문사, 1977

이 사료는 1960년 4월 19일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발표한 「4⋅19선언문」이다.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3⋅15 부정선거는 이승만(李承晩, 1875~1965) 정권의 붕괴를 가져온 4⋅19 혁명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3월 15일인 선거 당일 전국 각지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경상남도 마산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는데, 주로 시민과 학생으로 이루어진 시위대에 경찰이 발포하면서 9명이 사망했고, 80여 명이 중상을 입었다.

1960년 4월 12일자 〈부산일보〉에는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중앙부두 앞에 떠오른 김주열 군의 시신 사진이 실렸다. 이를 계기로 이날부터 마산에서 시위가 다시 전개되었다. 3만여 명의 마산 시위대는 이승만의 퇴진을 요구하면서 마산시청, 파출소, 자유당사 등을 파괴했고, 경찰은 또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퍼부었다. 그런데 마산 시위는 이에 그치지 않고 전국으로 확산되어 갔다.

4월 18일 정오, 고려대학교 교정에 모여 있던 학생 3,000여 명이 교문 밖으로 진출하였다. 국회로 나갔던 학생 시위대가 학교로 돌아오던 7시 20분경, 종로4가에서 정치 깡패들이 학생들을 습격하였다. 그 다음 날 조간신문에는 깡패들에게 습격당한 학생들에 관한 기사가 사진과 함께 크게 보도되었다.

그 뒤 서울대학교 각 단과대학 대표들은 의과대학 캠퍼스인 함춘원에 모여 다음 날 전체 학생이 궐기하기로 뜻을 모았다. 서울대학교 학생 신문인 「새 세대」의 주간 겸 편집장을 맡고 있던 문리대학 정치학과 3학년 이수정이 선언문을 작성하였다. 그가 한 시간 만에 작성한 선언문은 붓글씨를 잘 쓰던 정치학과 3학년 황선필이 학과 연구실에서 정서를 해 등사기로 밀었고, 형사들에게 빼앗길까봐 몇몇 학생이 밤새도록 이를 지켰다.

1960년 4월 19일 오전 9시 10분, 서울 동숭동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마로니에 광장. 교정 밖에서 터져 나온 대광 고등학교 학생들의 함성과 함께 서울대학교 문리대학생 수백 명이 마로니에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이들에게 궐기를 촉구하는 선언문이 뿌려졌다.

오전 9시 20분, 미처 선언문을 낭독할 사이도 없이 서울대학교 문리대학생 200여 명이 교문을 박차고 길거리로 뛰쳐나갔다. 바로 뒤이어 법과대학⋅미술대학⋅약학대학⋅수의과대학⋅치과대학 학생들이 시위에 동참하였다. 3,000여 명의 서울대학교 학생들은 돌팔매를 퍼부으며 경찰 저지선을 돌파하고 태평로에 있는 국회의사당(현 서울시의회 건물)을 향해 달려갔다.

4월 19일 서울은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대학생 등 학생들의 함성으로 들끓었고, 시민들도 이에 동참하였다. 학생과 시민 등이 참여하여 20만 명을 넘은 시위대는 중앙청 앞과 세종로 일대에서 총격에 쫓겨 후퇴와 진격을 되풀이하였다. 4월 19일 오후 3시 계엄령이 선포되었지만 시위대는 시위를 중단하지 않았다. 이날 전국에서 벌어진 시위에서 100명 이상이 사망했고, 수천 명이 부상당하였다.

4월 23일, 장면(張勉, 1899~1966) 부통령이 사임하고 민주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선언하였다. 4월 25일에는 대학 교수들까지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에 나섰다. 이에 주한미국대사 월터 매카너기(Walter McConaughy)가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서 하야할 것을 설득하였고, 법무부장관 권승렬, 신임 외무부장관 허정 등도 이승만의 하야를 요청하였다. 결국 4월 24일에 이승만 대통령은 유혈 사태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지고 자유당 총재직에서 사임하겠다고 선언했고, 4월 26일 오후 1시 라디오 연설을 통해 대통령 자리에서 하야하겠다고 발표하였다.

1960년 2월 28일 대구 지역 고등학생들의 시위로 시작하여, 3월 15일 1차 마산 항쟁, 4월 11일 2차 마산 항쟁,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 시위, 19일 전국적인 민중 항쟁, 25일 교수단 시위로 이어진 4⋅19 혁명은 마침내 이승만을 대통령직에서 끌어내렸다. 4⋅19 혁명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투쟁이었고, 서울대학교 문리대학생들이 「4⋅19선언문」에서 밝힌 것처럼 백색 독재를 거부하는 투쟁이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저서
『한권으로 보는 해방후 정치사 100장면』, 김삼웅, 가람기획, 1999.
『한국현대사 60년』, 서중석, 역사비평사, 2007.
편저
『한국민주화운동사』1,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돌베개, 2008.
『4⋅19와 남북관계』, 한국역사연구회 4월항쟁연구반, 민연,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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